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산하와 문화재

영주 부석사 (2) 최고의 건축 무량수전, 선묘와 의상의 사랑으로 열린 극락세계

모산재 2012. 2. 1. 22:37

 

때로는 성벽처럼 위엄으로 마주치고 , 때로는 고향집 축담처럼 다정하게 다가서는 9단 대석단의 돌계단을 하나하나 오르다 안양루 누각의 마루 위로 고개를 내미는 순간, 

 

환한 빛 속에 9품왕생을 기원하는 듯한 석등 하나가 눈 앞에 다가서고 극락세계 무량수전이 마침내 모습을 드러내었습니다.

 

 

 

 

 

사바세계에서 천상의 극락세계로 들어서는 문은 이렇게 좁고 작았습니다.

 

 

 

 

 

석등 하나만 앞에 두고 시야를 꽉 채우는 무량수전(無量壽殿)(국보 제18호)

 

팔작지붕의 기와선은 물흐르듯 흘러내리다 금새 멈추어버린 듯 편안하고, 그 아래 여섯 개의 배흘림 기둥 이 만든 다섯 개의 공간은 세상 모든 것을 다 품어 줄 듯 너그럽고 아늑하기만 합니다. 이보다 더 소박할 수 없는 격자 창살문은 또 어떤가요...

 

 

 

 

 

천상의 극락세계가 이렇게 편안하게 표현된 사원이 또 있을까 싶습니다.

 

동남아의 불교사원이나 인도의 힌두교 사원, 그리고 터키의 이슬람사원을 돌아보면서 그 웅장함과 화려함에 찬탄을 금하지 못하면서도 불편함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이유를 바로 무량수전이 보여 주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이렇게 아늑한 천상의 세계는 태백산과 소백산을 대가람의 정원으로 끌어들임으로써 비로소 이룩된 것입니다. 여기서 또 최순우 선생의 글을 다시 읽어보고 싶어집니다.

 

무량수전, 안양문, 조사당, 응향각들이 마치 그리움에 지친 듯 해쓱한 얼굴로 나를 반기고, 호젓하고도 스산스러운 희한한 아름다움은 말로 표현하기가 어렵다. 나는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사무치는 고마움으로 이 아름다움의 뜻을 몇 번이고 자문자답했다.

무량수전은 고려 중기의 건축이지만 우리 민족이 보존해 온 목조 건축 중에서는 가장 아름답고 오래된 건물임이 틀림없다. 기둥 높이와 굵기, 사뿐히 고개를 든 지붕 추녀의 곡선과 그 기둥이 주는 조화, 간결하면서도 역학적이며 기능에 충실한 주심포의 아름다움, 이것은 꼭 갖출 것만을 갖춘 필요미이며 문 창살 하나 문지방 하나에도 나타나 있는 비례의 상쾌함이 이를 데가 없다. 멀찍이서 바라봐도 가까이서 쓰다듬어 봐도 무량수전은 의젓하고도 너그러운 자태이며 근시안적인 신경질이나 거드름이 없다. 무량수전이 지니고 있는 이러한 지체야말로 석굴암 건축이나 불국사 돌계단의 구조와 함께 우리 건축이 지니는 참 멋, 즉 조상들의 안목과 미덕이 어떠하다는 실증을 보여 주는 본보기라 할 수밖에 없다.

무량수전 앞 안양루에 올라앉아 먼 산을 바라보면 산 뒤에 또 산, 그 뒤에 또 산마루, 눈길이 가는 데까지 그림보다 더 곱게 겹쳐진 능선들이 모두 이 무량수전을 향해 마련된 듯싶어진다. 이 대자연 속에 이렇게 아늑하고도 눈 맛이 시원한 시야를 터줄 줄 아는 한국인, 높지도 얕지도 않은 이 자리를 점지해서 자연의 아름다움을 한층 그윽하게 빛내 주고 부처님의 믿음을 더욱 숭엄한 아름다움으로 이끌어 줄 수 있었던 뛰어난 안목의 소유자, 그 한국인, 지금 우리 머리 속에 빙빙 도는 그 큰 이름은 부석사의 창건주 의상대사이다.

 

 

 

무량수전은 안동 봉정사 극락전(국보 제15호)에 이어 두번째로 오래된 목조건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1916년 해체 공사 때 발견된 서북쪽 귀공포의 묵서에는 공민왕 7년(1358) 왜구에 의하여 건물이 불타서 우왕 2년 (1376)에 원융 국사가 중수하였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건축 양식이 고려 후기 건물과 많은 차이를 보이므로 원래 건물은 이보다 약 100년 정도 앞선 13세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무량수전 현판은 공민왕이 쓴 것이라 합니다. 홍건적의 난(공민왕 10년, 1361년)으로 안동으로 피난 와 있던 시기에 쓴 것인데,  이 시기에 공민왕은 안동웅부와 영천의 제민루 현판도 썼다고 합니다.

