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산하와 문화재

부여 (11) 정림사지 오층석탑, 둘밖에 없는 백제의 국보 석탑

모산재 2011. 11. 28. 12:50

 

부여 여행 둘쨋날.

 

읍내에 있는 정림사 오층석탑과 궁남지, 부여박물관과 대릉원 등을 먼저 돌아보고 오후에 무량사를 돌아볼까 했으나, 무량사 버스 시간 맞추기 쉽지 않을 것 같아 일단 무량사부터 다녀오기로 하고 마침 터미널에서 출발하는 무량사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그러나, 편의상 무량사에 대한 글은 나중에 올리기로 하고 정림사지와 궁남지에 관한 글을 먼저 올리기로 한다.

 

 


무량사를 다녀오고 나서 정림사지를 찾았다. 부여읍의 동쪽 넓은 평지를 차지하고 있는 정림사지는 높은 담장으로 울을 둘렀다.

 

정문은 남쪽에 있고, 입구에는 2006년에 문을 연 정림사지박물관이 자리잡고 있다. 

 

 

 

 


※ 정림사지 안내도

 

 

 


박물관도 돌아봤으면 좋겠지만 시간에 쫓겨 그냥 지나치기로 한다. 유물은 부여박물관을 찾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하고 ....

 

 

 


박물관 쪽에서 내려다보는 정림사지 경내. 평지 가람으로 터가 시원할 정도로 넓다. 

 

 

 

그러나 패망한 나라의 도읍지 절터는 너무 휑하기만 하다. 경주 불국사와 비교하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겠지만, 석탑 하나만 덩그러니 솟아 있는 모습에서 백제의 비극이 절로 떠올려진다.

 

그나마 경내의 맨 남쪽, 중문 자리 앞에 연지(蓮池)가 복원되어 있어 단조로움을 살짝 달래 주고 있다. 

 

 


 

그리고 석불좌상이 있는 있는 자리에 7칸 짜리 건물을 올려 그 허전함을 메우긴 했으되, 법당도 보호각도 아닌 어정쩡한 건물이 생경스런 느낌만 든다.  

 

 

 


정림사지는 사비 백제 시대(538~660)의 중심 사찰 터. 석조여래좌상이 있던 강당터에서 나온 기와에 "태평 8년 무진 정림사 대장당초(太平八年 戊辰 定林寺 大藏唐草)"라는 글이 발견되어 고려 현종 19년(1028) 당시 정림사로 불렸던 것을 확인하게 되었다.

 

정림사는 중문, 오층석탑, 금당, 강당 등이 남북으로 일직선상에 놓이고, 강당과 중문을 연결한 회랑이 금당과 오층석탑을 감싸고 있는 배치를 하고 있는 전형적인 백제식의 1탑식 가람이다. 가람을 둘러싼 회랑이 정사각형이 아닌, 북쪽의 간격이 넓은 사다리꼴 평면으로 되어 있는 점이 특이하다.

 

백제시대의 국보 오층석탑과 고려시대의 보물 석조여래좌상이 대표적인 유적이다. 출토 유물로는 백제와 고려시대의 장식기와를 비롯하여 백제 벼루, 토기와 흙으로 빚은 불상들이 있다.

 

 


 

■ 정림사지 오층석탑

 

눈부시게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정림사지오층석탑이 우뚝 솟아 있다. 이 탑마저 없었더라면 정림사지는 존재할 수 있었을까.

 

 

 

 

 

  

 

 

국보 제9호로 지정되어 있는 이 탑의 높이는 8.33m이다. 백제시대의 석탑으로는 익산 미륵사지 석탑(국보 제11호)과 함께 단 둘밖에 없는 국보이다.

 

오층이나 되는 탑의 규모에 비해  받치고 있는 기단이 좁고 낮다. 기단 위에 올려진 1층 탑신은 늘씬하지만 그 위층의 탑신은 안정감을 주기 위해 짧게 표현했다.

 

목조탑에서 느낄 수 있는 잘 다듬어지고 세련된 조형미가 느껴지는 아름다운 석탑이다. 기단의 네 면은 가운데와 모서리에 기둥돌을 표현하였고, 각 층의 몸돌에도 모서리마다 기둥을 세워놓았는데, 가운데가 배부른 배흘림기법을 이용하였다. 얇고 넓은 지붕돌은 처마 끝이 살짝 들려진 모습이 날렵하다. 



 

그런데 이 장중하고 멋진 탑에도 패망한 나라 백제의 비극이 아로새겨져 있다.

 


1층 탑 몸돌을 자세히 살펴보면 글씨를 새긴 흔적이 보인다. 이 새김글이 당나라 소정방이 백제를 멸망시킨 뒤에 기념으로 새긴 평제기공문(平濟紀功文)이다.

