석탑 10

쌍사자석등의 변화, 통일신라시대에서 조선 초기까지

불교와 사자의 관련성이 명확한 것은 없지만, 사찰에서 불법을 수호하는 상징으로 사자를 조각해 두는 경우가 많다. 화엄사 4사자 삼층 석탑이나 법주사의 쌍사자 석등, 불국사의 다보탑 등에는 사자상이 있고, 문수보살은 지혜가 용맹함을 나타내는 사자를 타고 있다. 사자는 인도의 국장이기도 하고 부처를 상징하는 상징물로도 표현된다. 무엇보다 사자의 포효처럼 중생들을 조복(調伏)시키는 석가모니의 설법의 위엄을 나타내는 '사자후(獅子吼)'라는 고사성어에서 사자는 부처님의 위엄을 상징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석가모니가 태어나자마자 한 손은 하늘을 가리키고 한 손은 땅을 가리키며 일곱 발자국을 떼고 사방을 돌아보며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 : 우주 속에 나보다 더 존귀한 것은 없다.)" 외친 것을 《유마경(維摩..

<국보 제100호> 개성 남계원지 칠층석탑 /국립중앙박물관

경기도 개성 부근의 남계원터에 남아 있던 탑으로, 예전에는 이 터가 개국사(開國寺)의 옛터로 알려져 '개국사탑'으로 불려져 왔으나, 나중에 남계원의 터임이 밝혀져 탑의 이름도 '남계원칠층석탑'으로 고쳐지게 되었다. 1915년에 탑의 기단부를 제외한 탑신부만 경복궁으로 이전하였다. 이후 원 위치에 대한 조사 결과 2층으로 구성된 기단이 출토되어 추가 이전해 석탑 옆에 놓았다가 다시 복원해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옮겨 세워져있다. 고려시대의 석탑으로는 규모가 크다. 기단이 낮아지고 층단받침이 얕아지며 처마곡선이 부드러워지고 5층 이상으로 많아지는 탑신 등이 고려석탑의 특징을 보여주는데, 신라석탑을 계승했다기보다는 개경을 중심으로 중부 이북 지역에 새로이 등장하는 고려 석탑의 양식으로 볼 수 있다. 탑은 2단의..

국립중앙박물관 야외전시장, 석탑과 쌍사자석등 기타 석조유물들

국립중앙박물관에는 전시관 건물 앞뜰에 일렬로 전시된 사리탑과 석등 외에도 동편에 아늑하게 조성된 정원 곳곳에 배치해 놓은 석탑과 장명등, 석불, 문인석, 장명등 등 여러 가지 석조유물이 있다. 옛 보신각 동종 건물 뒤편 동산길로 들어서면 차례대로 감상할 수 있다. 국보로 지정된 통일신라와 고려시대의 탑 2기, 쌍사자가 등으로 받치고 있는 고달사지 석등 등이 특히 눈여겨 볼 만한 문화재이다. ■ 개성 남계원칠층석탑 국보 제100호 개성 부근의 남계원터에 남아 있던 탑으로, 예전에는 이 터가 개국사(開國寺)의 옛터로 알려져 개국사탑으로 불려져 왔으나, 나중에 남계원의 터임이 밝혀져 탑의 이름도 남계원칠층석탑으로 고쳐지게 되었다. 1915년에 탑의 기단부를 제외한 탑신부만 경복궁으로 이전하였다. 이후 원 위치..

영주 부석사 (2) 최고의 건축 무량수전, 선묘와 의상의 사랑으로 열린 극락세계

때로는 성벽처럼 위엄으로 마주치고 , 때로는 고향집 축담처럼 다정하게 다가서는 9단 대석단의 돌계단을 하나하나 오르다 안양루 누각의 마루 위로 고개를 내미는 순간, 환한 빛 속에 9품왕생을 기원하는 듯한 석등 하나가 눈 앞에 다가서고 극락세계 무량수전이 마침내 모습을 드러내었습니다. 사바세계에서 천상의 극락세계로 들어서는 문은 이렇게 좁고 작았습니다. 석등 하나만 앞에 두고 시야를 꽉 채우는 무량수전(無量壽殿)(국보 제18호) 팔작지붕의 기와선은 물흐르듯 흘러내리다 금새 멈추어버린 듯 편안하고, 그 아래 여섯 개의 배흘림 기둥 이 만든 다섯 개의 공간은 세상 모든 것을 다 품어 줄 듯 너그럽고 아늑하기만 합니다. 이보다 더 소박할 수 없는 격자 창살문은 또 어떤가요... 천상의 극락세계가 이렇게 편안하게..

