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산하와 문화재

원주 거돈사지 원공국사탑(보물 제190호) / 국립중앙박물관

모산재 2012. 2. 24. 21:36

 

거돈사터에 있던 원공국사 지종(圓空國師)의 사리탑으로, 일제시대에 일본인의 집에 소장되고 있던 것을 1948년 경복궁으로 옮겨 왔으며, 현재는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앞뜰에 있다. (거돈사지에는 이곳 원공국사탑을 재현한 탑을 세워 놓았다.)

 

 

원공국사(930∼1018) 지종>(智宗)>은 17세에 계를 받고 고려 광종 초기 승과에 급제한 뒤, 중국에 유학하여 법안종(法眼宗)을 배웠다. 당시 남중국에서 크게 유행하던 법안종은 선종 계통이면서도 교선일치를 표방하였다. 이러한 교리는 당시 전제왕권 수립을 위해 적극적으로 개혁정치를 펴던 광종의 관심을 끌게 되었으며, 지종은 광종의 비호를 받으면서 법안종 세력을 고려 불교계에 크게 떨치게 되었다. 그러나 광종이 사망하자 그의 급진적인 개혁정치가 좌절되면서 법안종 세력은 급속도로 약화되었고, 지종은 1018년 89세로 거돈사에서 입적하였다.

 

 

 

사리탑은 8각을 기본으로 조성되었는데, 지붕돌은 목조 건축의 지붕 모습을 충실히 본떴다.

 

 

 

 

 

몸돌과 닿는 곳에 4단의 받침을 표현하고 그 위에 서까래를 모방하여 새겼다. 처마는 얇고, 여덟 귀퉁이에는 치켜올림이 뚜렷하며, 낙수면에 새겨진 기와골 조각은 처마에 이르러 막새기와의 모양까지 표현해 놓았다.

 

꼭대기에는 8각형의 보개(寶蓋)와 보주가 얹혀 있다.

 

 

 

 

 

기단은세 개의 받침돌로 이루어져 있다. 아래받침돌은 각 면마다 안상(眼象)을 새긴 후, 그 안에 꽃 모양의 무늬를 두었다. 가운데받침돌은 아래·위에 테를 돌리고 안상 안에 8부신중(八部神衆)을 새겼다. 윗받침돌에는 활짝 핀 연꽃잎을 2중으로 돌려 새겼다.

 

 

 

 

 

 

 

8각을 이루고 있는 몸돌은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의 조각을 두었는데 여덟 곳의 기둥마다 꽃무늬가 장식되어 있다.

 

 

각 면에는 앞뒤 양면에 문 모양과 자물쇠 모양을, 좌우 양 면에는 창문 모양을, 그리고 남은 네 면에는 4천왕상을 새겼다.

 

 

 

 

 

 

탑비의 건립은 ‘태평을축추칠월(太平乙丑秋七月)’로 되어 있는데, 이는 고려 현종 16년(1025)에 해당하므로 이 사리탑도 그 때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 전기의 대표적인 8각 사리탑으로, 모양이 단정하고 아담한 통일신라 탑의 양식을 이어받아 조형의 비례가 좋고 중후한 품격을 풍기며, 전체에 흐르는 조각이 장엄하여 한층 화려하게 보인다. <위의 글은 문화재청 자료를 거의 그대로 인용함>

 

 

 

※ 거돈사지와 원공국사탑비에 대한 글 → http://blog.daum.net/kheenn/15853171

 

 

 

 

 

※ 원공국사 지종(圓空國師 智宗, 930∼1018)

고려 초기의 천태학승(天台學僧)으로, 속성(俗姓)은 전주 이씨, 자는 신칙(神則)이다. 8세에 사나사(舍那寺)에 머물고 있던 인도승 홍범삼장(弘梵三藏)에게 출가하였다. 홍범삼장이 인도로 돌아가자 광화사(廣化寺) 경철(景哲)에게 수업하여 946년(정종 1) 영통사(靈通寺) 관단(官檀)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953년(광종 4) 희양산(曦陽山)의 형초선사(逈超禪師) 밑에서 수행하였고, 954년 승과에 합격하였다.

959년 광종의 환대를 받으며 구법을 위해 오월국(吳越國)으로 유학하여 영명사(永明寺) 연수(延壽)에게 법안종(法眼宗)을 배웠고, 961년 국청사(國淸寺) 정광(淨光)에게 '대정혜론(大定慧論)'을 배워 천태교를 전수받았다. 968년 전교원(傳敎院)에서 '대정혜론'과 '법화경'을 강의하여 명성을 떨쳤다.

970년(광종 21) 10여 년만에 귀국하여 광종의 환영을 받아 대사가 되었고, 금광선원(金光禪院)에 머물렀다. 975년(광종 26)에 중대사(重大師)가 되었고, 경종(975∼981)이 즉위함에 삼중대사(三重大師)가 되었다. 990∼994년 사이에 적석사(積石寺)로 옮겨 거주하면서 호를 혜월(慧月)이라 하였고, 성종의 부름으로 5년 동안 궁중에서 설법하였다. 목종의 호의가 깊어 선사가 되었고, 불은사(佛恩寺)와 호국외제석원(護國外帝釋院)에서 머물렀다. 현종이 즉위하여 대선사가 되어 광명사(廣明寺)에 주석하였고, 법호를 적연(寂然)이라 하였다.

1012년(현종 3) 왕사가 되었으며, 3년 뒤에는 보화(普化)라는 법호를 받았다. 1016년 병을 얻어 1018년(현종 9) 원주 현계산(玄溪山) 거돈사(居頓寺)로 하산하여 입적하였으니 세수(歲壽)는 89세이다. 승지(勝地)를 잡아 승묘탑(勝妙塔)을 세우고 거돈사 동남쪽에 장사지냈다.

원공국사는 법안종(法眼宗) 승려로, 법안종은 선종의 일종이나 천태종·화엄종·법상종 사상을 융합하고 나아가 교종과 선종을 일치시키려는 경향이 있다. 법안종은 광종의 호족세력 억압과 함께 왕권강화의 방편으로 중요시되고 법안종 승려들도 광종의 호의를 받았는데, 원공국사도 이러한 면에서 광종의 환대를 받았던 것이다.

한편 원공국사는 오월국 국청사에서 천태종의 교의도 배웠고 자신이 국청사에서 대정혜론과 법화경을 강의한 것으로 보아 천태종에 대해서도 많은 지식이 있었으며, 대각국사 의천이 고려 천태종을 성립시킬 때 흡수되었던 것으로 보아 천태종 성립에도 지대한 역할을 하였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