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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 봉림사지 진경대사탑과 탑비(보물 제362호) / 국립중앙박물관

모산재 2012. 2. 24. 12:34

 

■ 창원 봉림사지 진경대사탑 보물 제362호

 

 

통일신라 말기 선종산문 중의 하나인 봉림산문을 세운 진경대사( 855~923)의 사리탑으로 경상남도 창원시 봉림동 봉림사 터에 있던 것을 1919년 탑비와 함께 옮겨온 것이다. 

 

 

진경대사 심희(855∼923)는 임나(任那)의 왕족으로 김유신(흥무대왕)의 후손이다. 9세에 출가하여 혜목산 원감대사 현욱(玄昱)에게 구족계를 받고 명산을 다니면서 수행을 하다가 경남 창원에서 봉림사를 창건하니, 이때부터 선문9산 중 하나인 봉림산문의 기운이 크게 일어났다. 궁으로 들어가 경명왕에게 설법을 하기도 하였고, 그 후 다시 봉림사로 돌아와 제자들을 지도하다 923년(경명왕 7년) 68세의 나이로 입적하였다. 왕은 진경대사(眞鏡)이라는 시호와 ‘보월능공(寶月凌空)이라는 탑호를 내렸다.

 

 

 

 

전형적인 8각 부도로 장식을 절제한 조각이 소박하고 단아한 느낌을 준다. 

 

 

 

 

 

 

하지만 탑신의 몸돌에 비해 지붕돌이 지나치게 커서 비례의 균형이 다소 부족한 모습이다. 탑신부의 몸돌은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새겼을 뿐 다른 장식이 없는 깔끔한 모습이다.

 

사리탑의 조성 시기는 진경대사가 입적한 해(923년)로 추정된다. 받침돌의 안상 등에서도 볼 수 있듯 조각 수법이 강하지 않고 전체 형태가 길쭉해지는 경향이 나타나는데, 이는 통일신라의 양식을 계승하면서도 고려시대의 양식으로 나아가는 과정에 있는 있는 특징으로 볼 수 있다.

 

 

 

 

 

 

지붕돌은 높고 큰 편인데 처마 밑이 수평을 이루고 있다. 8각의 굵은 지붕선이 흘러내려 추녀 끝에 우아한 꽃무늬 장식을 새겼으나 아쉽게도 모두 부서지고 깨어진 자국만 남았다.

지붕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으로 연꽃 모양의 앙화(仰花)와 보주(寶珠)를 올려 놓았다. 

 

 

 

 

 

 

사리탑에서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가운데받침돌로, 북 모양의 돌 둘레에는 꽃송이들을 새기고 이를 띠장식으로 연결한 것이 이색적이다.

 

윗받침돌에는 연꽃 8송이를 조각하였는데, 꽃잎 안에도 섬세한 문양을 두었고 꽃잎과 꽃잎 사이에도 비슷한 문양을 새겼다.

 

 

 

 

 

 

그런데, 경복궁 뜰에 함께 있었던 진경대사 탑비는 어디로 간 것일까. 용산 박물관에서는 사리탑 곁에 탑비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문화재청의 자료로 살펴보기로 한다.

 

 

 

 

※ 창원 봉림사지 진경대사탑비 보물 제363호

 

비몸은 크게 몇 동강 나 있는 모습인데, 분실된 부분이 있어 옛 탁본을 참고로 복원해 놓은 것이라 한다. 비몸의 양측면에는 화려한 운룡문(雲龍紋)을 새겨 놓았다.

머릿돌 이수(螭首)에는 구름에 둘러싸인 두 마리의 용이 혀 보주(寶珠)를 두고 서로 다투는 듯한 형상을 나타내고 있다.

받침돌의 거북머리는 유난히 크고 입에는 여의주를 물고 있으며, 머리 위에는 뿔이 있던 작은 구멍이 있다. 등 위로는 비를 꽂아두기 위한 네모난 홈을 마련하였는데, 주위에 구름무늬가 가득하다.

 

 

 

 

통일신라 경명왕 8년(924)에 세워진 비로, 비문은 경명왕이 직접 짓고 문하승 행기(幸期)가 쓴 글씨를 문하승 성휴(性休)가 새겼으며 제액은 최치원 동생인 최인연의 글이다.

각 조각들이 얕아지고 형식화된 경향이 있어 통일신라 말기의 쇠퇴하던 기풍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