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산하와 문화재

부여 (15) 아름다운 절집 만수산 무량사, 조선 최고의 건축미 극락전

모산재 2011. 12. 4. 10:12

 

무량사를 찾게 된 것은 금오산인 김시습의 흔적을 찾아보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단종 임금이 쫓겨났다는 소식에 충격을 받고 21세의 청년기에 방랑길을 떠난 김시습이 십여 년이 지난 뒤 경주 남산(금오산)에서 이 땅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를 짓고 만년에 다시 방랑하다 입적한 곳이 무량사이기 때문이다.

 

작년 경주 남산을 찾았을 때에도, 그리고 덕유산을 갔다 덕유산 백련사 일주문 옆에서 김시습의 부도로 오해되고 있는 '매월당 부도'를 만났을 때에도, 무량사를 꼭 한번 찾으리라 생각하고 있던 터였다.

 

그리고 임진왜란 중 "왜적의 재침을 막고 나라를 바로잡겠다."는 기치를 들고 홍산에서 난을 일으킨 이몽학이 승려들과 함께 난을 모의하고 군사를 조련했던 곳이 또한 무량사였다는 점도 호기심을 자극하였다.

 

 

 

시외버스를 타고 부여를 출발한 지 꼭 30분만에 외산에 도착한다. 무량사는 차령산맥이 벋어내려 부여 외산과 보령시 미산 사이에 솟아오른 만수산 남쪽 기슭에 자리잡고 있다.

 

 

 

정류장 3거리에 무량사 방향을 알리는 표지판이 보이는데 거리가 얼마인지 알 수가 없다. 동네 주민들에게 물어봐도 잘 아는 분이 없다.

 

 

 

 

 

 

무작정 걸어가는 것도 위험한 듯해서 택시를 탄다. 그런데 금방 절 입구 마을에 도착하고 기사는 내리라 한다. 오른쪽 앞으로 매표소가 보인다.

 

 

 

 

 

 

매표소에서 표를 사고 무량사 일주문으로 들어선다.

 

 

 

 

 

다소 울퉁불퉁한 두 기둥 위로 무거워 보이는 두터운 맞배지붕이 얹혔다.

 

 

'만수산무량사(萬壽山無量寺)'라는 편액이 걸려 있고, 뒤쪽에는 '광명문(光明門)'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두툼한 글씨체가 두터운 지붕의 무게에 잘 어울린다 싶다. 특이한 것은 글씨의 머리에 한반도 모양의 문양이 새겨져 있는 것이다. 

 

이 편액의 글씨는 차우(此愚) 김찬균(金瓚均, 1910~?)이란 분이 썼는데, 주자서체(朱子書體)를 즐겨 썼다는 이 분은 설악산 신흥사 사천왕문, 통영 미륵산 관음암 보광루, 여주 신륵사 심검당과 적묵당, 양산 통도사 범종루 등 전국 각지의 사찰에 글씨를 남긴 분이다. 이들 사찰 편액에도 한반도 모양의 두인(頭印)을 새기고 있는데, 문양 안에는'일체유심조(一切維心造)'라는 작은 글씨가 들어 있다.

 

 

 

 

 

전국의 절집에 많은 글씨를 남기고 있음에도 그의 행적에 대한 기록은 찾아볼 길 없고, 더구나 언제 돌아가셨는지조차도 알려져 있지 않으니 바람처럼 사라진 그의 삶이 안타깝기 그지 없다.

 

 

 

 

김시습이 입적한 곳으로 잘 알려진 무량사는 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의 말사이다. 옛 문헌에는 홍산 무량사라 기록되어 있으나 사람들은 외산 무량사라 부른다.

 

통일신라 헌강왕 때 당나라에서 귀국한 뒤 범일국사가 창건했다고 하는데, 문성왕 때 창건했다는 설도 있다. 고려 고종 때 중창된 무량사는 대웅전, 극락전, 천불전, 응진전, 명부전 등 불전과 더불어 30여동의 요사와 12개의 암자를 거느리며 그 위세를 자랑했으나 임진왜란 때 모두 불타 없어졌다. 현재의 무량사는 조선 인조 때 진묵선사에 의해 중수된 것이다.

 

 

 

길은 작은 개울을 건너 천왕문으로 이어진다. 

 

 

 

 

 

 

다리를 건너자마자 천왕문을 경계로 경내를 보호하기 위해 두른 담장이 숲 사이로 보인다.

 

바로 그 담장의 동쪽 귀퉁이 아래, 범종각이 보이는 곳에 당간지주가 서 있다.

 

 

 

 

사찰 입구에 절을 상징하는 '당(幢)'이라는 깃발을 다는 깃대를 당간이라 하는데, 당간지주는 이를 지탱해주는 돌기둥이다. 기둥 끝의 바깥쪽을 둥글게 마감하고 기둥 가장자리에 테두리 선을 돌린 정도 위에는 장식이 없는 소박한 모습이다. 통일신라시대의 양식에 따라 고려 전기에 만든 것으로 짐작된다.

