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산하와 문화재

폐사지 여행 (3) 원주 거돈사지 삼층석탑, 원공국사승묘탑과 탑비

모산재 2009. 12. 6. 23:44

 

청룡사에서 되돌아나와 남한강길을 따라 달리다 원주 부론으로 들어선다. 부론에는 거대한 폐사지가 둘이나 있으니 바로 거돈사와 법천사(法泉寺)이다. 우리는 먼저 거돈사로 향한다.

 

 

 

 

사적 168호인 거돈사지(居頓寺址)를 찾아 도착한 현계산(賢溪山)이라는 산기슭 작은 골짜기, 절터 앞 도로에서 내리면 가파른 언덕이 시야를 가로막고 선다. 언덕에 난 계단을 올라서자 볕바른 산언덕을 끼고 넓은 절터가 아늑하게 펼쳐진다. 20여 년 전까지만 해도 민가가 들어서 있었던 절터는 몇 년 간에 걸친 발굴 조사와 정비 과정을 통하여 유적지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거돈사(居頓寺)는 신라 후기인 9세기경에 창건된 절이다. 고려초기에 확장되고 중창되면서 큰절이 되었으며 조선 전기까지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고 하는데, 임진왜란 때 불타 사라진 것으로 전해진다.

 

거돈사는 고려 초기 불교계를 주도해 나가던 법안종의 중심사찰로 크게 중창된 것으로 보이나 고려 중기 대각국사 의천이 개창한 천태종이 널리 유행하면서 천태종 사찰로 흡수되었다고 한다.

 

 

절터에는 중문터, 탑, 금당터, 강당터, 승방터, 회랑 등이 확인되었는데, 금당의 규모는 앞면 5칸 옆면 3칸으로 2층 건물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 절터 뒷쪽 언덕에서 내려다 본 탑과 금당터

 

 

 

 

 

거돈사의 가람 배치는 당시에는 보기 드문 신라의 전형적인 일탑식으로서, 남북을 중심축으로 하여 가운데 중문지가 있고, 중문지 앞에는 축대가 있다. 중문지 좌우에 회랑지가 동서로 나아가다가 북으로 꺾여 강당지 기단과 연결된다. 중문지 북쪽에는 삼층석탑이 있다. 금당지 뒤에는 강당지가 있으며, 또 그 뒤에는 승방지가 있다.

 

탑 북쪽에 있는 금당지(金堂地)는 고려 초에 중창된 것으로서 현재 전면 6줄 측면 4줄의 주초석이 남아 있어 금당의 규모가 전면 5칸 측면 3칸인 건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금당지 중앙에는 높이 약 2미터의 화강석 원형 불대좌가 놓여 있다. 이러한 구조와 크기로 미루어볼 때 금당은 외관 2층이며 내부가 통층으로 된 건물이었으며, 본존상은 대좌석 윗쪽에 철이나 청동 녹의 흔적이 없는 것으로 미루어 등신불보다 큰 석조좌상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 거돈사지 삼층석탑(보물 제750호)

 

 

거돈사 옛 절터의 금당터 앞에 세워져 있는 높이 5.3m의 탑으로, 2중기단 위로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 탑의 조성 연대는 2단을 이루는 기단구조와 기둥 모양의 새김, 5단의 지붕돌 받침 등의 수법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 3층 정형탑 양식으로 9세기 작품으로 추정된다.

 

 

 

 

아래층 기단은 네 면의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을 새긴 형태로, 기단을 이루는 밑돌·가운데돌·맨윗돌이 각각 4매로 이루어진 특징이 보인다. 위층 기단은 남·북쪽에 무늬없는 긴 돌만 세우고 동·서면에는 가운데에 기둥 모양을 새긴 돌을 끼워 맞춘 방식이다. 즉, 남·북쪽에서 보았을 때 동·서면에 세운 석재의 두께가 자연스럽게 기둥 모양으로 보이도록 한 것이다.

 

탑신은 각 층의 몸돌과 지붕돌을 각각 하나의 돌로 구성하였다. 5단의 밑받침(층급받침)을 둔 지붕돌은 두꺼우면서 경사면의 네 모서리가 곡선을 이루고 있다. 처마는 직선을 이루는데 끝부분에서의 들림이 경쾌하여 통일신라 양식임을 알 수 있다.

