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산하와 문화재

경주 남산 (17) 탑곡 마애불상군 남면/동면, 탑곡 삼층석탑

모산재 2011. 1. 4. 23:21

 

쌍탑이 보이는 부처바위 북면에서 왼쪽으로 돌아서면 가파른 비탈을 따라 동쪽을 바라보는 바위벽이 나타난다.

 

 

 

바위는 모두 셋이 나란히 키 순으로 서 있는데, 비탈을 오를수록 바위는 점차 작아진다. 절리로 틈이 벌어진 오른쪽 큰 바위만 사면에 불상이 새겨진 사방불이고, 나머지 두 바위는 한쪽 면에만 불상이 새겨져 있다.

 

 

 

● 동면 - 서방 극락정토

 

 

동면은 모두 세 개의 바위로 구성되어 있다. 부처바위에서 가장 넓은 면으로 장엄한 극락정토의 모습을 가장 화려하게 새겼다. 바위 높이 7.3m, 폭 12.m 규모이다.

 

넓은 바위면에는 중심이 되는 불상과 보살상, 이 불상을 향해 공양 올리는 스님상, 꽃쟁반을 들고 꽃을 뿌리거나 합장하며 하늘에서 내려와 솟구치는 모습 등을 한 여섯 비천상이, 가운데 바위에는 두 그루의 나무 아래에 선정(禪定)에 든 스님상, 세번째작은 바위에는 불국문을 지키는 금강역사상 등이 새겨져 있다.

 

 

 

 

 

셋으로 나뉘어진 바위면에는 모두 13구의 불상과 보살상이 새겨져 있다.

 

넓은 바위에는 삼존불좌상이 있고 그 둘레에 여섯 비천상이 있으며, 그 아래는 본존을 향하여 염불하는 승려상(僧像)이 그려져 있다. 그리고 왼쪽에는 보리수 아래에서 참선하는 승려상이 있다.

 

또한 이 그림에 나타나지 않은 가장 왼쪽의 작은 바위에는 삼지창을 든 금강역사상(神將像)과 얼굴을 옆으로 보며 앉은 승려상이 있다.

 

발견된 조상은 여래상 1, 보살상 2, 승려상 3, 신장상 1, 비천상 6, 가릉빈가상 1, 수목 2 등으로 부처바위에서 가장 조각이 많은 면이다.

 

<삼존불> 넓은 바위면에 삼존불이 새겨져 있는데 본존불의 오른쪽 협시보살은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마모되었고, 왼쪽 협시보살은 본본불을 향해 얼굴을 돌리고 있다.

 

본존여래상은 커다란 연꽃 위에 부드러운 모습으로 앉아  있다. 가늘게 휘어진 눈썹, 갸름한 코, 하현달 같이 새겨진 두 눈엔 화사한 웃음이 감돌고 있다. 한없이 부드러운 두 뺨,꼭 다문 작은 입술, 그 언저리에서 맑은 웃음이 피어 나온다. 둥그스름한 머리 위에 육계가 솟아 있고 정면으로 가르마를 탄 머리카락들이 양 귀 언저리에서 곱게 처리되었다. 가장자리에 구슬을 늘인 둥근 두광에는 햇살같이 연꽃이 새겨져 있다.

 

 

 

 

 

부처님들의 대좌 밑에는 옷자락이 장막처럼 드리워져 있는데, 그것이 마치 구름처럼 느껴지며 본존상과 보살상이 구름 위에 조용히 내려오는 듯 보이는 것도 아름답다.

 

 

 

본존여래의 왼쪽에 있는 보살은 두 손을 들어 가슴 앞에 합장하고 얼굴은 본존여래 쪽으로 돌리고 있다. 본존보다 작은 체구로 작은 연꽃에 앉아 있다. 머리에는 보관을 썼고, 두 어깨에는 천의가 덮여져 있다.  연꽃을 새긴 두광은 머리 뒤에 배치되었고 왼쪽 무릎아래 꽃 접시 같은 것이 놓여 있다.