 

 

 

 

 

담장을 가리고 선 숲을 살짝 돌아서 천왕문으로 이어지는 길이 기분 좋다.

 

 

 

 

 

 

이 천왕문의 편액도 어김없이 한반도 모양의 두인이 있으니 차우 김찬균 선생의 글씨다.

 

문을 통하여 찬란한 아침햇살 속에 이층 전각 극락전과 오층석탑과 석등이 일렬로 서 있는 모습이 보인다. 

 

 

 

 

 

모두 붉은 관을 쓴 이 곳의 사천왕은 찢어진 듯한 눈빛이 사납고 입술도 길게 늘여 어금니를 앙다물고 있어 험상궂은 표정이다.

 

 

다문천왕(북)과 지국천왕(동)

 

 

 

증장천왕(남)과 광목천왕(서)

 

 

 

 

천왕문을 지나자 무량사의 너른 마당과 저편에 일렬로 늘어선 석등, 석탑, 극락전의 아름다운 풍경에 절로 탄성이 터져나온다.

 

 

 

 

 

동쪽 마당에는 아름드리나무들이 군데군데 서 있어 산사의 고즈넉한 분위기를 돋운다. 

 

 

마당 한 귀퉁이 나무 그늘 아래 작은 범종각이 보인다.

 

 

 

 

나무 숲 사이로 바라보는 석탑과 극락전과 명부전

 

 

 

 

 

이층 전각 극락전의 아름다운 모습은 말을 잊게 한다.

 

일층과 이층 건물의 비례가 저보다 더 완벽할 수 없겠다 싶고, 처마선의 곡선은 엄격하지도 되바라지지도 않은, 멋들어진 모습이다. 이렇게 멋진 지붕선을 가진 절집이 또 있을까.

 

 

 

 

 

 

무량사는 극락전과 오층석탑과 석등이 일직선으로 늘어선 전형적인 일탑식 가람이다. 이렇게 일직선으로 늘어선 건축물은 모두 보물로 등록되어 있다.  

 

 

 

 

맨 앞의 무량사 석등은 보물 제233호.

전체적으로 보존 상태가 아주 양호한데, 가만 살펴보면 기둥돌은 다른 부재와는 석질이 다른 듯한데 말끔한 것이 후대에 교체된 것이 아닐까 싶다.

 

 

 

 

한눈에 날렵해 보이는 이 석등은 불을 켜는 화사석(火舍石)과 그것을 받치는 기둥돌(幹柱石)이 홀쪽해 안정감이 부족해 보이는 느낌이다. 아래 받침돌의 연꽃 조각은 뭉퉁하고 위 받침돌의 연꽃 조각은 너무 깎아낸 듯한 느낌이다. 그래서 꼭대기의 깜찍한 보주(寶珠)와 잘 생긴 지붕돌과 잘 어울리지 못한 모습이다.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 사이인 10세기 무렵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미륵전 앞에 우뚝 솟아 있는 무량사 오층석탑은 물 제185호로 지정되어 있다.

 

 

 

 

 

 

우아하면서도 장중한 느낌을 주는 이 탑은 정림사지 오층석탑과 어딘지 닮았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어떤 점이 그런가 살펴보니 역시 얇고 넓은 지붕돌. 수평을 이루는 처마가 네 귀퉁이 끝에서 가볍게 들려 있는 모습은 아주 빼닮았다 싶다. 다만 지붕돌 아래 층급받침이 있는 점이 다르다.

 

기단은 둥글게 다듬은 두툼한 석재로 받쳐져 있고 각 면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을 세웠다. 탑신은 지붕돌과 몸돌을 한 층으로 하여 5층을 이루고 있는데, 네 모서리에 기둥을 표현하였다. 백제의 옛 땅에서 이어진 제의 기법에 통일신라의 양식도 받아들여져 고려 전기에 만들어진 탑으로 추정되고 있다.

 

해체 공사를 할 때 탑신의 1층 몸돌에서 금동제 아미타여래좌상, 지장보살상, 관음보살상의 삼존상이 나왔고, 3층에서는 금동보살상, 5층에서는 사리구가 발견되기도 하였다.

 

 

 

 

 

극락전의 아름다움을 여러 각도에서 바라보려고 절 마당 사방을 얼마나 밟았는지...

 

터무니 없다 하실 분이 있겠지만, 나는 이 불전을 보는 순간 창덕궁 인정전을 떠올렸다. 규모로야 상대가 안 되지만 인정전을 쏙 빼닮은 건물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보물 제356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이 멋진 건물이 어째서 국보로 지정되지 않은 건지 문외한으로서 몹시 안타까운 심정이 될 정도로 매료되고 만다.

 

 

 

 

불전으로는 그리 흔치 않는 2층 건물.

 

이층 불전으로는 법주사 대웅전, 화엄사 각황전, 마곡사 대웅전을 들 수 있다.