 

탑의 꼭대기 상륜부에는 머리장식을 받치는 네모난 받침돌(노반)만 남아 있고, 그 위에 놓여진 연꽃 모양의 보주(寶珠)는 최근에 얹어 놓은 것이다.

 

 

 

 

 

 

 

 

탑 앞에 있는 배례석(拜禮石:탑 앞에 놓여 예불을 드릴 때 향을 피우던 곳)은 예전 절 터에 있는 민가 우물가에 옮겨져 있던 것을 되옮겨 놓았다.

 

 

 

 

 

↓ 금당터와 3층석탑 전경

 

 

 

 

 

 

 

↓ 절터의 서쪽에 모아둔 발굴 부재들 

 

 

 

 

 

 

 

↓ 금당터에서 바라본 절 뒷편 원공국사승묘탑 방향

 

 

 

 

 

원공국사승묘탑이 있는 산언덕으로 오르는 길, 볕바른 언덕배기에는 광대나물 꽃이 찬바람 속에 붉은 꽃을 앙증스럽게 피웠다.

 

 

 

 

 

※ 원공국사 지종(圓空國師 智宗, 930∼1018)

17세에 계를 받고 고려 광종 초기 승과에 급제한 뒤, 중국에 유학하여 법안종(法眼宗)을 배웠다. 당시 남중국에서 크게 유행하던 법안종은 선종 계통이면서도 교선일치를 표방하였다. 이러한 교리는 당시 전제왕권 수립을 위해 적극적으로 개혁정치를 펴던 광종의 관심을 끌게 되었으며, 지종은 광종의 비호를 받으면서 법안종 세력을 고려 불교계에 크게 떨치게 되었다. 그러나 광종이 사망하자 그의 급진적인 개혁정치가 좌절되면서 법안종 세력은 급속도로 약화되었고, 지종은 1018년 89세로 거돈사에서 입적하였다.

 

 

 

 

■ 원공국사승묘탑(圓空國師勝妙塔, 보물 제190호) 재현탑

 

 

원공국사승묘탑은 고려 전기의 승려 원공국사의 사리탑으로, 원래 거돈사터에 남아 있던 것을 일제시대에 일본인이 무단절취하여 집에 소장되고 있던 것을 1948년 경복궁으로 옮겨 보존해오다가 2005년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으로 다시 옮겼다.

 

 

 

 

사리탑을 잃고 지대석만 남아 있던 자리에 원주시에서 2006년 12월~2007년 11월에 2억원의 경비를 들여 모조 사리탑으로 재현(중요무형문화재 120호 석장 이재순이 제작)하여 조성하였다.

 

탑은 재현하였지만 지대석은 옛모습 그대로이어서 묘한 부조화가 느껴진다. 세월이 더 흘러서 사리탑에 이끼가 끼면 자연스러워질는지….

 

 

 

 

 

국립중앙박물관 뜰로 옮겨진 원공국사 승묘탑은 지대석을 옮겨오지 못해 바닥돌이 없이 바로 기단(基壇)이 시작되고 있어 마치 맨발로 서 있는 듯 안쓰럽게 느껴진다.

 

 

 

8각을 이루고 있는 탑신(塔身)의 몸돌은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의 조각을 두었는데 여덟 곳의 기둥마다 꽃무늬가 장식되어 있다.  지붕돌 역시 8각으로 몸돌과 닿는 곳에 4단의 받침을 표현하고, 그 위에 서까래를 모방하여 새겼다. 처마는 얇고, 여덟 귀퉁이에는 치켜올림이 뚜렷하며, 낙수면에 새겨진 기와골 조각은 처마에 이르러 막새기와의 모양까지 표현해 놓아 목조 건축의 지붕 모습을 충실히 본떴다. 꼭대기에는 8각형의 보개(寶蓋:지붕모양의 장식)가 얹혀 있다.

