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산하와 문화재

폐사지 여행(4) 묘탑·탑비의 최고 걸작, 법천사지 지광국사 현묘탑·탑비

모산재 2009. 12. 30. 23:58

 

거돈사를 들러 법천리 서원마울의 법천사에 이르렀을 때는 해가 서녘하늘로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다.

 

거돈사를 돌아보는 것으로 이번 여행을 끝내려나 싶었는데 우리 신 선생님은 정성을 다해 우리를 안내한다. 여행 길라잡이로 수없이 찾은 이곳에 이골이 났을 텐데도 말이다.

 

 

십 수 년 전에 찾아보고서는 처음 와 보는데 풍경이 달라진 것인지 낯설어서 자꾸 두리번거린다. 예전엔 논밭과 민가가 어우러져 있지 않던가. 어렴풋이 기억되는 길가 낮은 땅들은 절터 발굴이 상당히 진행되어 휑한 들판이 되어 있다.

 

 

 

 

 

 

법천사 절터 입구에 서 있는 느티나무 노거수, 수령이 얼마나 되었을까. 장정 여럿이 둘어서 손을 잡아야 할 만큼 굵은 허리통, 속살들이 풍화되어 텅 빈 자리는 사라져 버린 법천사 절터와 닮았다. 아마도 법천사의 흥망성쇠를 눈으로 지켜보았으리라.

 

 

 

 

 

 

느티나무를 구경하다가 우리는 들판을 가로질러 당간지주로 향한다. 무를 가꾸었는지 너른 밭에는 팔려가고 남은 무들이 여기저기 퍼렇게 남았는데, 한결같이 여러갈래로 난 뿌리들이 꼬여 기기묘묘한 형상을 하고 있어 우리의 호기심을 끈다. 농민들에겐 상품으로 실패한 아픔이었겠지만….

 

 

우리가 가로지르는 이 넓은 밭들도 모두 법천사 절터였으리라, 고 생각되는 것은 무밭을 건너간 곳에는 절터에서 나온 기와 등의 유들이 수거되어 쌓여 있었고, 무엇보다도 당간지주가 들판의 동쪽 끝 작은 언덕 위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 넓게 펼쳐진 절터

 

 

 

 

 

거돈사처럼 신라말에 산지 가람으로 세워져 고려시대에 대대적으로 중창된 대사찰 법천사는 화엄종과 양대 종단을 이루고 있던 법상종의 고승 정현이 주지로 있으면서 법상종 사찰로 번성하였으며, 국사였던 지광국사 해린이 왕실의 비호하에 법천사로 은퇴하면서 크게 융성하였다가 조선 임진왜란 때 불타 버렸다고 한다(법상종에 대해서는 맨 아래 '더보기' 참조)

 

 

들판의 북쪽 산기슭에는 우리나라 묘탑 가운데 최대의 걸작으로 국보로 지정된 지광국사현묘탑(智光國師玄妙塔)과 탑비(塔碑)가 있었는데, 탑은 일제에 의해 경복궁으로 옮겨진 다음 국립중앙박물관으로 가 이곳에는 없고, 탑비와 현묘탑터와 부도밭터가 남아 있다.

 

2001년부터 2004년까지 발굴조사가 네 차례 이루어졌는데 통일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건물터 19동과 우물터 3곳, 석축 및 담장유구, 계단터를 비롯하여 금동불입상, 연화대석, 각종 기와류 및 자기류 등의 유물이 확인되었다고 한다.

 

 

 

 

● 법천사 당간지주(원주시 문화재자료 제20호)

 

 

절에 행사나 의식을 행할 때 부처와 보살의 행적을 그린 깃발(幢幡)을 거는 길다란 장대를 당간이라 하고, 당간을 지탱하는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대개 당간은 사라지고 없고 지주만이 남아있게 되는데, 법천사의 당간지주도 마찬가지다.

 

별다른 조각이 없어 소박하다. 두 기둥의 윗부분은 모서리를 깍아 둥글게 다듬어 놓았고, 안쪽면에는 당간을 고정시키기 위한 구멍을 파놓았다. 통일신라시대에 세워진 것으로 추측된다.

 

 

 

 

지주 사이에는 당간의 받침돌이 온전한 모습으로 남아 있는데 당간을 꽂아두기 위한 받침돌을 둥글게 다듬어 놓았다.

 

 

 

 

 

 

되돌아 나와 절터 지광국사현묘탑비와 부도밭 터를 보기 위해 북쪽 산언덕으로 오른다.

 

 

언덕 아래 공터에는 복원사업을 위해 석공들이 돌을 다듬느라 분주하다.