 

 

 

 

 

현판 뒤에는 공민왕이 썼다는 사연이 적혀 있다고 합니다. 전체적으로 안진경체에 가까운데, 힘차지 않고 유려한 것이 송설체 기운이 깃들어 있다고 평가됩니다.

 

 

무량수전은 극락(서방정토)을 지키는 주불인 아미타여래를 모신 전각입니다. 아미타여래는 끝없는 지혜와 무한한 생명을 지녔으므로 무량수불(無量壽佛)로도 불립니다.

 

 

 

 

 

 

그러면 전각 안의 아미타여래, 무량수불을 만나보실까요.

 

내부 사진 촬영을 할 수 없어 문화재청 사진 자료를 대신하고자 합니다.

 

아미타부처님의 정식 이름은 영주 부석사 소조여래좌상(국보 제45호)입니다. 특이하게도 이 부처님은 협시불 없이 전각의 서쪽에 앉아서 동쪽을 향해 앉아 있습니다. 열주가 만든 긴 회랑이 장엄한 공간감을 부여하며 부처님의 모습은 더욱 신비로워 보입니다.

 

사람들은 동쪽을 보고 있는 유일한 부처라고 이야기합니다만, 영광 불갑사의 부처님도 법당 마당이 아닌 동쪽을 보고 앉아 계시니 사실이 아닙니다.

 

 

 

 

 

이 부처님은 높이 2.78m로 나무 골격에 진흙을 붙여 만든 소조불상 가운데 가장 크고 오래된 작품입니다. 풍만한 얼굴에 근엄한 모습입니다.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왼쪽 어깨에서 흘러내려 무릎까지 감사고 있는 옷에는 나란한 옷주름이 촘촘하게 표현되어 있는데,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국보 제63호)에서도 보이는 양식으로 고려 초기 불상들과 같은 계열로 보입니다.

손모양은 오른손 손끝이 땅을 향하고 있는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인데, 이는 대개 석가모니불이 취하는 수인입니다. 하지만 이곳이 극락전이니 이 부처님이 석가모니불일 수는 없는 일. 원융국사탑비 비문에도 아미타불을 만들어 모셨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찌된 걸까? 조선시대에 불상의 파손된 부분을 고치면서 바뀐 것이 아닐까 추정하고 있습니다.

 

 

다시 무량수전의 한 바퀴 돌며 간결하면서도 소박한 건물의 아름다움을 감상해 봅니다.

 

 

▼ 무량수전의 귀포와 활주

 

 

 

 

 

여기서 고려시대의 건축 법식을 거의 완벽하게 보여 주는 무량수전을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 유의하여 볼 점을 정리해 보기로 합니다.

 

 

무량수전은 안허리곡과 안쏠림이 공포와 벽면에까지 적용되어 마치 평면이 오목거울처럼 휘어 있고, 기둥의 배흘림은 강릉 객사문 다음으로 심합니다. 이들은 모두 착시에 의한 왜곡 현상을 막는 동시에 가장 효율적인 구조를 만들기 위하여 고안된 고도의 기법들입니다.

 

 

    ▶ 안허리곡(曲) : 건물 중앙보다 귀부분의 처마 끝이 더 튀어나오도록 처리한 것.
    ▶ 안쏠림 : 기둥 위쪽을 내부로 경사지게 세운 것.
    ▶ 귀솟음 : 건물 귀부분의 기둥 높이를 중앙보다 높게 처리하는 것인데 수평 부재의 끝부분이 아래로 처지지 않게 함
    ▶ 기둥의 배흘림 : 기둥 머리가 넓어 보이는 착시 현상을 막기 위한 것.

 

 

※ 무량수전 건축 명칭도

 

 

▲ 출처 : <답사여행의 길잡이10, 경북 북부>. 돌베개

 

 

기둥 위에만 배치된 건실한 주심포계 공포 양식, 대들보 위쪽으로는 천장을 막지 않아 노출시킨 지붕 가구의 조화 등도 눈여겨볼 만한 점들입니다.

 

 

이제 법당 마당의 유일한 건축물인 석등으로 발길을 옮깁니다.

 

연꽃 무늬가 새겨진 배례석을 앞에 둔 이 석등의 정식 이름은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앞 석등(국보 제17호)입니다.

 

 

 

 

 

무량수전 앞에 석탑이 아니라 석등을 세운 뜻은 무엇일까요? 석등은 부처의 광명을 상징하는 것으로 광명등이라고도 합니다. 열반에 들지 않는 아미타여래의 극락정토에 사리묘를 세우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탑 대신 석등을 세움으로써 광명극락의 세계를 밝히고자 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이 석등은 통일신라시대를 대표하는 가장 아름다운 석등으로, 비례의 조화가 아름답고, 화려하면서도 단아한 멋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 석등이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불을 밝히는 화사석 4면에 정교하게 새겨진 보살상 때문입니다.

