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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산하와 문화재

고창 (2) 신재효 고택, 판소리박물관과 동리국악당

by 모산재 2011. 3. 4.

 

고창 향교를 둘러본 뒤 왔던 길을 되짚어 나가 군청 맞은편 남쪽 산자락으로 보이는 고창읍성(모양성)으로 향한다.

 

고창군청 앞 네거리를 지나 고창읍내를 동서로 가로질러 흐르는 개천을 건넌다. 고창읍성으로 들어서는 길이 잘 정비되어 있음이 눈에 띈다.

 

 

다리를 건너자마자 만나는 느티나무. 서낭목이었을 나무가 아름다워 한참 올려다본다. 푸른 하늘에 펼치고 있는 가지의 모습이 수염뿌리처럼 섬세하다.

 

 

 

 

 

읍성으로 향하는 길은 황토색 콘크리트로 포장하고 소나무 가로수를 심었다. 산성에 어울리는 조경을 위해 애쓴 흔적이다.

 

그리고 다가서는 낯익은 고창읍성. 그리 높지 않은 산자락을 가만히 타고 오르는 성곽의 모습이 시야를 채운다.

 

 

 

 

 

고창읍성을 들어서기 전 꼭 들러야 할 곳이 나타난다. 바로 조선 후기 판소리 이론가로 판소리를 집대성한 동리(桐里) 신재효(1812∼1884) 선생이 살던 집이다.

 

볏집 이엉으로 용마름을 얹은 낮은 흙돌 담장, 일주문처럼 세운 일각문의 풍성한 초가지붕이 정겹고 아름답다. 가난의 상징인 초가풍경이 여행자의 마음을 풍성하게 해준다.

 

 

 

 

 

대문을 들어서면 뜻밖에 집 안마당이 아니라 뒷뜰로 들어섰음을 금방 알게 된다. 우물이 먼저 보이고, 다음으로 보이는 초가집 한 채. 본채는 사라지고 사랑채만 덩그러니 남았다.

 

850년에 지었다고 알려지고 있는 동리 고택에는 원래 안채와 연당 정자 행랑채 장례당 등이 있었다고 한다. 이곳에서 신재효 선생은 1884년(고종 21) 여생을 마칠 때까지 살았다고 한다. 

 

 

 

 

 

동리정사(桐里精舍>)라고도 불린 사랑채는 일가 친척이나 기생 광대 수습생들이 머물던 처소 등 50여 가구가 한울타리를 이룬 공동체 생활의 장소로 당대 문하생들로 문전성시를 이룬 곳이다.

 

 

사랑채 건물은 정면 6칸, 측면 2칸의 일자형 주택이다. 건물 맨 왼쪽에는 부엌이 있고, 그 오른쪽으로 방 2칸과 대청 1칸이 이어지고, 그리고 맨 오른쪽으로 방 2칸을 터 한 칸으로 만든 방이 있다.

 

부엌을 뺀 나머지 5칸에는 반칸 툇마루를 두었다. 부엌과 방 사이에 쌍여닫이 출입문이 있고, 중앙의 대청에서 양쪽 방으로 연결하는 문이 달려 있지 않은 특이한 구조로 눈길을 끈다.

 

 

 

 

 

방에는 선생이 제자들을 가르치는 장면을 재현해 놓았다.

 

신재효는 이곳에서 노래청을 마련하여 많은 명창을 가르치고 후원하였으며, 판소리 여섯 마당을 정리해 내었다. 그가 정리한 춘향가, 심청가, 박타령, 가루지기타령, 토끼타령, 적벽가 등 모두 여섯 마당의 판소리 중 가루지기타령은 내용이 너무 음탕하다는 이유로 부르기를 꺼려 가락이 잊혀지고, 현재 다섯 마당만 전해 오고 있다.

 

 

 

 

 

1899년 선생의 아들이 고쳐 지었던 이 건물은 한때 고창 경찰서의 부속 건물로 쓰이었다고 하며, 그 과정에서 많이 개조되고 변형되었던 것을 복원 수리하여 1979년 중요민속자료 제39호로 지정되었다.