 

 

 

 

↓ 느티나무 노거수 주변의 절터 풍경

 

 

 

 

 

 

저녁 햇살이 쓸쓸히 비치는 솔밭 속에 아늑하게 자리잡은 국보, 지광국사 현묘탑비가 눈에 들어온다. 그 앞에는 무너지고 손상된 석부재들이 널려져 있어 이곳이 폐사지임을 증언하는 듯하다.

 

 

사리탑비의 주인공인 지광국사(智光國師, 984∼1070))는 속가명은 해린(海麟)으로 목종 2년(999)에 용흥사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고 역대 왕의 우대를 받으며 삼중대사(三重大師), 승통(僧統)이 된 후 문종 12년(1058)에 국사(國師)가 된 분으로 1070년 87세를 일기로 이곳 법천사에서 입적하였다고 한다.

 

 

 

 

● 지광국사 현묘탑비 智光國師玄妙塔碑 (국보 제59호)

 

 

지광국사의 탑비로, 지광국가 이 절에서 입적하자 그 공적을 추모하기 위해 입적 15년 후 고려 선종 2년(1085)에 사리탑인 현묘탑과 함께 이 탑비를 세웠다. 현묘탑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졌고 탑비만이 옛 자리를 지키고 있다.

 

 

 

 

 

 

거북받침돌(귀부) 위에 빗돌을 세우고 왕관 모양의 머릿돌을 올린 모습이다.

 

거북등의 조각 수법과 머릿돌의 모양이 새로운 양식으로 특징적이다. 비 앞면 가장자리에는 덩굴무늬를 새기고 양 옆면에는 용을 정교하게 조각한 것이 돋보인다. 비의 형태와 조각 솜씨가 잘 어울리는 고려시대의 대표 걸작이라 할 수 있다.

 

 

 

 

비의 높이는 4.55m이며

 

 

 

 

이수(머릿돌)는 모자를 쓴 듯한 형태이며 중앙에 상륜부를 두어 3단으로 이루어진 연꽃무늬 조각을 보주(寶珠)로 얹었다. 네 귀는 바짝 들려진 채로 귀꽃을 달고 있다.

 

 

 

 

비몸돌에서 양 옆면에는 구름과 어우러진 두 마리의 용이 정교하고도 화려하게 새겨져 있다.

 

 

 

 

 

 

비 바깥 둘레에는 덩굴풀 문양인 보상당초문(寶相唐草紋)을 조각하여 돌렸다.

 

 

 

 

 

 

비문은 지광국사가 불문에 들어 입적할 때까지의 행장과 공적을 추모하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비문은 정유산(鄭惟産)이 짓고, 글씨는 안민후(安民厚)가 중국의 구양순체를 기본으로 삼아 부드러운 필체로 썼다.

 

 

 

 

귀부(龜跌)는 넓은 지대석 위에 놓였고 밑에는 구름무늬가 장식되어 있다. 용머리처럼 생긴 거북머리의 목은 길게 곧추서서 정면을 향하고 목은 물고기 비늘 무늬로 표현되었다.

 

 

 

 

귀갑문은 독특한데 여러 개의 사각형으로 면을 나눈 후 그 안에 육각형을 만들고 '王'자를 새겨 장식하였다. 육각형과 사각형 사에에는 작은 점모양의 새김을 촘촘히 두었고, 귀갑의 가장자리는 곡선을 이루며 장식적으로 새겨졌다.

 

발은 작게 표현되었고, 거북의 아랫쪽은 물결 모양의 새김을 두어 상징적이면서도 사실적인 느낌을 준다.

 

 

 

 

거북은 목을 곧게 세우고 입을 벌린 채 앞을 바라보고 있는데, 얼굴은 거북이라기보다 용의 얼굴에 가까운 형상으로, 턱 밑에는 길다란 수염이 달려 있고 부릅뜬 눈은 험상궂다.

 

 

 

 

 

 

지광국사의 사리탑인 국보 101호 현묘탑이 이 자리에 없어 이쉽기만 한데, 일제시대인 1912년 일본인이 오사카로 몰래 빼돌린 것을 1915년 반환하여 현재는 구 국립중앙박물관인 경복궁에 남아 있다. 6.25때 폭격을 맞아 파괴된 것을 접착하여 복원하였기 때문에 더 이상의 심각한 훼손을 막기 위해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기지 않고 그대로 남긴 것이다.

 

 

 

 

● 지광국사 현묘탑 智光國師玄妙塔(국보 제101호)

 

 

통일신라 이후의 부도가 대개 8각을 기본형으로 만들어진 것과는 달리, 이 부도는 4각의 평면을 기본으로 하는 새로운 양식을 보여주는 점에서 주목된다. 화려한 장식이 두드러지면서도 장식이 정교하며 혼란스럽지 않아 고려시대 부도의 최고 걸작이라 할 수 있다.

