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산하와 문화재

오묘하고 고요한 절, 덕소 묘적사

모산재 2011. 2. 25. 15:44

 

 

'묘적사(妙寂寺)'란 이름을 배 선생으로부터 작년에야 처음 들었다.

 

'묘적(妙寂)'이라니... 오묘하고 고요한 절, 그 신비로운 이름이 가슴에 조용히 와 닿는다. 먼지 풀풀 날리는 세속으로 아주 멀리 떨어진 곳에 있어야 할 절, 그래서 세상에서 헝클어지고 지친 마음이 그곳에 머물기만 하면 차분히 가다듬어지고 다독여질 것만 같은 곳. 그런데 그 절이 서울 근교에 있단다.

 

남양주시 와부면 월문리. 덕소에서 얼마간 들어간 곳, 묘적산이라고도 하고 백봉이라고도 하는 산자락에 있는 절이다. 북쪽으로는 천마산과 마주 보고 있고 남동쪽으로 운길산과 예봉산이 건너다 보이는 첩첩 산중 백봉 산자락에 안겨 있다.

 

 

 

그 오묘하고 고요한 절을 분회 엠티 일정으로 이제야 찾기로 한다.

 

 

 

절도 절이지만 묘적사를 오르는 계곡이 아름답다는 말을 듣기도 하였는데, 그러나 월문리 삼거리에서 계곡을 따라 묘적사로 들어서는 계곡길에서 환상은 깨어지고 만다. 바로 입구 맞은 편 산언덕에는 커다란 골프연습장이 들어서 있고 계곡을 따라 무슨 음식점들이 그리도 빼곡이 들어서 있는지. '묘적'을 찾아나선 여행자에게 계곡은 '번잡'으로 맞이한다.

 

 

 

 

차는 산모퉁이길을 따라 구불구불 올라간다. 그리고 어느 새 '번잡'이 사라지고 '묘적'이 시야에 들어서고 있음을 느낀다. 보이지 않던 계곡이 비로소 시야를 채운다. 

 

 

 

전나무인가? 절집 앞에 늘어선 교목의 푸른 숲이 먼저 여행자를 묘적의 세계로 이끈다.

 

절 입구 1984년에 세운 묘적사중수비와 1931년에 세운 공덕비를 지나, 전나무 숲 사이로 난 나지막한 돌계단을 올라서면 농가의 행랑채처럼 낮고 길게 늘어선 소박한 건물 한 채가 나타난다.

 

 

천왕문이 있어야 할 자리로 보이는 이 건물은 천왕문이 아니라 주지스님의 처소인 다경실(茶經室)이다. 벽체를 돌을 쌓아 지은 건물인데 기둥은 다듬지 않은 거친 목재로 되어 있다. 절이라기보다는 산장에 온 듯한 느낌이다.

 

 

 

 

 

 

절마당으로 들어서는 통로에는 한지를 발라서 만든 선녀보살상이 연꽃 위에 서 있다. 무엇을 나타내려 한 것인지 알 수 없는데, 도교적이거나 무속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니 그야말로 또 하나의 '묘적'이다.

 

 

 

 

 

그리고 백봉 자락이 흘러내려 나지막한 능선을 이루는 곳에 포근히 앉은 대웅전이 나타난다. 대웅전 앞마당 가운데에는 알맞춤한 높이의 다층석탑이 하나 서 있고, 마당 양쪽으로는 석등이 보인다.

 

 

 

팔작지붕 추녀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 문제가 생긴 것인지 네 귀퉁이에는 멀대가 있어야 할 자리에 지지대를 받쳐 놓았다. 지은 지 그리 오래된 절이 아니건만 부목을 댄 환자처럼 보기에 안쓰럽다.

 

 

 

 

 

그리 흔한 형식이 아닌 대웅전 앞마당의 단탑 다층석탑의 모양새가 편안하고 정겹다.

 

 

 

여덟모로 된 탑신을 층층이 쌓아올린 형식이 월정사팔각구층석탑이나 수종사 오층석탑을 연상시킨다. 고려시대 탑 양식인데 조선 초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높이는 430cm라고 한다.

 

 

 

 

 

양주시 향토유적 제1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런데 탑의 층수가 특이하게도 7층이다. 3층이나 5층, 또는 9층으로 조성하는 탑의 형식에서 벗어나 있다. 그래서 이 탑을 묘적사팔각칠층석탑이라 부른다.