 

 

사랑채 앞쪽(남쪽) 마당 앞에는 판소리박물관으로 연결되는 문이 있다.

 

 

 

 

 

 

■ 판소리박물관

 

 

판소리를 중흥시킨 신재효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1998년 개관하였다. 2층 건물에는 신재효의 유품과 고창 지역의 명창, 판소리 자료 등 총 1,000여 점을 전시하고 있다.

 

전시실은 소리마당과 아니리마당 등 5개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소리마당에는 판소리의 기원과 판소리 시연 모형, 판소리 계보 등이 전시되어 있고, 아니리마당은 신재효·진채선·김소희 등 이 지역 출신 명창들을 소개하고 있다. 가사집과 국악 관련의 음반·서적 등 희귀한 전시물도 많다. 발림마당에서는 북과 북채로 영상에 맞춰 직접 소리를 흉내낼 수 있으며, 혼마당에서는 소리를 주제로 한 영화를 관람할 수 있다.

 

박물관 2층에는 진환의 서양화와 김옥균의 친필, 김정희의 간찰 등 80여 점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 동리국악당(桐里國樂堂)

 

 

신재효 고택과 고창읍성 사이의 넓은 터전에는 동리국악당이 세워져 있다. 선생의 문화적 업적을 계승하고, 판소리 전승의 맥을 이어가기 위하여 설립한 국악공연장 겸 국악교육장이다.

 

1990년 12월 31일에 건립되었으며, 지하 1층·지상 2층 규모로, 공연장과 분장실·연습실·연수실(4실)로 이루어져 있다. 판소리와 각종 국악 공연은 물론, 판소리반·시조반·대금반·가야금반·농악반(고창우도농악) 등상설 국악교실을 운영한다.

 

 

 

 

 

 

 

고창읍성에서 내려다본 고창읍 풍경. 앞쪽으로 동리국악당, 동리 신재효 고택, 판소리박물관이 자리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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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리(桐里) 신재효(申在孝)에 대하여

 

판소리 문학의 이론가, 연출가이자 광대의 지휘자라는 평을 듣고 있는 신재효 선생은 1812년에 신광흡의 1남 3녀 중 외아들로 이곳 읍내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한학을 배워 <사서삼경> <제자백가어(諸子百家語>)>에 능통하였다. 

동리 신재효는 애초 소리꾼이 아니라 재산이 넉넉한 중인 출신이었다.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부를 기반으로 1850년까지 치산(治産)에 솜씨를 보여 많은 가산을 모았고 가산이 넉넉해지자 판소리의 발전에 남다른 애정을 쏟아 판소리 명창들을 후원하는 한편, 판소리 연구에 몰두하였다.

그는 종래 계통없이 불러 오던 광대소리를 통일하여 토끼타령, 박타령, 심청가, 적벽가, 춘향가, 가루지기타령 등 판소리를 6마당으로 체계를 세우고 판소리 사설을 정비했다. 특히 박타령, 토끼타령 등은 창극화까지 하였으며, '광대가(廣大歌)' '도리화가(桃李花歌)' 등의 판소리 단가와 판소리 가집(歌集)인 <신오위장본>(申五衛將>本)> 등의 작품을 남겼다.

동리와 얽힌 재미난 에피소드 중의 하나가 <도리화가>라는 노래에 담겨 있다. 이 노래는 제자이면서 애인이었던 진채선이 대원군의 인정을 받아 운현궁의 기생이 되어 돌아오지 못하자 그이를 그리면서 지은 것이다. 또한 판소리 연구학자들은 동리 선생이 귀명창이었다고 평한다. 실제 소리는 못했으나 소리를 이해하고, 사설과 소리의 궁합을 맞출 정도로 뛰어난 음악적 소양을 지닌 인물이었다는 것이다.

문하에서 김세종 ·전해종 ·진채선 ·허금파 등 많은 명창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