 

 

 

 

 

오른쪽 보살은 마멸이 심하여 그 모습을 전혀 알아보기 어렵다. 협시보살이 아니라 비천상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본존여래상 둘레와 머리 위에는 하늘에서 날아오는 여섯 비천이 새겨져 있다. 혹은 꽃을 뿌리며, 혹은 꽃접시를 들고, 혹은 합장하고 부처님을 향하여 찬미하는 모습들인데, 옷자락들이 하늘 위로 길게 나부끼고 있어 천녀가 나는 모습이 실감 있게 표현되었다.

 

 

 

 

 

 

 

암벽 북쪽 아랫부분에는 네모난 방석에 앉은 스님이 향로를 받들고 공양하며 열심히 염불하는 모습이 새겨져 있다.

 

 

 

 

 

가운데 작은 바위면에는 보리수와 사라수로 보이는 두 그루의 나무 아래 결가부좌로 앉아 명상에 잠겨 있는 스님상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맨 왼쪽의 셋째면은 높이 4m 가량 되는 기둥 바위인데, 이곳에도 동쪽을 바라보며 명상에 잠겨 있는 스님상이 새겨져 있다.

 

 

 

 

 

 

동면 바위 앞은 급경사로 되어 북쪽은 낮고 남쪽은 높다. 남쪽을 향해 비탈을 오르면 셋째면 기둥바위가 나타나는데 이곳에 금강역사상이 새겨져 있다.

 

이 기둥 바위를 지나면 동면 불상이 있는 법당터로 들어서게 되니(뒤쪽으로 동면의 삼존불이 보인다), 이 기둥바위는 인왕문의 역할을 하는 셈이 된다. 그래서 옛날에는 맞은 편에 긍강역사상을 새긴 한 개의 돌 기둥이 더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지금은 없다.

 

 

 

 

 

 

무서운 얼굴을 동쪽으로 돌리고 오른손에 키보다 더 큰, 사지창 모양의 세 갈래 금강저(金剛杵)를 들고 왼손은 주먹을 쥐어 가슴에 올린 상이다. 마멸이 심해 확실하게 알 수 없으나 철갑으로 무장한 상인 것으로 추정된다.

 

 

 

 

 

금강역사상이 새겨진 돌기둥을 지나 마당으로 올라서면 왼편 소나무 숲 쪽으로 높이 솟은 삼층석탑이 보이고 유턴하면 부처바위 동면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 남면 - 채색된 부처님과 불국토

 

부처바위의 남면은 바로 앞에 큰 바위들이 늘어서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흙으로 덮인 평탄한 마당이다. 북면에서 보았던 바위 윗부분만이 지상으로 2.7m 정도 높이로 드러나 있는데, 그 앞에는 커다란 바위덩이들이 여럿 놓여 있다.

 

 

 

부처바위 동면은 너비 6m 가량인데 가운데가 갈라져서 두 개의 벽면으로 병풍처럼 놓여 있다. 이 바위면에 새겨진 붉은 빛이 감도는 삼존불이 보이고 그 앞에는 뭉뚱하게 마모된 듯한 여래입상이 서 있다. 그리고 맨 앞의 바위 앞으로 향한 면석에는 스님상이 새겨져 있는 것이 보인다.

 

 

 

그리고 바로 옆에는 석등 받침돌이 있으니, 삼존불과 여래입상과 삼층석탑과 등이 함께 어우러져 있어 법당이 있던 곳임을 느끼게 된다. 궁금하다, 천년 전의 이 곳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스님상> 맨 앞의 낮은 바위에는 스님상이 얕게 부조되어 있다. 나무 아래 가부좌를 틀고 눈을 살며시 감고 명상에 잠겨 두 손을 모은 채 석탑 쪽을 향하고 있다.

 

 

 

소나무 숲그늘에 명암이 어른 거리는 스님의 상이 마치 고요한 물에 비친 거울 이미지처럼 신비롭기만 하다.

