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산하와 문화재

고창 (1) 고창 향교, 전학 후묘의 산지형 향교

모산재 2011. 3. 4. 00:21

 

극성을 떨던 한파가 물러서고 따스한 볕살이 내리는 날이 이어지는 주말, 봄기운을 찾아 남녁 땅 여행에 나서기로 한다. 처음엔 남해안 섬으로 갈까 아니면 안동이나 영주 쪽으로 갈까 했는데, 결국 선운사가 있는 고창으로 마음을 정한다. 문득 오랜동안 선운사와 고창읍성(모양성)이 그립기도 하고 선운산을 오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 것이다.

 

고속버스를 타고 터미널에서 내려 군청 옆 어느 식당에서 갈비탕 한 그릇으로 점심 식사를 하고 가장 먼저 찾은 곳은 고창향교. 

 

고창향교는 고창읍 교촌리에 있다. 조선시대의 공립학교인 향교가 있는 마을은 보통 교동이라 불리는데, 고창향교가 있는 마을은 교촌이라 불린다. 바로 군청 뒤쪽에 있는 마을이다.

 

 

 

 

 

고창 군청의 동쪽, 초등학교 사이로 난 넓은 길을 따라 100여 m쯤 올라가면 오른쪽으로 길이 구부러지는 막다른 곳 정면 언덕에 따스한 볕바라기를 하고 있는 향교가 모습을 나타낸다.

 

 

 

 

 

담 너머로 정면에 보이는 건물은 강학 공간인 명륜당이다. 명륜당은 정면 5칸 본 건물에 동서로 2칸씩의 익랑(날개채)이 달려 있는 독특한 모습이다. 객사 건물에 많이 사용되는 양식이다.

 

 

비탈이 있는 지형에 맞추어 건물의 앞면은 높은 돌기둥 주춧돌 위에 올려져 있고 건물 뒷마당쪽은 마당과 닿아 있는 특이한 모양새를 보이고 있다.

 

 

 

 

 

향교 정문은 닫혀 있는 상태이다.

 

 

그러나 정문을 지나 명륜당의 동쪽으로 난 언덕길을 오르면 명륜당과 동서재로 둘러싸인 안마당으로 들어서게 된다. 언덕길을 오를 때에는 자연석을 질박하게 쌓아올린 명륜당 건물의 석축, 그 위에 올려진 잘 다듬은 돌기둥 주춧돌과 기둥이 조화롭게 늘어선 모습에 눈길을 줄 만하다.

 

 

 

 

 

 

안마당을 둘러싸고 앞쪽 낮은 곳으로는 강학공간인 명륜당, 뒤쪽 높은 언덕으로는 배향공간인 대성전, 그리고 동서로 기숙공간인 동재와 서재가 배치되어 있으며 서재 뒤쪽으로 또 하나의 재실인 양사재· 사마재가 보인다.

 

 

 

 

 

명륜당 마당에서 정면 언덕을 바라보면 얕은 산자락을 배경으로 내삼문과 대성전이 올려다 보인다. 내삼문은 꼭 잠겨 있어 출입을 할 수 없는데, 대성전에는 공자를 중심으로 중국 송대의 4현과 우리나라 18현을 모셔 놓고 배향하고 있다.

 

평지에 있는 향교(예를 들면 전주향교)에서 대성전을 앞쪽에 배치한 것과는 달리, 이곳의 향교는 산지형이라 가장 높은 곳에 대성전을 두었다. 이른바 '전학후묘(前學後廟)'의 배치이다. 어느 쪽이든 성현을 배향하는 대성전을 더욱 높이려는 뜻이 담겨진 건물배치인 것이다. 

