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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산하와 문화재

고창 (3) 고창읍성(모양성) 공북루-척화비-향청-관청-작청-풍화루

by 모산재 2011. 3. 6.

 

고창읍성은 고창읍의 남쪽 성주봉인 장대봉(108m) 산자락 좌청룡 우백호의 지세를 최대로 이용하여 축조한 성곽이다. 모양성(牟陽城)이라고도 부르는데, 백제 때 고창 지역이 모량부리로 불렸던 것에서 비롯된 이름이라고 한다. 나주진관, 장성 입암산성 등과 더불어 왜적의 침입을 방어하는 호남의 요충지로, 단종 원년(1453)에 세워진 것이라고도 하고 숙종 때 완성되었다고도 하나 확실하지 않다.

 

성곽 전체의 둘레는 1,684m, 높이 4~6m 정도이다.관아를 비롯해 22개 건물이 있었다고 하나 전란에 모두 소실되어 버렸고 동문·서문·북문 등 3문과 치(雉) 6곳, 옹성(甕城), 수구문(水口門) 2곳 등이 남아 있다. 거칠게 다듬은 자연석으로 쌓은 성벽은 비교적 잘 남아 있고, 읍성으로서는 거의 완전한 형태로 보존되어 있다.

 

현재 3문과 동헌, 객사 등 14동이 복원되었다.

 

 

 

 

 

고창읍성의 정문은 북문이다. 북문으로 들어가는 곳은 옹성으로 견고히 둘러싸여 있다.

 

 

 

 

적으로부터 성문을 보호하기 위하여 둘러쌓은 옹성 위에는 여장(여담)을 쌓아 성 안에서 밖을 살필 수 있는 현안과 총을 쏠 수 있는 총안(근총안, 원총안)을 만들어 놓았다

 

 

 

 

북문의 이름은 공북루(拱北樓). 등양루(동문), 진서루(서문)와 함께 읍성에 남아 있는 등 3문의 하나로 2층 문루로 올렸다. 바깥쪽으로는 자연석 된 주춧돌, 안쪽은 돌기둥 주춧돌로 되어 있는 점이 흥미롭다. 인조 24년(1646년)에 세우고 그 후 3회에 걸쳐 중수했다는 기록이 있다.

 

 

 

 

 

공북루를 들어서면 비교적 넓은 골짜기가 펼쳐진다. 중앙에는 연못과 풍화루라는 누각이 오른쪽 언덕으로 향청, 동헌과 내아, 객사가 있고,  왼쪽 언덕으로는 옥, 관청, 작청 등이 들어서 있다.

 

 

 

 

공북루를 들어서자마자 왼쪽으로 옥(獄)이 보인다. 십여 년 전 이곳엔 토끼를 기르고 있었던 터로 기억되는데, 1983년에 발굴조사하여 확인된 유구와 각종 자료를 참고하여 2000년에 복원하였다고 한다.

 

 

 

 

조선시대의 옥은 대개 관아의 입구에다 짓고 동쪽 칸과 서쪽 칸에 남녀 옥을 나누어 만들고 높은 담을 둥글게 둘러 쳤는데, 그래서 원옥(圓獄)이라 부르기도 했다.

 

 

 

 

▼ 향청 쪽으로 가면서 돌아본 읍성의 동쪽 성곽과 옥사

 

 

 

 

 

향청 쪽으로 향하는 길, 평지에는 작은 비석 하나가 서 있다. 조선 말기에 대원군이 펼친 쇄국정책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척화비(斥和碑)이다.

이 비문을 지은 병인년(1866)에는 천주교에 대한 탄압이 도화선이 되어 병인양요가 발생하였고, 비를 만들어 세운 신미년(1871)에는 미국군함이 강화도를 침범한 신미양요가 발생하였다. 제국주의 열강들이 무력을 앞세워 문호 개방을 요구하자 흥선대원군이 백성들에게 서양 오랑캐에 대한 경계심을 드높이고자 전국 곳곳에 세운 비이다. 비문에는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않는 것은 곧 화친을 하자는 것이고 화친을 하자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임을 만년 자손에게 경계한다. 병인년에 짓고 신미년에 세움"이라는 뜻의 한문 구절 "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 戒我萬年子孫 丙寅作辛未立"이 적혀 있다.