 

그러나 잘 살펴보면 탑의 3층과 4층 사이 체감률이 부자연스럽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다. 그리고 상륜부 아래 몇 개의 탑신도 사라진 듯 보인다. 증명이나 하듯 절 동쪽 30m 가량 되는 곳에 이 탑의 일부였던 것으로 보이는 탑재가 석등인 듯 쌓여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래서 이 탑이 본래 7층이 아니라 11층이 아니었을까 추정하고 있다.

 

탑은 팔각의 지대석 위에 하나의 돌로 만든 팔각의 2층 기단을 올렸다. 이 기단부의 조각이 소박하면서도 섬세하여 눈길을 끈다. 기단석의 위와 아래에는 마주보고 있는 연꽃문양(앙련과 복련)을 새겼다. 그리고 기단의 각 면에는 2구씩 안상(眼象)이 새겨져 있다.

 

팔각의 탑신에는 각 면마다 기둥이 표현되어 있고, 지붕돌은 하나의 돌로 만들었는데 3단으로 된 층급받침과 목조 건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기둥머리(柱頭)까지 표현되어 있다. 추녀는 각 모서리가 위로 살짝 들려 변화를 주었고, 끝에는 풍경을 달았던 작은 구멍이 남아 있다.

 

 

 

 

대웅전 안에는 불상 하나만 안치되어 있어 눈길을 끈다. 협시불이 없는 대웅전이라니, 이 또한 법당을 '묘적'의 분위기로 이끄는 듯하다. 어찌된 연유일까...

 

 

 

 

 

대웅전 처마 네 귀퉁이에 달려 있는 풍경이 또한 특이한 미감을 주지 않느냐...

 

 

 

 

대웅전 벽면에는 심우도(尋牛圖)가 그려져 있으니 한번 돌아볼 만하다. 방황하는 자신의 본심(소)을 발견하고 깨달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야생의 소를 길들이는 데 비유하여 10단계로 나누어 그린 그림으로 십우도(十牛圖)라고도 한다.

 

절마당에서 대웅전 오르는 계단 양쪽에 작은 석등이 있다. 그 돌기둥에는 묘적사의 의미를 조심스레 새겨 놓은 듯 각각 '묘음동지(妙音動地)', '법해만천(法海漫天)'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묘한 소리가 땅을 흔들고 법의 바다가 하늘을 적신다.'는 것이니, 깨달음(묘한 소리)과 부처님의 말씀(법)이 천지에 가득함을 나타낸 것이 아닐까 싶다.

 

 

 

절마당 양쪽에는 두 채의 요사가 있다.

 

두 건물 모두 정면 6칸의 팔작지붕 건물인데, 동쪽에 있는 요사는 마하선실(摩訶禪室)로 측면 2칸으로 되어 있고 서쪽의 요사는 측면 3칸으로 되어 있다. 이들 건물은 아래의 서쪽 요사에서 보듯 기왓장과 흙으로 쌓아올린 기단과 다듬지 않은 자연 목재 기둥 등에서 어디서도 느낄 수 없는 질박한 자연미에 빠져들게 한다.

 

 

 

 

 

 

묘적사의 요사는 모두 다섯 채이다. 대웅전 앞 마당 좌우 두 채와 다경실, 그리고 연못가에 별채가 있다. 그리고 최근에 템플 스테이용으로 대웅전 서쪽에 지은 목조 건물이 있다. 이 중 대웅전 절마당에 있는 세 채의 건물들은 모두 기둥이 특이한 형태로, 목재를 다듬지 않고 자연스럽게 휘어진 나무의 상태 그대로 세워 놓았다.

 

 

 

법당 주변을 돌아본 다음 이제 대웅전 서쪽 기슭에 조성해 놓은 산영각과 석굴법당으로 발길을 옮긴다.

 

 

 

그 길목에 템플스테이를 위해 최근 새로 지은 목조건물 요사채 한 채가 서 있다. 요사채 중 가장 반듯한 건물인데 단청을 하지 않은 소나무 목재의 결이 아름다워서 건물을 한 바퀴 돌아보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아름답게 짜여진 기둥과 보와 도리, 서까래 등의 목재 부재를 바라보는 즐거움, 전통 한옥의 아름다움에 절로 빠져든다.

 

 

 

 

 

건물 동쪽에서 올려다보이는 산영각

 

 

 

 

 

 

이 건물 뒤 산허리로 난 오솔길을 따라 오르면 낮은 계단 위로 아담한 문이 나타난다. 이 문을 들어서면 굴법당인 나한전이 나타나고, 그 옆 벼랑 끝에 산령각이 있다.

 

 

 

 

 

 

문으로 들어서자 가파른 절벽을 깎아 만든 좁은 절마당에 산영각과 나한전(석굴암)이 한눈에 나타난다.

