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산하와 문화재

국립중앙박물관 야외전시장, 석탑과 쌍사자석등 기타 석조유물들

모산재 2012. 2. 29. 12:40

 

국립중앙박물관에는 전시관 건물 앞뜰에 일렬로 전시된 사리탑과 석등 외에도 동편에 아늑하게 조성된 정원 곳곳에 배치해 놓은 석탑과 장명등, 석불, 문인석, 장명등 등 여러 가지 석조유물이 있다. 

 

옛 보신각 동종 건물 뒤편 동산길로 들어서면 차례대로 감상할 수 있다.

 

국보로 지정된 통일신라와 고려시대의 탑 2기, 쌍사자가 등으로 받치고 있는 고달사지 석등 등이 특히 눈여겨 볼 만한 문화재이다.

 

 

 

 

■ 개성 남계원칠층석탑 국보 제100호

 

 

개성 부근의 남계원터에 남아 있던 탑으로, 예전에는 이 터가 개국사(開國寺)의 옛터로 알려져 개국사탑으로 불려져 왔으나, 나중에 남계원의 터임이 밝혀져 탑의 이름도 남계원칠층석탑으로 고쳐지게 되었다.

 

1915년에 탑의 기단부를 제외한 탑신부만 경복궁으로 이전하였다. 이후 원 위치에 대한 조사 결과 2층으로 구성된 기단이 출토되어 추가 이전해 석탑 옆에 놓았다가 다시 복원해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옮겨 세워져 있다.

 

 

 

 

 

 

 

 

■ 김천 갈항사 동서 삼층석탑 국보 제99호

 

 

김천시 남면 오봉동 갈항사 터에 동·서로 세워져 있던 두 탑으로, 일제시대에 일본으로 반출될 위기에 처하자 1916년 경복궁으로 옮겨지고,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옮겨 놓았다.

 

 

 

 

 

 

 

 

■ 홍제동 오층석탑 보물 제166호

 

 

서울 홍제동 사현사의 옛터에 있던 탑으로, 시가지 확장을 하면서 1970년 경복궁으로 옮겨 왔다가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옮겨 놓았다.

 

 

 

 

원래 기단은 자연석으로 하였기 때문에 현재 기단석이 없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한 돌로 되어있다. 1층 몸돌에는 아무 장식이 없고, 2층 이상은 기둥모양을 새겨 한 면을 둘로 나누고 그곳에 문짝으로 보이는 네모난 액자형을 표시하였다. 각 층의 몸돌은 전체적으로 위가 좁고 아래는 넓어 목조건축을 모방하려 한 의도가 엿보인다. 지붕돌은 넓고 얇은 편이나 육중해 보이고, 두꺼워 보이는 처마는 수평으로 펼쳐지다가 양끝으로 치켜오르면서 더욱 두꺼워졌다.

현재 기단부가 없어 안정감이 없어 보이나, 전체적으로 중후하면서 경쾌함과 안정성을 겸하고 있다. 안성 칠장사 혜소국사비(보물 제488호)의 비문에는 이 절이 고려 정종 12년(1045)에 창건된 것으로 되어 있어서, 이 탑도 절을 창건할 당시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 고달사지 쌍사자 석등 보물 제282호

 

 

고달사터에 쓰러져 있었던 것을 1959년 경복궁으로 옮겨 왔으며,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다. 높이는 2.43m이며 불을 밝히는 화사석(火舍石)까지만 남아 있었으나, 2000년의 발굴조사에서 지붕돌이 출토되어 복원하여 놓았다.

 

 

 

 

 

 

 

 

■ 원주 천수사 오층석탑, 천수사 삼층석탑  미지정문화재

 

 

 

 

 

 

 

 

 

 

■ 영전사 보제존자 사리탑 보물 제358호

 

 

보제존자 나옹화상의 묘탑으로 일반적인 불탑 모양을 가진 사리탑이란 점이 특이하다.

 

 

 

 

 

 

 

 

■ 이천 안흥사 오층석탑 미지정문화재

 

 

 

 

 

 

 

 

■ 석불입상 미지정문화재

 

 

고려시대의 석불입상. 출처가 밝혀져 있지 않다.

 

 

 

 

 

 

 

■ 파주 태실석함 미지정문화재

 

 

 

 

 

 

 

 

■ 고양 온녕군 석곽 미지정문화재

 

 

태종의 일곱째 아들이자  세종의 이복 아우인 이정(李裎)의 묘에서 나온 석곽이다. 온영군은 슬하에 자식이 없어 동생 근녕군(謹寧君)의 둘째 아들 우산군(牛山君)을 양자로 삼아 후사를 이었다.

 

 

 

 

 

 

 

 

■ 문인석

 

 

석인의 배치는 묘 입구 전면에 석사자(石獅子) 좌우 1쌍, 문석인 좌우 1쌍, 무석인 좌우 1쌍, 다음에 팔각석주(八角石柱)를 세운다.

 

 

 

 

 

 

신라 때부터 조선시대까지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형태가 많이 변했으나, 대체적으로 문석인의 형상은 포(袍)를 입고, 머리에는 복두(幞頭)를 쓰며, 손에는 홀(笏)을 든 공복(公服) 차림이다. 얼굴은 둥글지만 상하로 약간 긴 달걀형이고, 눈은 이른바 행인형(杏仁形)이며, 눈끝은 약간 위로 올라갔다. 큼직한 코 밑에 있는 입술은 가늘고, 힘있게 다문 입 양끝은 아래를 향한다.

 

코 밑과 턱에 긴 수염을 선각(線刻)으로 나타냈고 턱의 수염은 턱밑으로 뻗어 홀 뒤에 숨었다. 관(冠)의 하부에서 턱 밑까지의 길이와 그 밑 신장의 비율은 1:5~1:3의 변화를 보이며, 이러한 문인석은 특히 신라왕릉과 조선 왕릉에서 많이 볼 수 있다.

 

 

 

 

■ 석양(石羊)

 

 

 

 

석양은 석호, 문인석, 무인석과 함께 분묘 주위에 배치되는 석물이다. 우리 나라에서는 8세기 중엽에 당의 영향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하였다. 주로 왕릉이나 귀족들의 무덤에서 석양은 석호(石虎)와 함께 봉분 주위에 배치되며 문인석과 무인석은 봉분 앞쪽에 세워지게 된다.

 

 

 

 

■ 장명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