 

 

 

 

옥사의 건너편 서쪽 산자락에는 향청(鄕廳)이라는 건물이 있다. 향청은 지방민을 대표하여 향리를 규찰하고 지방 수령을 자문 보좌하던 자치 기구다. 고려와 조선 초기에는 유향소라고 하였는데 임진왜란 이후부터 향청이라고 불렸다. 우두머리는 향정(鄕正) 또는 좌수(座首)라 하여 선거로 추천된 자를 임명하였다. 좌수는 풍속을 교정하고 향리를 규찰하는 일을 맡아보았는데, 때로 소임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권한을 남용하여 민폐를 끼치는 사례가 많았다고 한다.

 

1993년에 복원하였다고 한다.

 

 

 

 

 

다시 발길을 돌리면 옥사가 있는 위쪽으로 7칸짜리 긴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이 건물의 이름은 관청(官廳)은 관주(官廚)라고도 하였는데 지방 관아의 주방에 관한 사무를 담당하던 곳이다.

 

 

 

 

이곳에서는 수령과 가족들의 식생활, 빈객 접대와 각종 잔치에 필요한 물품을 조달하고 회계사무를 관장하였다. 1992년에 복원한 건물이다.

 

 

 

 

 

평지의 너른 땅 가운데에 청동기시대(BC 4~5세기경)의 무덤인 고인돌(지석묘) 하나가 보인다. 그러나 진짜 고인돌이 아니라 근래에 만든 것이다.

 

고창군에는 2,000여 기에 이르는 고인돌이 분포되어 있는데,  2000년 세계문화유산 (977호)으로 지정되었다. 이 고인돌은 죽림리 일대의 지석묘가 세계문화유산 잠정목록으로 결정된 기념으로 1998년 제 25회 모양성제 (1998. 10.28) 날에 강호항공고 재학생 200여 명이 고인돌 축조 과정을 재현하면서 만든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고인돌 뒤쪽으로 방형의 연못이 조성되어 있고 그 오른쪽 뒤편으로 높다란 2층 누각이  나타난다. 풍화루(豊和樓), 백성들이 풍년을 누리고 고을의 화평의 기원하는 의미를 가진 누각이다.

 

문헌에는 성내에 빈풍루와 풍화루가 있었다고 전해오고 있으나, 건물과 연못은 모두 없어지고 터만 남아있던 것을 1988년에 발굴조사하여 풍화루는 1989년에, 연못은 1990년에 복원하였다.

 

 

 

 

풍화루의 현판은 전북 고창 만석꾼의 집안 출생의 서예가 석전 (石田) 황욱(黃旭1898∼1993)의 글씨다. 

망국의 한을 달래며 금강산에 들어가 서예를 익힌 그는 심한 수전증을 극복하기 위하여 손바닥으로 붓을 움켜잡아 쓰는 ‘악필법(握筆法)’을 개척했던 대가로 알려져 있다.

 

 

 

 

 

풍화루를 지나 건너편 남동쪽 언덕에는 작청(作廳)이라는 건물이 보인다.

 

이방과 아전들이 업무를 처리하던 이방청 건물로 길청(吉廳)이라고도 한다. 사무가 이루어지는 관청이라는 뜻에서 작청이라 부른다.

 

 

이곳에 남아있던 작청 건물은 지금의 약수터(길영천) 부근으로 이전되었고, 그 동안  관리소로 사용해오다 고창읍성 복원사업이 이루어지면서 학교가 성 밖으로 이전되고, 1991년에 원래의 위치로 복원한 것이다.

 

 

 

 

 

이제 풍화루 뒤편 언덕에 있는 동헌과 내아, 그리고 객사인 모양관으로 향할 차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