탑비의 건립은 ‘태평을축추칠월(太平乙丑秋七月)’로 되어 있는데, 이는 고려 현종 16년(1025)에 해당하므로 이 사리탑도 그 때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 전기의 대표적인 8각 사리탑으로, 모양이 단정하고 아담한 통일신라 부도의 양식을 이어받아 조형의 비례가 좋고 중후한 품격을 풍기며, 전체에 흐르는 조각이 장엄하여 한층 화려하게 보인다.

 

 

각 면에는 앞뒤 양면에 문 모양과 자물쇠 모양을, 좌우 양 면에는 창문 모양을, 그리고 남은 네 면에는 4천왕입상(四天王立像)을 새겼다.

 

 

 

 

 

세 개의 받침돌로 이루어진 기단은 각 부분이 8각으로, 아래받침돌은 각 면마다 안상(眼象)을 새긴 후, 그 안에 꽃 모양의 무늬를 두었다. 가운데받침돌은 아래·위에 테를 돌리고 안상 안에 8부신중(八部神衆)을 새겼다. 윗받침돌에는 활짝 핀 연꽃잎을 2중으로 돌려 새겼다.

 

 

 

 

 

↓ 가운데받침돌 안에 새겨진 8부신중(八部神衆)

 

 

 

 

 

 

※ 국립중앙박물관의 원공국사탑 => http://blog.daum.net/kheenn/15855074

 

 

 

 

■ 거돈사 원공국사 승묘탑비(圓空國師勝妙塔碑, 보물 제78호)

 

 

절터 뒤 언덕 위에 있는 원공국사 승묘탑(보물 제190호)과는 멀리 떨어져 있어 의아하다. 사리탑과 탑비가 거리를 두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고려 현종 16년(1025)에 세워진 이 탑비에는 고려의 고승인 원공국사의 생애와 행적, 그의 덕을 기리는 송덕문이 담겨있다고 한다.

 

이 비에는 머릿돌을 옮기려 할 때 수십 명의 장정들이 매달려도 끄떡않던 돌을 농가에서 빌려온 소 한 마리가 옮겼다는 설화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이 비는 높이가 245cm, 너비 126cm로 고려초 조각예술의 빼어난 조형미를 보여주고 있다. 비는 거북받침돌(귀부) 위로 비몸을 세우고 머릿돌(이수)을 얹은 모습으로, 비몸에 비해 머릿돌이 웅장하다 할 정도로 큰 것이 특징적이다.

 

비석의 위와 아래에는 인동무늬와 당초무늬를 넣었다.

 

 

 

 

머릿돌(이수) 전면에는 구름 위에서 두 마리의 용이 불꽃에 싸인 여의주(寶珠)를 다투는 모습이 대칭을 이루며 섬세하게 새겨져 있는데….

 

 

 

 

옆과 뒤쪽에서 보면 또다른 용들이 요동치는 모습이 새겨져 있다.

 

 

 

 

탑신 가까이에서 볼 때는 두 마리의 용이 하나의 여의주를 놓고 다투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뒤로 물러서면서 그 위로 또 두 마리의 용이 또 하나의 여의주를 놓고 다투는 모습이 나타난다.

 

 

 

 

거북의 머리는 괴수처럼 험한 인상을 한 용의 머리 모양으로 양쪽 귀 뒤의 바퀴가 한눈에 공룡의 귀처럼 커다란데, 물고기 지느러미처럼 표현되어 있다.

 

 

 

 

앞에서 보면 거북은 입을 앙다문 채 전면을 응시하고 있어 근엄한 듯 보이지만, 입선에 변화를 주고 콧구멍이 굽게 패여 있고 눈이 도드라져 있어 부드러우면서도 다소 익살스런 느낌을 주기도 한다.

 

 

 

 

비문의 글은 해동공자로 불리던 대학자 최충이 지었으며, 글씨는 김거웅이 썼는데 그의 행적은 그다지 알려진 것이 없다. 엄격하고 단정한 해서체의 글씨는 구양순의 서법을 이어받은 것인데 고려시대의 금석문 중에서도 매우 뛰어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비문에 따르면, 원공국사는 8세에 출가하여 955년(광종6년)에 오월국으로 유학한 뒤 그곳에서 불교를 강의하였으며 귀국한 뒤에는 역대 왕들이 그를 숭상하여 대선사, 왕사로 모셨다고 한다.