 

 

 

 

 

↓화사석 

 

 

 

 

↓ 북서쪽 보살상 

 

 

 

 

 

석등을 살펴본 다음에야 다시 안양문 쪽을 바라봅니다.

 

아래쪽에서 볼 때는 '안양문(안양문)'이라는 현판이 걸렸던 건물은 법당에서는 '안양루(安養樓)'라는 현판으로 바뀌어 걸리어 있습니다.

 

범종루가 그러했듯 안양루도 아래층은 법당으로 오르기 위한 문의 구실을 하고 위층은 법당 마당과 연장되는 건축 공간으로 제 기능을 다하도록 설계된 것임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됩니다.

 

 

 

  

 

이제 걸음을 무량수전 서쪽 '부석(浮石)'을 향해 옮깁니다.

 

 

 

 

 

서쪽 절마당 뒤쪽 암벽 아래에 놓여 있는 저 바위가 바로 '부석(浮石)'입니다.

 

 

 

 

 

 

'부석'은 의상대사와 선묘 낭자의 사랑이 얽혀 부석사를 창건하게 된 전설이 서려 있는 바위입니다. 전설은 다음과 같습니다.

 

신라 문무왕 원년(661)에 의상이 화엄학을 공부하기 위해 당나라에 갔을 때 의상스님을 연모한 '선묘'라는 낭자가 있었다. 의상스님이 장안 종남산에서 지엄 문하에 10년 수학을 하던 중 당고종이 군사를 일으켜 신라를 친다는 소식을 듣고 671년 귀국 뱃길에 올랐고, 뒤늦게 소식을 들은 선묘는 의상이 사라진 바다에 몸을 던져 용으로 변신하여 의상스님이 탄 배를 호위하여 무사히 귀국하게 하였다.

그후 의상스님이 화엄을 펴기 위하여 왕명으로 이곳 봉황산 기슭에 절을 지으려고 할 때 이곳에 살고 있던 많은 도둑들(또는 이교도들)이 방해하자 선묘 신룡이 나타나 조화를 부려 바위를 공중으로 들어올려 물리쳤는데, 그 바위를 '부석'이라 불렀다. 그 뒤 선묘 신룡은 자신을 석룡으로 변하여 무량수전 안의 아미타상 밑에서 부터 앞마당의 석등까지 몸을 묻고 전법의 등불이 사라져 없어질 때까지 수호하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의상은 절 이름을 부석사로 짓고 40일 동안의 법회를 열고 설법함으로써 이 땅에 화엄종을 펼치게 되었다.

 

 

 

이중환의 <택지리>는 "바위 사이에 약간의 틈이 있어 실을 넣어 당기면 걸림없이 드나들어 뜬돌임을 알 수 있다."라 적고 있는데 사실 여부가 중요한 일이 아닐 것입니다. 

 

 

 

 

 

 

부석으로 도둑을 물리치고 부석사를 있게 한 선묘 낭자를 모시기 위한 선묘각은 전각은 무량수전 동쪽 뒤 언덕 위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1975년에 그린 것으로 전해지는 선묘의 영정 하나 걸려 있는 아주 작은 전각입니다.

 

 

 

 

 

선묘각에서 삼층석탑 쪽으로 발길을 옮기며 무량수전을 내려다봅니다. 보고 또 보아도 아름답고 편안한 집...

 

 

 

 

 

 

그리고 동쪽 언덕 위에서 삼층석탑을 만납니다.

 

영주부석사 삼층석탑(보물 제249호)이라는 이름의 이 탑은 무량수전의 아미타여래가 지켜보는 언덕 위에 서 있습니다. 탑 앞에는 석등의 일부 부재로 보이는 석재가 놓여 있습니다.

 

 

 

 

 

문무왕 16년(676년) 부석사를 창건할 당시에 만들어진 것으로, 지붕돌 밑면의 층급받침이 5단으로 통일신라의 전형적인 양식을 따르고 있습니다. 이층기단인데 아래층 기단의 너비가 매우 넓고, 1층 몸돌 또한 높이에 비해 너비가 넓어서 장중해 보입니다.

 

 

 

삼층석탑을 지나면 이제 무량수전 뒤편 숲속의 조사당과 자인당 등의 부속전각으로 오르게 됩니다.

숲으로 난 오솔길로 접어들기 전 뒤돌아서서 지나쳐온 전각들을 내려다봅니다. 안양루에서 범종루...위계를 이루며 서 있는 전각들을 내려다보다 시선은 이내 먼 산봉우리에 가서 머물게 됩니다. 어느 절에서 이런 풍경을 볼 수 있을까요.

 

 

 

 

 

오솔길로 들어서며 다시 돌아보니 무량수전의 극락세계가 한눈에 들어옵니다.

 

 

 

 

 

멀리 흐릿한 내에 잠긴 사바세계가 티끌처럼 보입니다.

 

이제 가파른 오솔길을 따라 조사당으로 오르려고 합니다. 무량수전과 함께 국보로 지정되어 있는 오래된 목조건축물입니다.

 

<계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