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리탑 7

나옹화상의 세 사리탑, 석탑 형식의 영전사지 보제존자탑

무학대사의 스승으로 조선 불교에 큰 영향을 끼친 나옹화상 혜근(惠勤, 1320~1376)의 사리탑은 세 곳에 전해지고 있다. 그 하나는 나옹화상이 입적한 여주 신륵사에, 또 하나는 나옹화상이 오래도록 머물며 주지로 있었던 회암사 터에,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나옹화상의 제자에 의해 세워진 원주 영전사 터에 있던 것을 옮겨 놓아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다. 혜근(1320∼1376) 스님의 호는 나옹이고 법호는 보제존자(普濟尊者)다. 20세 때 친구의 죽음을 보고, 출가하여 경북 공덕산 묘적암의 요연(了然)에게서 득도하고, 전국의 명산대찰을 찾아 돌아다녔다. 회암사에서 4년간 좌선하였으며 원나라에 가서 인도 승려 지공(指空)의 가르침을 받았다. 그는 견문을 더욱 넓히기 위해 중국 각지를 편력하며, 특히 평산 처림(..

원주 거돈사지 원공국사탑(보물 제190호) / 국립중앙박물관

거돈사터에 있던 원공국사 지종(圓空國師)의 사리탑으로, 일제시대에 일본인의 집에 소장되고 있던 것을 1948년 경복궁으로 옮겨 왔으며, 현재는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앞뜰에 있다. (거돈사지에는 이곳 원공국사탑을 재현한 탑을 세워 놓았다.) 원공국사(930∼1018) 지종>(智宗)>은 17세에 계를 받고 고려 광종 초기 승과에 급제한 뒤, 중국에 유학하여 법안종(法眼宗)을 배웠다. 당시 남중국에서 크게 유행하던 법안종은 선종 계통이면서도 교선일치를 표방하였다. 이러한 교리는 당시 전제왕권 수립을 위해 적극적으로 개혁정치를 펴던 광종의 관심을 끌게 되었으며, 지종은 광종의 비호를 받으면서 법안종 세력을 고려 불교계에 크게 떨치게 되었다. 그러나 광종이 사망하자 그의 급진적인 개혁정치가 좌절되면서 법안종 세력은..

양평 보리사지 대경대사탑비(보물 제361호) /국립중앙박물관

■ 양평 보리사지 대경대사탑비 보물 제361호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에 활약한 승려인 대경대사의 탑비로, 보리사터에서 발견되어 경복궁으로 옮겨졌다가,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 앞뜰에 있다. 대경대사(大鏡大師)는 9세에 출가하여 교종을 배웠으나, 나중에는 선(禪)을 연구하였다.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와 경순왕의 스승이 되었으며, 고려 태조는 그를 존중하여 보리사의 주지로 머물게 하였다. 69세에 이 절에서 입적하니 태조는 시호를 ‘대경’, 탑 이름을 ‘현기’라고 내렸다. 비는 거대한 비머리돌(이수)에 비해 받침돌인 돌거북(귀부)가 작고 납작해서 조화와 균형을 잃은 모습이다. 비문에는 대사의 생애와 공적 등이 새겨져 있는데, 당시의 문장가였던 최언위가 글을 짓고, 이환추가 글씨를 썼으며, 제자인 최문윤이 글..

창원 봉림사지 진경대사탑과 탑비(보물 제362호) / 국립중앙박물관

■ 창원 봉림사지 진경대사탑 보물 제362호 통일신라 말기 선종산문 중의 하나인 봉림산문을 세운 진경대사( 855~923)의 사리탑으로 경상남도 창원시 봉림동 봉림사 터에 있던 것을 1919년 탑비와 함께 옮겨온 것이다. 진경대사 심희(855∼923)는 임나(任那)의 왕족으로 김유신(흥무대왕)의 후손이다. 9세에 출가하여 혜목산 원감대사 현욱(玄昱)에게 구족계를 받고 명산을 다니면서 수행을 하다가 경남 창원에서 봉림사를 창건하니, 이때부터 선문9산 중 하나인 봉림산문의 기운이 크게 일어났다. 궁으로 들어가 경명왕에게 설법을 하기도 하였고, 그 후 다시 봉림사로 돌아와 제자들을 지도하다 923년(경명왕 7년) 68세의 나이로 입적하였다. 왕은 진경대사(眞鏡)이라는 시호와 ‘보월능공(寶月凌空)이라는 탑호를 ..