 

 

 

 

 

 

 

바위덩이들 너머로 부처바위 남면의 동쪽으로는 직사각형의 감실(龕室)을 마련하여 삼존불을 조각하였다. 불상은 특히 본존불에 붉은 채색이 짙게 남아 있는데 채색불의 흔적으로 보인다. 감실여래좌상이나 삼릉계곡 마애관음보살상, 칠불암 불상 들에도 이런 흔적이 있지만, 이곳의 채색은 특히 두드러진다.

 

 

오랜 세월의 풍화로 세부 표정을 살피기는 쉽지 않지만, 불상은 근엄하기보다는 천진난만함이 묻어난다. 웃음띤 얼굴과 어깨의 선이 부드럽고, 왼쪽 보살은 본존불 쪽으로 다정한 귓속말을 듣는 듯 몸을 기울이고 있어  훈훈한 생동감이 느껴진다. 어떤 분은 이런 모습을 "부처라기보다 화목한 가정을 연상케 한다."며  "부모 모시듯 부처를 섬기던 우리 계레의 신앙 모습"이라고 풀이하기도 했다.

 

 

 

 

 

 

그런데 여기서 잠깐! 이 삼존불상이 새겨진 바위와 감실의 모양에 주목해 보기로 한다.

 

얼핏 바위가 <어린왕자>에 나오는 모자 모양에 감실은 코끼리를 닮았다는 느낌이 들 것이다. 아마도 이 불상을 조성했던 석공도 감실을 만들며 코끼리를 의식하고 새기지 않았을까.

 

만일 그렇다면 의도적인 형상화한 조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코끼리는 잘 알다시피 석가모니 싯다르타의 탄생 설화에 나오는 동물이다.

석가는 도솔천(兜率天)에서 내려와 마야부인의 꿈에 흰코끼리로 나타나 오른쪽 옆구리에서 태내로 들어간다. 마흔 다섯의 나이로 임신한 마야부인은 출산을 위해 룸비니동산을 가던 중 석가는 오른쪽 겨드랑이 아래로 나와 탄생하였다고 한다. 마야부인은 싯다르타를 낳은 뒤 이레만에 세상을 떠난다.

 

석가모니와 마야부인, 코끼리에 얽힌 이 설화를 통해 이 감실 속에 들어 있는 주존불은 마야부인의 뱃속에 코끼리로 화신한 석가모니의 모습으로 보는 것은 어떨까. 그리고 여기서 좀더 상상력을 비약시켜 보기로 하자. 마야부인은 싯다르타의 어머니이기도 하지만 진평왕의 부인이자 선덕여왕의 어머니이기도 하다. 이렇게 본다면 이 부처바위의 조성이 선덕여왕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게다가 북면에 새겨진 9층탑과 선덕여왕 때 세워진 황룡사탑은 우연한 일치로만 볼 수 있을까.

 

역사에 문외한인 여행자지만 이런 저런 상상을 하는 즐거움을 버릴 수는 없다. 그러고 보니 삼존불 한쪽 곁에 서 있는 저 풍만한 여래입상은 자식을 얻으려는 사람들의 간절한 소망을 들어주기 위해 천년 세월을 지켜 오고 있지 않은가. 불교 설화와 자식을 얻으려는 민간 신앙의 행복한 결합, 그것이 저 여래입상으로 구현된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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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운데 본존상은 큰 연꽃위에 앉아 계시는데 옷자락이 무릎 아래로 물결치는 듯 주름 잡혀 있다. 이러한 옷자락을 상현좌(裳懸坐)라 한다.

 

몸체는 단정하고 두 무릎은 넓게 놓여 있어 자세가 평안하다. 얼굴은 마멸이 심하나 밝은 표정이다. 둥근 두광에는 햇살같이 연꽃이 새겨져 있어 밝은 얼굴에 생기를 더해주고 있다. 두 손은 다른 상들과 같이 옷자락에 가려져있다.