 


모서리 기둥돌에는 커다란 글씨로 '대당평백제국비명(大唐平百濟國碑銘)'이라 새겼고, 사방 몸돌을 두르며 소정방의 전승 기록과 백제가 패망에 이르는 과정,  의자왕과 백제 유민들에 대한 기록 등이 새겨져 있다.

 

하수량이 글을 짓고 권회소가 저수량체로 새긴 명문은 "반도의 오랑캐가 만리 밖에 떨어져 천상을 어지럽게 하고 정사를 그릇되게 하여 백성이 원망하니 우리 황제가 형국공 소정방으로 하여금 원정케 하였으니 … 형국공이 일거에 삼한을 평정하였다."는 내용으로 시작한다.

 


이 새김글로 해서 한때는 이 탑을 '평제탑(平濟塔)'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나라가 망하는 수치를 당하고서도 패망을 안겨 준 나라가 붙여준 이름을 썼다니, 이보다 더 부끄러운 일은 없을 듯하다.

 





그런데 다산 정약용이 이 정림사탑을 돌아보았던 모양이다. 


이 방자한 글을 발견한 그의 마음이 편안했을 리 없다. 그는 '소정방의 평백제탑을 읽고(讀蘇定方平百濟塔)'라는 야유로 가득찬 한시를 써서 그의 문집에 남겨 놓았다.

 

漫漫蟲蝕葉     벌레먹은 잎처럼 늘어지고

鬆鬆雀啄木     참새 쫀 나무처럼 헝클어졌는데
時連四五字     때때로 이어진 네댓 글자는

詞理差炳煜     문장 이치 밝게 빛나는 듯도 하구나.

侯度數曠闕     도량은 자주 텅비고 빠진 듯한

武烈夸迅速     무공 과시는 재빠르구나.

千年多風雨     천년 세월 비바람 많아

剝落不可讀     깎이고 떨어져 나가 읽을 수 없네.

作者賀遂良     지은 자는 하수량인데

奇文有遺馥     기이한 문장 향기를 남기었구나.

懷素總能書     회소의 모두 능한 글씨는

姓權故多肉     권씨여서인지 군살이 많네.

凱歌震水鄕     개선의 노래 강 고을을 진동하니

當時萬人伏     당시에 만백성이 엎드렸지.

雲帆歸滄海     구름 같은 돛배 창해로 돌아갈 때

意氣彌平陸     의기는 온 땅을 가득 채웠으리.

勝亦一時欣     승리도 한때의 기쁨이고

敗亦一時辱     패배 또한 한때의 치욕인데,

只今野田中     다만 지금 들밭 가운데 있어
躑躅放樵牧     나무꾼과 목동들의 걸음만 머뭇거리게 하네.

 

(※ 번역이 잘못되었다면 지적 바랍니다.) 

          




■ 정림사지 석조여래좌상


보물 제108호로 지정된 석불좌상은 1993년에 지은 7칸의 보호각에 모셔져 있다. 불상이 자리잡고 있는 이 곳은 백제 정림사지의 강당 자리였다고 한다. 

 

 

 

장중하고 섬세한 오층석탑에 대한 감동을 안고 들여다보는 석불좌상은 실망스럽기 그지 없는 모습이다.

 

 

 

호빵처럼 넓적하고 동그란 얼굴에 조잡하게 새긴 불상의 상호, 그 위에 얹혀진 네모진 관은 초등학생 수준의 솜씨라고 생각될 정도로 서투르다.

 

 

 

그 아래 신체는 오른쪽 팔, 왼쪽 무릎은 떨어져 나가고 없고 남은 신체도 극심하게 마모되어 굴곡만 겨우 보일 뿐이다. 세부적인 형상을 알아보기 어렵지만 가슴으로 올라간 왼손으로 보아 지권인()의 수인을 한 비로자나불의 모습을 새겼던 것이 아닐까 싶다.

 

 

어째서 이렇게 조잡한 불상이 보물로 지정되었단 말인가, 하고 한숨이 나오는데...

 

시선이 아래로 향하며 그제야 그럼 그렇지! 하며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인다.

 

 

 

부처님이 앉아 있는 대좌는 한눈에도 예사로운 모습이 아니다. 비록 깨어져 나간 부분이 많긴 하지만 8각의 대좌석은 공 들인 흔적이 뚜렷하다.

 

많이 파손된 상대석은 활짝 핀 연꽃무늬를 새겼고, 중대의 8각 간석(竿)에는 각 면에 큼직한 눈 모양을 새겼다. 하대석에는 엎어진 연꽃과 그 아래 2단의 팔각석에 안상()을 중첩되게 표현했다. 

 

결국 대좌를 조각한 솜씨에 비추어 볼 때, 불상의 몸통은 극심하게 마모되긴 했지만 원래의 것으로 보이는데 머리와 관은 후대에 적당히 만들어 붙인 것임을 알 수 있다.

 

이곳에서 발견된 명문 기와를 통해 이 불상은 고려시대에 절을 고쳐 지을 때 세운 본존불로 추정하고 있다. 높이 5.62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