가장 오래된 국보 사리탑, (전)흥법사지 염거화상탑

■ (전)원주흥법사지 염거화상탑 국보 제104호 국립중앙박물관 앞뜰에 있는 염거화상탑은 가장 오래된 사리탑일 뿐만 아니라, 이후의 사리탑이 대부분 이 사리탑의 양식을 따르고 있어 최초의 것으로 의의가 있는 작품이다. 염거화상은 도의선사의 제자로, 선(禪)에 대한 이해가 거의 없었던 당시 주로 설악산 억성사에 머물며 선을 널리 알리는 데 힘썼다. 염거화상(?∼844)은 가지산파의 2대 조사(祖師)로 가지산문의 종조인 도의(道義)의 제자이다. 도의선사가 당나라에서 귀국하여 전라남도 장흥의 보림사(寶林寺)에서 남종선(南宗禪)을 열었으나 당시 불교계는 교종 중심이어서 받아들여지지 않자 설악산에 은거하였다. 도의가 진전사에서 입적할 때 염거화상은 남종선을 전수받고 가지산문의 제2대 교조가 되어 항상 일심(一心)을..

폐사지 여행(4) 묘탑·탑비의 최고 걸작, 법천사지 지광국사 현묘탑·탑비

거돈사를 들러 법천리 서원마울의 법천사에 이르렀을 때는 해가 서녘하늘로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다. 거돈사를 돌아보는 것으로 이번 여행을 끝내려나 싶었는데 우리 신 선생님은 정성을 다해 우리를 안내한다. 여행 길라잡이로 수없이 찾은 이곳에 이골이 났을 텐데도 말이다. 십 수 년 전에 찾아보고서는 처음 와 보는데 풍경이 달라진 것인지 낯설어서 자꾸 두리번거린다. 예전엔 논밭과 민가가 어우러져 있지 않던가. 어렴풋이 기억되는 길가 낮은 땅들은 절터 발굴이 상당히 진행되어 휑한 들판이 되어 있다. 법천사 절터 입구에 서 있는 느티나무 노거수, 수령이 얼마나 되었을까. 장정 여럿이 둘어서 손을 잡아야 할 만큼 굵은 허리통, 속살들이 풍화되어 텅 빈 자리는 사라져 버린 법천사 절터와 닮았다. 아마도 법천사의 흥망성..

폐사지 여행 (3) 원주 거돈사지 삼층석탑, 원공국사승묘탑과 탑비

청룡사에서 되돌아나와 남한강길을 따라 달리다 원주 부론으로 들어선다. 부론에는 거대한 폐사지가 둘이나 있으니 바로 거돈사와 법천사(法泉寺)이다. 우리는 먼저 거돈사로 향한다. 사적 168호인 거돈사지(居頓寺址)를 찾아 도착한 현계산(賢溪山)이라는 산기슭 작은 골짜기, 절터 앞 도로에서 내리면 가파른 언덕이 시야를 가로막고 선다. 언덕에 난 계단을 올라서자 볕바른 산언덕을 끼고 넓은 절터가 아늑하게 펼쳐진다. 20여 년 전까지만 해도 민가가 들어서 있었던 절터는 몇 년 간에 걸친 발굴 조사와 정비 과정을 통하여 유적지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거돈사(居頓寺)는 신라 후기인 9세기경에 창건된 절이다. 고려초기에 확장되고 중창되면서 큰절이 되었으며 조선 전기까지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고 하는데, 임진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