 

탑비를 세운 때가 국사의 입적 후 15년만인 고려 선종 2년(1085)이므로, 묘탑의 조성시기는 국사의 입적 직후인 1070∼1085년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출처 : 문화재청

 

 

바닥돌은 네 귀퉁이에 용의 발톱 같은 조각을 새겨 땅에 밀착된 듯한 안정감을 주며, 7단이 기단의 맨윗돌은 장막을 드리운 것처럼 깎아 엄숙한 느낌을 준다. 탑신 앞뒤로 사리를 모시는 곳을 표시하기 위해 문짝을 본떠 새겼다. 기단 위의 몸돌에는 임금이 타던 보련(寶輦, 또는 玉轎)을 메고 가는 가마꾼의 모습이 도드라지게 새겨져 있어 눈길을 끈다.

 

지붕돌은 네 모서리가 치켜올려져 있으며, 밑면에는 불상과 보살, 봉황 등을 조각해 놓았다. 머리장식 역시 여러 가지 모양을 층층이 쌓아올렸는데, 비교적 잘 남아있다. 원래 기단의 네 귀퉁이에 사자상이 1마리씩 놓여 있었다고 하는데 안타깝게도 일찍이 도둑을 맞아 지금은 한마리도 남아있지 않다.

 

 

 

↓ 현묘탑비 주변에 손상된 채로 전시된 석조문화재들

 

 

 

 

 

 

 

 

↓ 복원공사 현장 풍경과 멀리 보이는 법천사 절터 전경

 

 

 

 

 

 

중원 미륵사지로부터 청룡사지, 거돈사지, 법천사지를 잇는 1박2일의 폐사지 여행은 이렇게 마무리되었다. 흥법사지를 마저 돌아보지 못한 것이 아쉬움으로 남지만 언제 또 시간이 되면 고달사지와 함께 찾아보리라.

 

 

 

 

더보기

 

※ 지광국사 해린(智光國師 海麟, 984~1070) ; ☞ 아래 두 자료는 입적한 해를 1067년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문화재청 글에는 1070년으로 되어 있다.

 

속성은 원씨(元氏). 자는 거룡(巨龍). 16세 때 법천사(法泉寺)의 관웅(寬雄)에 의지하여 승려가 되었고, 개성 해안사(海安寺)에서 준광(俊光)에게 사사했다. 999년(목종 2) 용흥사(龍興寺)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1004년 왕륜사(王輪寺)의 대선(大選)에서 대덕(大德)이 되었고, 1011년(현종 2) 대사(大師)가 되어 강진홍도(講眞弘道)의 법호를 받았다. 1021년 평양의 중흥사(重興寺)에서 중대사(重大師)가 되어 수다사(水多寺)에 있다가 다시 해안사로 옮겼다. 덕종 때 삼중대사(三重大師)에 올랐다가 수좌(首座)가 되고, 정종말에 승통(僧統)이 되었다. 문종 때는 유심(唯心)의 묘한 뜻을 깨달아 마납가사(磨衲袈裟)를 받았다. 1054년(문종 8) 현화사(玄化寺)로 옮겨 주지하다가, 1056년 왕사(王師)가 되었으며, 다음해에는 융소(融炤)의 법호를 받았다. 1058년 국사(國師)에 올라 왕의 극진한 대우를 받았다. 1067년 은퇴하여 법천사에 머무르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탑호는 현묘(玄妙)이며 1085년(선종 2) 법천사에 비가 세워졌다. 시호는 지광(智光)이다. <브리태니커백과>

 

지광국사 해린(海麟)의 속성(俗姓)은 원씨(元氏), 자(字)는 거룡(巨龍), 아명(兒名)은 수몽(水夢)으로 원주(原州) 출신이다. 984년(성종 3)에 출생하여 어려서부터 학문에 뜻을 두었으나 불교에 뜻이 깊어 법천사(法泉寺) 관웅(寬雄) 밑에서 수학(受學)하였고, 관웅이 개경(開京)으로 감에 따라 준광(俊光) 밑에서 삭발수도하였다. 해린이란 법명(法名)은 관웅이 붙여준 것이다. 999년(목종 2) 16세에 용흥사(龍興寺) 관단(官檀)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았고, 1005년(목종 8) 왕륜사(王輪寺) 대선장(大選場)에서 담경(談經) 시험을 보았는데, 그 뜻이 심오하고 법문(法文)도 출중하여 왕이 대덕(大德)이라는 법계(法階)를 내렸다.