 

 

 

 

 

산영각(山靈閣)은 산신각이라고도 하는데, 삼성각과 함께 우리 고유의 민속신앙을 포용하며 생긴 불교 문화다. 보통 절의 가장 뒤쪽이자 가장  높은곳에 자리잡고 있다.

 

이 산영각은 영험하다 하여 기도객이 많이 찾는다고 한다. 수락산 내원암과 함께 서울, 경기 일원에서 기운이 가장 좋은 곳으로 이곳을 꼽는다고 한다. 

 

 

그런데 이 문과 그 안으로 들여다보이는 산영각 건물은 최근 새로이 지은 것이다. 작년까지만 해도 아래와 같은 고졸한 모습이었는데, '묘적'의 한 장면이 사라져 버린 것이 아쉽게 느껴진다.

 

 

 

▲ 출처 : http://cafe.daum.net/myojeoksaTS/

 

 

 

1895년 김교헌이 쓴 '묘적산 산신각 창건기'에는 산신각을 창건하게 되기까지를 아래와 같이 기록하고 있다.

 

그 산은 청숙한 기운이 어리고 억센 형체로 뭉쳐 깊숙하고 기특한데 여덟 골짜기와 한 덩이 산이 특출하고 높이 솟았다. 그 아래의 고찰은 이름이 묘적사인데 4칸 10영으로 터를 다지고 지붕을 엎은 지 이미 백년이란 성상이 지났으나 산왕(山王)의 신상은 엄연히 벽 위에 그대로 있었다. 그러나 풍우를 가리지 못하여 나는 이를 추연하게 여겨 좁은 터를 개척하고 몇 칸의 집을 지어 봉안하는 처소로 삼으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몇 해를 넘기고 말았다. 다행히 금년 봄에 규오(圭旿)법사가 찾아와 간청하여 갑작스럽게 낙성을 고하게 되었다. 

其爲山也 鍾毓淸淑之氣 凝結磅 之形 幽邃奇傑 八谷一山 挺出峨立 其下古刹 扁曰妙寂寺 四間十楹 築土結茅 己閱百年星霜 而山王神像 儼在壁上 風雨不除 余乃 然 方欲拓半畝 數椽 以爲妥奉之所 而有志未就 遽經數稔矣 幸於今春 適因圭旿法師來懇 鳩財施 萃然告成

 

 

 

 

▼ 산영각의 외부와 내부

 

 

 

 

 

 

 

좁은 마당 안쪽 깎아낸 석벽에는 석굴 법당이 조성되어 있다. 이 석굴법당을 나한전이라고 부른다.

 

 

 

 

 

 

 

석굴암을 연상시키기도 하지만 본존과 후벽 감실에 여러 나한상을  모시고 있는 점은 확연히 다른 모습이다.16나한상이 아치형으로 배열된 감실에 모시져 있다. 그래서 이 굴법당이 나한전으로 불린다.

 

 

 

 

 

석굴 입구의 문기둥의 사자상

 

 

 

 

 

 

 

산영각과 석굴법당을 구경하고 되돌아나와 , 산영각 아래 서쪽 요사채 뒤에 조성되어 있는 작은 연못 영지(影池)와 별채 요사채가 있는 곳으로 향한다. 

 

 

 

아쉽게도 영지는 꽁꽁 얼어붙어 산영각의 그림자를 감추고 있다. 영지 가운데 앉은 불상이 시려 보인다.

 

 

 

 

 

 

아늑한 묘적산(백봉) 산자락 넓은 평지에 자리한 묘적사, 소박한 민가를 찾는 듯한 평화로움이 느껴지는 절이다. 대웅전을 비롯해 산령각, 나한전, 그리고 소박한 몇 채의 요사 등으로 이루어진 단촐한 가람의 전각과 탑은 여느 절과 다른 묘한 여운이 느껴진다.

 

 

 

묘적사에서 월문리 삼거리로 굽이굽이 흘러내리는 계곡이 원래의 모습을 회복했으면 얼마나 아름다울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입구를 짓누르는 듯 거대한 골프연습장이 특히 거북하고 난립한 음식점들도 계곡 밖으로 물러 섰으면 얼마나 좋을까...

 

 

 

마지막으로 묘적사를 노래한 시 한편을 읊조리며 호젓한 묘적사 여행을 마무리하기로 하자.

