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산하와 문화재

청송 (3) 동학서묘의 청송 향교, 웅장한 청아루

모산재 2012. 11. 19. 10:46

 

용전천의 우뚝한 바위 절벽 위에 선 아름다운 정자, 망미정과 우송당을 돌아보고 바로 청송향교로 향한다. 

 

망미정 골목길로 들어서다가 어느 교회 곁에 예스런 맞배지붕집이 있어 웬 건물인가 하고 살펴보니 청송심씨와 앙숙이 되었던 파평윤씨 화수횐지 하는 팻말이 걸려 있다. 문은 굳게 닫혀 있고...

 

 

 

 

 

 

 

읍사무소를 왼쪽에 끼고  군청으로 향하는 길, 오른쪽 민가 옆에 동서로 길게 늘어서 있는 향교 건물이 시야에 들어온다. 

 

 

 

 

 

담장 앞으로 콘크리트 옹벽을 두껍게 쌓아 만든 진입로가 다소 옹색해 보인다. 길 밑에는 너른 밭이 있는데, 옛모습도 이러지는 않았을 텐데 어떠했을는지...

 

 

 

 

 

 

정보를 찾아보니, "묘의 남문 밖에는 넓은 공간이 있고 그 정면에 외대문(外大門)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고, 문묘 제례에 사용되던 주사(전사청)가 외대문안 서쪽에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고 써 놓은 글이 보인다. 

 

담장 안 앞쪽으로 넓은 공간이 있는 걸로 봐서 이곳에 그런 전각들이 있었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왼쪽으로는 대성전(大成殿)과 동·서무가 있고, 오른쪽에는 명륜당(明倫堂)과 동·서재가 배치되고 있어 좌묘우학(左廟右學), 또는 서묘동학(西廟東學)의 배치 양식을 보이고 있다. 이는 전묘후학의 일반적 배치 양식과는 다른 특징이다. 

 

 

명륜당 앞쪽에는 '청아루(靑莪樓)'라는 현판을 단 커다란 2층 누각이 자리잡고 있다.

 

 

 

 

 

 

청아루(菁莪樓)라니! 무슨 뜻인가...

 

찾아보니 '청(菁)'은 '우거지다'는 뜻과 '순무'라는 뜻을 가진 말이고, '아(莪)'는 '쑥'을 뜻하는 글자다. 따라서 '청아'는 '우거진 쑥'이라는 뜻일 터.  

 

그런데 '청아(菁莪)'는 <시경(詩經)> '소아(小雅)'의 '청청자아(菁菁者莪)'라는 시에서 유래한 말이라 하는데,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菁菁者莪(청청자아) 무성하다, 다북쑥
在彼中阿(재피중아) 저 언덕 안에 있구나.
旣見君子(기현군자) 군자님을 뵈었으니
樂且有儀(악차유의) 즐겁고 위엄이 있구나.
菁菁者莪(청청자아) 무성하다, 다북쑥
在彼中沚(재피중지) 저 모래톱 안에 있구나.
旣見君子(기현군자) 군자님을 뵈었으니
我心則喜(아심칙희) 내 마음은 기쁘도다.
菁菁者莪(청청자아) 무성하다, 다북쑥
在彼中陵(재피중릉) 저 구릉 안에 있구나.
旣見君子(기현군자) 군자님을 뵈었으니
錫我百朋(석아백붕) 내게 많은 돈을 주었구나.
汎汎楊舟(범범양주) 둥둥 떠가는 버드나무배
載沈載浮(재침재부) 잠겼다 또 떠는구나.
旣見君子(기현군자) 군자님을 뵈었으니
我心則休(아심칙휴) 내 마음 편안하도다.

 

 

 

군자를 만나는 즐거움을 노래한 시인데, 특히 마지막 장은 도도한 물결을 헤치며 배가 뜨게도 싣고 잠기게도 싣는 스승의 모습을 비유한 표현이라고 본다. 이로부터 '청아'는 무성한 쑥과 같은 인재나 그 인재를 교육하는 일을 뜻하는 말이 되었다.

 

 

 

 

 

 

청아루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2층 누각으로 1700년 청송부사 이상훈이 증축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1959년 사라호 태풍으로 파손되어 청아루는 비가 샐 정도로 퇴락하였던 것을 1962년 대성전의 동무와 서무를 철거하면서 그 자재로 보수하였다고 한다.

 

 

청아루는 한때 청송중학교 임시교실로 사용된 적도 있었다고 한다.

 

 

 

 

 

청송향교는 1426년 청송부사로 부임한 정지아가 마을의 북쪽 5리, 굴동이라 불리던 방광산에 창건하였다.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것을 청송도호부사로 부임한 퇴계 이황의 손자 이영도가 대성전을 중창하였고, 1629년(인조7) 부사 이문증이 다른 곳으로 옮겨 동재와 서재, 강당, 주사를 중수하였다. 그러나 1695년 부사 이문징이 지세가 맞지 않아 현 위치인 월막리로 다시 이건하였다고 한다.

 

1869년 부사 윤현기가 대대적인 개수와 보수를 하였고, 1962년 동무·서무를 철거하고 청아루를 보수하였으며, 1975년 대성전을 보수하였다. 

1992년 청송을 방문한 정주영 회장의 후원으로 명륜당과 동·서무, 주사를 신축하고 대성전과 청아루를 보수하여 비로소 청송향교의 면모가 갖추었으며, 2001년부터 추진된 유교문화권 관광자원화 사업의 일환으로 새롭게 단장되었다.

 

 

 

 

명륜당동서재는 강학공간이다.

 

청아루에서 한 단 올라선 위치에 동재와 서재가 있고, 거기서 또 한 단 올라선 곳에 명륜당을 세워 위계를 두었다.

 

 

 

 

 

명륜당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집으로 대청이 9칸, 동협실 1칸반, 서협실 1칸 반으로 구성되어 있다.

 

 

 

 

 

명륜당 내부

 

 

 

 

 

 

 

 

유생들이 거처하던 동재와 서재는 각각 3칸짜리 맞배지붕집이다.

 

 

 

 

 

 

배향공간인 대성전은 강학공간인 명륜당 서쪽에 자리잡고 있다. 하지만 문이 닫혀 있어 아쉽게도 내부를 살펴볼 수 없었다.

 

 

 

 

 

현재의 위치로 이건한 뒤 청송향교는 수차례의 개축과 보수를 거치면서 건축적인 변모를 많이 겪었다. 특히, 임진왜란 뒤 중창한 대성전은 상부 가구나 살미의 모습에서 17세기 무렵의 모습을 많이 가지고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담장 너머로 바라본 대성전

 

 

우리의 선현만 모시는 서원과는 달리 향교의 배향공간인 대성전에는 공자를 비롯한 안영 증자 자사 맹자 등의 5성(五聖), 정호와 주자 등 송조(宋朝) 2현 등 중국의 성현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고, 동서무에는 설총 최치원 안유 정몽주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 송시열 송준길 박세채 등 우리 나라 16현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 전학후묘의 산지형 향교, 고창향교 => http://blog.daum.net/kheenn/15854089

※ 전묘후학의 평지형 향교, 전주향교 => http://blog.daum.net/kheenn/158539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