부여 (15) 아름다운 절집 만수산 무량사, 조선 최고의 건축미 극락전

무량사를 찾게 된 것은 금오산인 김시습의 흔적을 찾아보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단종 임금이 쫓겨났다는 소식에 충격을 받고 21세의 청년기에 방랑길을 떠난 김시습이 십여 년이 지난 뒤 경주 남산(금오산)에서 이 땅 최초의 한문소설 를 짓고 만년에 다시 방랑하다 입적한 곳이 무량사이기 때문이다. 작년 경주 남산을 찾았을 때에도, 그리고 덕유산을 갔다 덕유산 백련사 일주문 옆에서 김시습의 부도로 오해되고 있는 '매월당 부도'를 만났을 때에도, 무량사를 꼭 한번 찾으리라 생각하고 있던 터였다. 그리고 임진왜란 중 "왜적의 재침을 막고 나라를 바로잡겠다."는 기치를 들고 홍산에서 난을 일으킨 이몽학이 승려들과 함께 난을 모의하고 군사를 조련했던 곳이 또한 무량사였다는 점도 호기심을 자극하였다. 시외버스를 타고 부여..

경주 남산 (8) 용장사지 삼층석탑, 마애여래좌상, 석조여래좌상

금오산 아래서부터는 큰길을 따라서 편안히 걷는다. 삼화령으로 접어드는 곳에서 용장사터로 내려서는 샛길이 나타난다. 지금은 사라지고 절터만 남은 용장사는 매월당 김시습이 머물면서 를 썼던 곳이다. 용장사터에는 보물급 문화재가 셋이나 기다리고 있다. 삼층석탑과 삼륜대좌불(석조여래좌상), 마애여래좌상이 그것이다. 안내도를 보니 용장사터까지는 약 400m쯤 가파른 능선을 따라 내려가야 한다. 얼마쯤 내려선 곳에는 탑의 일부를 구성했던 것으로 보이는 석물이 방치되어 있다. 그 앞 낭떠러지로 이어지는 너럭바위에는 등산객들이 앉아서 도시락 점심을 먹고 있다. 벌써 점심시간이 되어 배는 슬슬 고파지는데 점심을 따로 준비해 오지 못한 것이 아쉬워진다. 신선암 마애불과 칠불암 마애불상군까지는 아직 가야할 길이 좀 많은가...

폐사지 여행 (3) 원주 거돈사지 삼층석탑, 원공국사승묘탑과 탑비

청룡사에서 되돌아나와 남한강길을 따라 달리다 원주 부론으로 들어선다. 부론에는 거대한 폐사지가 둘이나 있으니 바로 거돈사와 법천사(法泉寺)이다. 우리는 먼저 거돈사로 향한다. 사적 168호인 거돈사지(居頓寺址)를 찾아 도착한 현계산(賢溪山)이라는 산기슭 작은 골짜기, 절터 앞 도로에서 내리면 가파른 언덕이 시야를 가로막고 선다. 언덕에 난 계단을 올라서자 볕바른 산언덕을 끼고 넓은 절터가 아늑하게 펼쳐진다. 20여 년 전까지만 해도 민가가 들어서 있었던 절터는 몇 년 간에 걸친 발굴 조사와 정비 과정을 통하여 유적지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거돈사(居頓寺)는 신라 후기인 9세기경에 창건된 절이다. 고려초기에 확장되고 중창되면서 큰절이 되었으며 조선 전기까지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고 하는데, 임진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