 

 

묘적사에는 세상의 모든 소리들이 산다. 저보다 크고 깊은 것을 품은 은행나무숲에는 은행잎 떨어지는 소리, 까치우는 소리, 물 내려가는 소리, 도란도란 영글어가는 상수리 소리가 숨어 있다가 은행잎만한 묘적사를 내려가는 물소리에 한번 헹구어내기도 하고 고추잠자리의 마노빛 나래로 팔각 칠층석탑을 한바퀴 휘돌아 마하선실에 하얀 고무신으로 내려놓기도 한다. 내 마음의 묘적妙寂을 깨우며 스쳐가던 풍경 소리와 오죽의 법도같은 흔들림과 꽃무늬의 문살에 수줍게 앉은 노란 햇살조차 이 산중에서는 넘치고 넘치는 맑음의 비유이지만 한 점 시간이 되면 누구의 허락 없이도 소리의 무게를 놓아버리는 묘적사의 깊은 고요야말로 선정에 든 환한 가을 경전이다. 가을 묘적사,윤향기,<정신과 표현>2003년 3, 4월호)

 

 

 

 

 

 

 

 

 

 

 

 

● 묘적사 개관

묘적사는 조계종 제25교구 본사인 봉선사의 말사로 7세기 말 신라 문무왕 때 원효스님이 창건하였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이를 뒷받침할 기록이나 유적은 남아 있지 않으며,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마을에 구전되고 있다고 한다.

태종무열왕의 둘째 공주인 요석 공주와 인연을 맺고 설총을 낳은 원효는 묘적사를 창건하고 머물게 되었다. 그런데 요석공주가 찾아와 마을에 머물며 원효를 만나기를 간절히 원했다고 하며, 그래서 지금도 그곳을 원터라고 부른다고 한다. 원효는 이를 피하여 소요산 자재암으로 떠났지만 결국 그곳에서 요석 공주를 만났다고 한다. 지금도 소요산에는 요석공주가 설총과 함께 살았던 곳으로 전해지는 요석궁지가 있다.

전하는 이야기로는 묘적사는 왕의 직속 비밀 요원을 양성하던 곳으로  선발된 승려들이 승려 교육과 함께 고도의  군사 훈련을 받던 곳이라고 한다. 임진왜란 때는 유정(惟政)이 승군을 훈련하는 장소로 쓰였으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 끝난 뒤에는 승려들이 무과 시험을 준비하는 훈련장으로 쓰였다고 한다. 절 앞 동쪽에는 넓은 공터가 있는데 화살촉이 자주 발굴되어 이곳이 당시 활터였음을 추정하게 한다.그러나 임진왜란 때 왜군의 집중 공격으로 폐허가 되었고, 경내에 민간인의 무덤이 들어설 정도로 폐사가 되었다고 한다. 대웅전에서 동쪽으로 20m 떨어진 곳에는 이제면(李濟冕)이라는 사람의 묘와 묘비가 있는데, 묘비가 세워졌던 1720년(숙종 46) 무렵에는 절이 거의 폐허화되었을 것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1895년에 규오(圭旿)가 산신각을 중건하고, 예로부터 전래되어온 산왕신상(山王神像)을 모셨다. 1969년 화재로 대웅전, 산신각 등이 불에 탔고, 1971년 자신(慈信) 스님이 요사채를 중건하였다.이후 1976년에 다시 대웅전을 비롯해 관음전과 마하선실을 중건하고, 1979년과 1984년에는 나한전과 산령각을 각각 건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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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묘적사 가람 배치도

 

 

 

 

 

 

※ 묘적사 찾아 가는 길

 

● 대중 교통을 이용할 경우
  덕소역에서 월문리 왕복 마을버스(30분 간격)를 타고 묘적사 계곡 입구에서 30여 분 걸어 올라간다.
  덕소에서 택시로 15분 정도 걸리며 7,000원 정도 든다.

● 승용차를 이용할 경우
  ① 강변북로 이용 : 서울 → 구리 → 양평 → 삼패삼거리(월문,화도방향) → 월문리 → 묘적사
  ② 외곽순환고속도로 이용 : 토평 IC, 남양주 IC → 덕소역 → 월문리(86번도로,마석방향) → 묘적사
  ③ 북부간선도로 이용 : 서울 → 구리 → 양정역 → 삼패삼거리(월문,화도방향) → 월문리 → 묘적사

● 무료 순환버스 이용할 경우
         8:40 묘적사 출발
     A. 8:55  덕소 현대 자동차

     C. 9:00  덕소역
     D. 9:06 우리 은행
     E. 9:10  현대I ’ PARK 
     F. 9:15 두산위브 <
       G. 9:18  도심역
       H. 9:25  묘적사 계곡 입구
     I.  9:30  묘적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