 

두 보살들은 바위에서 뻗어 나온 연꽃 줄기에 탐스럽게 핀 연꽃 줄기에 앉아 두 손을 마주 합장하고 본존 여래상 쪽으로 얼굴을 돌리고 있다. 오른쪽 보살이 본존불 가까이에 단정히 앉아 있는데 비해 왼쪽 보살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어깨를 본존불 쪽으로 기울여 응석을 부리는 듯한 천진스러운 자세다. 엄숙한 부처님의 세계라기 보다는 단란한 한 가정을 연상케하는 화기에 찬 분위기다.

 

 

 

<나한상> 여래입상의 뒤쪽, 삼존불의 서쪽 삼각형 바위에 얕은 감실을 파고 좌상으로 새겨져 있다. 얼굴은 갸름하고 두광도 없고 연화대좌도 없어 선정(禪定 : 한마음으로 사물을 생각하여 마음이 하나의 경지에 정지하여 흐트러짐이 없음)에 든 스님상으로 보인다.

 

 

 

 

 

<여래입상> 삼존불 앞 한 귀퉁이에 서 있는 여래입상은 사각 기단 위에 서 있는데 높이 2.2m에 달한다. 대석(臺石)에는 발만 새기고 발목 이상은 한 돌로 되어 있다.

 

 

 

 

 

항마촉지인의 수인을 하였는데 왼쪽 손은 배를 잡고 있는 듯하여 예로부터 안산불(安産佛)로 신앙되어 왔다. 증명이나 하듯이 여래입상 앞에는 작은 배례석이 놓여 있는데, 아이를 얻고자 하는 사람들은 이 바위에 돌이 달아 없어질 때까지 문지르면서 아이를 낳아 달라 빌었다.

 

 

불상의 얼굴 부분과 두광이 많이 파괴되는데, 윤곽은 복스런 둥근 얼굴을 하고 있다. 불상의 세부는 생략되어 간결한 모습을 하고 있으며, 어느 방향에서 보나 입체감이 살아 있어 싱그러운 양감이 흘러 넘친다.

 

 

 

 

 

목에는 세겹으로 주름이 새겨져 있고, 어깨는 넓고 가슴은 부풀어 나왔고 허리는 가늘다. 가는 허리에서 곡선을 그리며 풍성한 엉덩이를 이룩하고 기둥같은 두 다리로 선은 이어진다. 통견(通肩)으로 입은 가사 주름이 배 앞에서 세줄로 가로 그어져 복부의 형태를 꾸며주고 자연스럽게 두 다리로 흘러 내려 허벅다리와 무릎의 형태를 암시하고 있다.

 

 

이 여래입상은 독립적인 불상으로도 우수한 조각품이지만, 남쪽면 전체로 볼 때 여래입상의 공간미는 더욱 뛰어나다. 마애불로 삼존불을 새겨놓고, 굳세고 풍성한 입상을 세움으로서 여러 바위면에 활기를 보태어 전체의 분위기에 생동감을 넘치게 하는 효과를 준다.

 

 

 

부처바위는 우리 나라 최대의 마애불상군으로 그 내용과 다채로움에서도 최고를 자랑한다. 불상과 보살, 나한과 승려, 석탑과 비천 등 온갖 불상들이 만다라적 기법으로 새겨진 화엄세계, 경주 남산에 깃든 신라인들의 신앙심이 종합적으로 구현된 불국토, 그것이 부처바위가 아닐까 싶다.

 

 

 

 

 

※ 부처바위(탑곡 마애불상군)의 조성 시기에 대한 논란

 

 

<7세기로 보는 견해>

 

부처바위라고도 불리는 탑골 사방불암은 신라시대 사방불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내용이 다양하다. 이 곳에서는 많은 기와조각과 무늬막새가 벌견되었는데 목조건축이 있었음을 추정해 볼 수 있다. 그리고 일제강점기 신인사(神印寺)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는 기와를 발견한 것을 근거로 신인종(神印宗)을 개종한 7세기를 부처바위의 주성 시기로 추정하기도 한다.