 

법주사 대웅전은 처마가 일직선으로 처리되어 엄격함과 소박함이 느껴지고, 화엄사 각황전은 그 큰 규모로 해서 장중하고 엄숙함이 느껴진다. 마곡사 대웅전은 좁은 절마당 대문에 정면으로 바라보지 못해선지 뚜렷한 인상이 남아 있지 않은데, 이들 건물에 비해서 무량사 극락전은 화려함과 우아함이 단연 돋보이지 않은가. 그렇다고 격조가 뒤지지도 않는다.  

 

 

 

 

 

 

겉으로는 2층 건물이지만 내부에서는 아래 위층이 트여 있는 통층구조다. 아래층은 앞면 5칸, 옆면 4칸인데, 아래층에 세운 높은기둥이 그대로 위층의 4면 기둥이 되고 있는 짜임새다. 현재 이층 벽면은 나무판으로 되어 있지만 원래는 빛을 받아들이기 위한 창문으로 되어 있었다고 한다.

 

멋들어진 지붕선을 가진 팔작지붕, 화려한 다포에 눈길이 끌려 자꾸 처마를 올려다본다. 아래층은 내외3출목인 데 위층은 내외4출목으로 약간 변화를 주었다.

 

 

 

 

편액은 김시습이 썼다는 설이 전해지지만 확인할 길이 없다.

 

 

 

 

 

극락전 내부에는 거대한소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이 모셔져 있는데, 2008년에야 보물 1565호로 지정되었다.

 

 

 

 

 

이 불상은 17세기 대규모 사찰에서 널리 조성되었던 대형 소조 불상 양식을 따르고 있다.

 

 

법주사, 무량사, 귀신사, 송광사(완주) 등의 불상들이 모두 4m가 넘는 대형 삼존불인데, 무량사의 삼존불은 소조불로는 동양 최대 규모다. 극락전이니만큼 주존불로 아미타불(5.4m)을 모셨으며, 양쪽에 관세음보살(4.8m), 대세지보살(4.8m)이 자리 잡고 있다.

 

 

 

 

 

거대한 불상이라 다소 도식적으로 단순화된 감이 있지만,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며 자존심과 자신감을 회복하고자 노력했던 당시 불교계의 저력을 느낄 수 있는 기념비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복장 발원문을 통해 현진(玄眞)이라는 조각승과 1633년이라는 조성 연대가 확인되었다.

 

 

법당 내부에 들어가기가 민망해 극락전 내부 모습을 담지 못했는데, 우물천장의 모습은 브리태니카 사전에 실린 것으로 대신하기로 한다.

 

 

 

 

뒷모퉁이에서 바라본 극락전

 

 

 

 

극락전의 처마, 서까래와 3외출목의 아름다움

 

 

 

 

 

 

 

 

극락전에서 바라본 절마당. 명부전, 오층석탑, 석등, 종각, 천왕문이 보인다. 

 

 

 

 

 

절집을 돌아보다가 가람 배치가 독특하다는 걸 느낀다.

 

대개의 절집은 산을 배경으로 계곡을 내려다보는 방향으로 전각이 배치되는 것인데, 무량사는 산에서 흘러내린 넓은 땅에 절마당을 마련하고 계곡과 나란한 방향으로 전각을 배치했다.

 

그래서 부속 전각들(원통전, 영산전 등)이 주법당인 미륵전보다 높은 오른쪽 언덕 위에 자리잡고 있다.

 

 

깊은 산 평화로운 절집... 임진왜란으로 불타기 전의 절집도 이런 모습이었을까. 이곳에서 이몽학이란 인물이 승려들과 함께 또다른 세상을 꿈꾸고 칼을 들었단다. 백성을 버렸던 어지러웠던 시대...

 

 

↓ 무량사 전경

 

 

 

 

 

 

 

 

무량사에는 보물 한 점이 더 있다.

 

이름하여 무량사미륵불괘불탱인데, 보물 제1265호로 지정되어 있다.

 

 

 

인조 5년(1627년)에 완성된 이 괘불은 세로 12m, 가로 6.9m의 대형 모시천 위에 미륵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각 여덟 구의 화불(化佛)을 모시고 있는 그림이다.

 

 

미륵불은 화려한 보관을 쓰고 두 손으로 용화수 나뭇가지를 받쳐들고 서 있다. 보관의 끝에는 6구의 불상이 있고 그 사이로는 동자(童子)와 동녀(童女) 등 59구의 얼굴이 빽빽하게 배치되어 있다.

 

네모난 얼굴에는 눈과 속눈썹, 도톰한 입술, 콧수염까지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고 옷에는 화려한 장식들이 달려있다. 머리광배와 몸광배가 그려져 있고 몸광배에는 연꽃과 모란 등의 무늬가 있다.

 

머리광배와 몸광배 밖으로는 오색의 구름과 함께 배치된 작은 불상들이 마치 미륵불을 수호하고 있는 듯하다.

 



녹색과 붉은색을 주로 사용하여 화려하게 채색되었으나 전체적으로 형식화된 모습이다.

 

 

 

 

 

 

 

 

※ 무량사 안내도(다음 지도 캡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