 

 

 

 

 

 

대성전 동쪽 마당 끝, 서재 북쪽 언덕에 오래된 은행나무 한 그루가 지켜서서 향교의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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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향교에 은행나무를 심는 이유

 

공자가 곡부에서 제자들을 가르쳤던 은행나무 그늘을 행단(杏亶)이라 했는데, 이후 향교 등에서 가르침의 상징으로 은행나무를 심게 되었다. 또한 은행나무에 유교적 의미를 부여해 은행나무가 암수딴그루인 점으로 유교적인 음양오행의 도로 풀이하기도 하고, 또 열매에 하나의 씨앗이 들어 있는 것으로 '충성'과 '지조'의 상징으로 보기도 하며, 은행나무에 벌레가 없는 것으로 선비의 맑은 기품을 나타내기도 한다. 

 

 

 

공자의 위패를 모신 대성전은 정면은 3칸인데 측면이 한 칸 더 많은 4칸인 맞배지붕집이다. 공자를 비롯한 중국의 4성인 안자·증자)·자사·맹자와 중국 송대(宋代) 4현인 주돈이·정명도·정이천·주희를 배향하였다.

 

 

동·서벽에는 국내의 18현을 배향하는데, 동벽에는 설총·안향·김굉필·조광조·이황·이이·김장생·김집·송준길을, 서벽에는 최치원·정몽주·정여창·이언적· 김인후·성혼·조헌·송시열·박세채를 배향하였다.

 

 

 

 

 

서재 옆마당에서 바라본 명륜당 안마당. 오른쪽이 명륜당, 정면은 동재이다.

 

 

 

 

 

 

명륜당에서 서재쪽으로 향하면 또 하나의 마당이 열리며 '영사재'와 '사마재'라는 현판이 나란히 걸린 건물이 나타난다. 칠을 하지 않아 고졸스런 멋이 더욱 빛나는 건물이다.

 

 

 

 

 

 

진사시와 생원시를 합쳐 사마(양)시라 칭하는데, 생원, 사마재는 진사 등 사마시에 합격한 유생들이 모여 학문을 연마하던 곳이다. 흥학당이라 불리기도 한다.

 

사마시는 고려시대 과거의 예비 시험으로 국자감시, 또는 감시라고도 했다. 과거의 시험에 응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므로 소과라고도 하는데, 진사시 혹은 생원시를 합격함으로해서 과거에 응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과거 시험에 여러 가지 부정이 많았던 모양, 성호 이익은 다음과 같이 개탄하는 글을 남기고 있다.

 

요즘 세상의 사마시는 그 등급 높은 사람을 보면 시문의 우열이 있는 것이 아니라, 시관이 먼저 밀봉해 놓은 것을 떼어보고서 문벌이 좋고 명예있는 자를 가려서 우두머리로 삼는다. 그리고 또 반드시 미천한 자를 뽑아 생원의 제 3, 진사의 제 6을 만든다. 망족들이 모두 이 번호를 수치로 여기어 피하기 때문이다. 과제에 손을 쓰는 일이 어느 시대인들 없으랴만, 고금을 통하여 이와 같은 일이 있었다는 것은 듣지 못했으니, 이 폐습이 어느 시대로부터 일어났는지 알 수 없다.

近世司馬試 其高等人 則不以詩文之優劣 考官先閱封弥 擇其閥閱時譽者 爲首 又必取微賤者 爲生員第三進士第六 而望族皆羞避焉 科第容手 何代無之 亙古今亦不聞有似此者 不知此弊起自何代   <성호사설>

 

 

 

▼ 양사재에서 본 명륜당과 서재, 대성전 내삼문

 

 

 

 

 

 

고창향교는 고려 공민왕 때 월곡리에 있던 학당사(學堂祠)를 옮겨와 1512년(중종 7) 현재의 자리에 건립하였다고 한다. 1589년(선조 22) 중건하고 순종 때 현재의 대성전과 명륜당을 중수하였다.

 

고창향교는 이 지방의 향토사 연구에 필요한 많은 책을 소장하고 있다고 하며, 1984년 4월 1일 전라북도문화재자료 제98호로 지정되었다.

 

 

 

 

 

 

※ 전묘후학의 전주향교 => http://blog.daum.net/kheenn/15853904

※ 동학서묘의 청송향교 => http://blog.daum.net/kheenn/15856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