 

또한, 옷자락이 손을 가리고 있는 점, 연꽃 잎이 넓게 표현된 점, 자유스럽고 천진한 모습 등은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특색으로서, 중국 남조 불상 양식이 백제를 통해 전해진 것이라 추정하고 있다. 특히 여성적으로 경사진 부드러운 어깨 선은 신라불상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하현달 모양으로 새겨진 눈에 웃음이 어려 있다는 점(8세기 이후 부처님들은 입가에만 웃음이 있다.), 여래상의 가슴에 비스듬히 승기지(가슴을 가리는 옷)가 그려져 있다는 점, 군(裙 ; 치마)을 동여맨 옷끈 매듭이 부채살처럼 나타난다는 점, 상현좌(裳懸座)의 모습이 중국 남북조시대 후기(494∼534)의 오래된 양식이고 일본에서도 이러한 양식은 7세기에 유행했다는 점, 금강역사가 무장한 모습이나 금강저를 들고 있는 모습은 고식에 나타나는 양식이라는 점 등등이 7세기로 보는 근거들이다.  

 

 

<9세기로 보는 견해>

 

한편 8세기로 보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북면에 조각된 쌍탑은 통일기 쌍탑가람배치의 구조를 받아들인 것이다. 불상조각이 삼국기의 단순 소박한 조소성(彫塑性)이 결여되어 있으며 고졸(古拙)의 미(美)와도 거리가 멀다. 남쪽에 있는 삼층석탑의 존재, 불상들의 윤곽선 강조, 평면부조에 추상적 옷주름의 선적(線的)처리, 자유분방한 회화적 구성과 도상의 배치, 많은 부분의 치졸한 조각수법 등은 통일신라의 전성기 이후의 조각양식이다.

 

북쪽과  동쪽은 주위 지표가 매우 낮아 바위와 낭떠러지를 이루는 반면, 서쪽과 남쪽은 지표가 높아 바위의 높이가 나지막하다. 사방불 서쪽에는 또다른 바위들이 있고 그 바위 아래는 축대를 이중으로 쌓음으로써 사방불암 서남쪽 안으로 넓은 지표면을 마련하였다. 따라서 지형적으로 동향건물이 들어설 만한 평탄면이 주어져 있다. 삼층석탑 안쪽의 넓은 평탄면인 부처바위 남쪽에는 건물 기단이나 건물 외곽에 들었음직한 "ㄱ"자형 석축(동서 길이 1,350cm 남북 길이 1,210cm) 1단이 일부 남아 있어 건물이 들어섰을 당시를 충분히 짐작하게 한다. 더욱이 주변에는 통일신라시대의 평기와 조각이 흔히 눈에 띄기도 한다.

 

 

 

 

 

마애조상군 바로 앞 남쪽에는 삼층석탑이 서 있다. 1977년 문화재청에서 복원한 탑인데 비지정문화재로 남아 있다.

 

 

 

■ 탑골 삼층석탑 / 비지정문화재

 

높이 4.5m. 부처바위 남쪽 둔덕 위에 세워져 있다. 단층기단 위에 서 있는 삼층석탑으로, 옥개 받침도 3단으로 되어 있고 새긴 솜씨도 둔박하여 통일신라 말기 또는 고려 초기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낙수면의 급경사 및 둔탁함은 안동 봉정사 극락전 앞의 삼층석탑과 유사한 조각 기법이 보이고 있어 더욱 그렇다.

 

 

낙수면 모서리에 추녀마루가 새겨져 있고 그 끝머리에 구멍이 뚫어져 있다. 구멍을 이용하여 풍탁을 달았으나 지금은 없어졌다. 높이가 4.5m밖에 되지 않지만 높은 언덕 위에 솟아 있으므로 멀리서도 잘 보인다. 불국정토의 등대인 양 드높게 솟아 있기에 사람들은 이 계곡을 탑골이라 불러왔다.

 

 

 

 

 

 

부처바위를 구경하고 다시 골짜기를 내려가 불곡 감실여래좌상을 향한다. 계곡 입구 월정사에서 서쪽 산 언덕으로 오르면 새로 발견된 마애불상군이 있다고 하는데, 생략하기로 한다.

 

 

벌써 어느덧 점심 시간을 훌쩍 넘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