 

 

 

 

 

등에 새긴 무늬(귀갑문)는 정육각형에 가까운데, 겹으로 새겨진 정육각형 안에는 만자(卍字)와 연꽃무늬가 교대로 돋을새김되었다.

 

 

 

 

빗돌을 받치기 위해 빗돌받침을 만들었으며, 그 안에는 안상(眼象)을 새겨 문양을 넣었다.

 

 

 

 

네 개의 발가락과 발톱은 극히 사실적으로 표현되었으나 훼손되어 있다.

 

 

 

 

 

 

거돈사지를 돌아보고 다시 법천사지로 향할 때에 해는 중천을 지나 서천으로 기울어가고 있다. 바람은 더욱 차가워지고 마음은 으슬으슬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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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공국사 지종(圓空國師 智宗, 930∼1018)

 

 

고려 초기의 천태학승(天台學僧)으로, 속성(俗姓)은 전주 이씨, 자는 신칙(神則)이다.

8세에 사나사(舍那寺)에 머물고 있던 인도승 홍범삼장(弘梵三藏)에게 출가하였다. 홍범삼장이 인도로 돌아가자 광화사(廣化寺) 경철(景哲)에게 수업하여 946년(정종 1) 영통사(靈通寺) 관단(官檀)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953년(광종 4) 희양산(曦陽山)의 형초선사(逈超禪師) 밑에서 수행하였고, 954년 승과에 합격하였다.

959년 광종의 환대를 받으며 구법을 위해 오월국(吳越國)으로 유학하여 영명사(永明寺) 연수(延壽)에게 법안종(法眼宗)을 배웠고, 961년 국청사(國淸寺) 정광(淨光)에게 '대정혜론(大定慧論)'을 배워 천태교를 전수받았다. 968년 전교원(傳敎院)에서 '대정혜론'과 '법화경'을 강의하여 명성을 떨쳤다.

970년(광종 21) 10여 년만에 귀국하여 광종의 환영을 받아 대사가 되었고, 금광선원(金光禪院)에 머물렀다. 975년(광종 26)에 중대사(重大師)가 되었고, 경종(975∼981)이 즉위함에 삼중대사(三重大師)가 되었다. 990∼994년 사이에 적석사(積石寺)로 옮겨 거주하면서 호를 혜월(慧月)이라 하였고, 성종의 부름으로 5년 동안 궁중에서 설법하였다. 목종의 호의가 깊어 선사가 되었고, 불은사(佛恩寺)와 호국외제석원(護國外帝釋院)에서 머물렀다. 현종이 즉위하여 대선사가 되어 광명사(廣明寺)에 주석하였고, 법호를 적연(寂然)이라 하였다.

1012년(현종 3) 왕사가 되었으며, 3년 뒤에는 보화(普化)라는 법호를 받았다. 1016년 병을 얻어 1018년(현종 9) 원주 현계산(玄溪山) 거돈사(居頓寺)로 하산하여 입적하였으니 세수(歲壽)는 89세이다. 승지(勝地)를 잡아 승묘탑(勝妙塔)을 세우고 거돈사 동남쪽에 장사지냈다.

원공국사는 법안종(法眼宗) 승려로, 법안종은 선종의 일종이나 천태종·화엄종·법상종 사상을 융합하고 나아가 교종과 선종을 일치시키려는 경향이 있다. 법안종은 광종의 호족세력 억압과 함께 왕권강화의 방편으로 중요시되고 법안종 승려들도 광종의 호의를 받았는데, 원공국사도 이러한 면에서 광종의 환대를 받았던 것이다.

한편 원공국사는 오월국 국청사에서 천태종의 교의도 배웠고 자신이 국청사에서 대정혜론과 법화경을 강의한 것으로 보아 천태종에 대해서도 많은 지식이 있었으며, 대각국사 의천이 고려 천태종을 성립시킬 때 흡수되었던 것으로 보아 천태종 성립에도 지대한 역할을 하였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