1010년(현종 1) 법천사로 돌아가는 길에 도강(都講)인 진조(眞肇)를 만나 역산법(曆算法)을 배웠고, 1014년(현종 5)에 대사(大師)가 되었다. 1021년(현종 12) 개경 중흥사(重興寺)에서 설법하였는데, 논리·문장력·음운학(音韻學)의 실력이 대단하였다. 1021∼1030년 사이에 중대사(重大師)가 되었고, 덕종(德宗) 연간(1031∼1034)에 삼중대사(三重大師) 수좌(首座)가 되어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을 강의하였는데, 왕의 우대가 각별하였다. 1045년(정종 11)에 승통(僧統)이 되었고, 문종(文宗)이 즉위하자 궁궐(宮闕)로 초빙되어 유심(唯心)의 묘의(妙義)를 강의하였다. 1054년(문종 8) 법상종의 총본산이었던 현화사(玄化寺)에 이석(移錫)하여 보수공사를 지휘하였고, 경전(經典)도 판각(板刻)하였다. 1056년(문종 10) 왕사(王師)가 되었고, 다음해에 국사(國師)가 되었다. 1059년(문종 13) 내전(內殿)에서 백고좌회(百高座會)의 제일설법주(第一說法主)가 되었다.

1067년(문종 21)에 법천사로 돌아와 얼마 안 있어 입적하였다. 명봉산(鳴鳳山) 법천사 동쪽에서 다비(茶毗)하였는데, 문종이 깊이 애도하여 지광(智光)이라는 시호(諡號)를 내리고 원주창고에 있던 양곡으로 경비에 충당토록 하였다. 해린의 탑비는 1085년(선종 2) 소현(韶顯)의 주관 아래 세워졌는데, 제자로는 현화사(玄化寺)의 소현(韶顯)을 비롯하여 문종의 아들인 도생승통(道生僧統) 석규(釋窺), 수좌(首座)는 경현(慶玄) 등 1,370여명이 있다.

해린은 유학(儒學)과 노장(老莊), 역산(曆算)도 익혔으며 박학하고 문장도 뛰어났다. 그가 고려 불교계에 영향력을 발휘하였던 시기는 73세에 왕사가 되어 84세로 법천사로 하산할 때까지로, 이후 법상종은 현종(顯宗)대에 현화사가 창건됨으로써 전성기를 맞게 된다. 즉 해린은 고려 법상종 중흥의 주역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사상에 대해서 그가 강의한 것으로 화엄경에 나오는 유심묘의(唯心妙義)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법상종과 함께 당시 불교계에서 중요시되는 경전을 망라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현화사를 보수하고 경판(經板)을 판각하는 데 총지휘를 하였음을 볼 때 당시 귀족 불교계를 총괄하고 있었다.

 

 

※ 법상종

 

유식사상(唯識思想)과 미륵신앙(彌勒信仰)을 기반으로 하여 성립되었다. 법상종의 교의(敎義)가 되는 유식사상은 중관파(中觀派)와 함께 인도 대승불교의 2대 학파를 이루는 유가행파(瑜伽行派)의 교학(敎學)으로 중국에서는 현장(玄奘)이 소개하고 그의 제자 규기(窺基)가 하나의 종파로 성립시켰다. 이 종파는 인식의 대상이 되는 일체법의 사상(事相)에 대한 고찰과 분류 해명을 연구의 중심으로 삼는다고 하여 법상종이라 하였는데, 규기가 자은사(慈恩寺)를 중심으로 활동했기 때문에 자은종(慈恩宗)이라고도 한다.

한국에서도 역시 현장의 제자였던 원측(圓測)을 중심으로 연구되어 그 제자들에 의해 유식학 연구가 시작되었다가 순경(順憬) ·태현(太賢) 등에 의해 종파로 성립된 것으로 보인다. 흔히 법상종의 조사(祖師)로 알려진 진표(眞表)의 점찰법(占察法)은 법상종의 한 계통으로 생각되며 법상종의 정통으로는 인정되지 않는다.

고려시대에 들어와서도 법상종은 화엄종(華嚴宗)과 함께 교종(敎宗)의 2대 종파가 되었는데,《대각국사묘지(大覺國師墓誌)》에는 불교 6학파의 하나로 기록되어 있다. 고려시대의 법상종은 보수적인 귀족세력과 연결되어 교리면에서 관념화되고 불교의식 등의 형식적인 면을 강조하였다. 특히 고려 중기에는 인주이씨(仁州李氏)의 후원을 받아 왕실 및 기타 귀족들의 후원을 받은 화엄종과 대립되었는데, 이자겸(李資謙)이 반란을 일으켜 처형되자 타격을 입기도 하였다.

유가업 ·유가교문 ·유가종 ·자은종으로도 부르다가 자은종으로 통칭되어 조선 초에까지 이어졌으나, 교세는 매우 위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