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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여행 (10) 전주 향교, 성균관을 본뜬 대성전과 명륜당

모산재 2010. 12. 10. 11:43

 

최명희 문학관을 나와 은행로를 걸어서 전주향교를 향한다.

 

 

>다행히 '성균관 스캔들' 드라마 촬영팀이 철수하고 없고 만화루(萬化樓) 앞 거리는 한적하기만 하다. 정오에 가까워지는 시간이지만 사람들의 발길이 그리 많지 않아 느긋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돌아볼 수 있어 좋다.

 

 

 

 

■ 전주 향교, 대성전과 명륜당

 

 

만화루(萬化樓)는 전주향교의 외삼문 역할을 하고 있는 문루이다.

 

 

 

 

 

1987년 전주향교를 대대적으로 보수할 때 이 자리에 있던 지경문을 철거하고 새로 세운 건물이다. 만화루는 향교의 문루 이름으로 많이 사용되고 있는데, '공자지도 만물화생(孔子之道 萬物化生)'에서 따온 것이라 한다.

 

향교의 정면에 자리잡은 문루인 만화루는 내부공간의 성격을 띄고 있으면서 동시에 외부공간을 이어주는 구실을 한다. 이곳은 휴식 공간으로 시회(詩會)를 열기도 하고 손님을 접대하거나 경로잔치를 열기도 하며 향약 조직의 향회를 열기도 하는 공간으로 기능하였다.

 

 

 

만화루를 지나면 내삼문 기능을 하는 일월문(日月門)이 나온다.

 

 

 

 

 

'일월'은 해와 달이니 해와 달처럼 세상을 환히 밝히는 성현을 만나는 문이라는 뜻이겠다.

 

일월문 안에는 대성전과 동무 서무가 있으니 그곳은 성현을 모신 사당이다. 만화루 높은 문루를 지나면서 향교의 경내로 들어서고, 낮은 담장으로 두른 일월문을 지나면서 마음을 경건하게 가다듬는다. 만화루와 일월루 사이의 공간은 그런 마음 자세를 가지는 공간이다.

 

 

 

일월문을 지나면 대성전(大成殿)이 나타나고, 대성전 후원으로 돌아가면 명륜당(明倫堂)이 나타난다.

 

 

 

 

 

대성전은 명륜당보다 훨씬 뒤에 세워진 건물로 1653년(효종 4)에 중건하였다. 정면 3칸에는 널문을 달았으며, 두리기둥(圓柱)에 맞배지붕을 올렸고 양 합각에는 방풍판을 달았다.

 

대성전에는 공자를 주향으로 안자, 자사, 증자, 맹자 등 중국 4성과 10철, 송(宋)의 6현을 배향하고 있다. 매년 봄 가을로 이곳에서 석전제(釋奠祭)를 지낸다.

 

 

 

 

 

동무와 서무에는 우리 나라의 18현과 중국의 유학자 7현 등 모두 25현을 배향하고 있다.

 

동무에는 설총 안향 김굉필 조광조 이황 이이 김장생 김집 송준길, 서무에 는 최치원 정몽주 정여창 이언적 김인후 성혼 조헌 송시열 박세채 등이 배향되어 있다고 한다.

 

 

동무(東廡)

 

 

 

 

 

대성전 앞뜰 동무와 서무 앞에는 400여 년이 되었다는 은행나무가 각각 2그루씩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다. 은행나무는 향교의 상징적 나무로, 은행나무가 벌레를 안타듯이, 유생들도 건전하게 자라 바른 사람이 되라는 의미를 담은 것이라고 한다.

 

 

서무(西廡

 

 

 

 

 

동무의 앞뜰에 달린 은행 열매들

 

 

 

 

 

 

대성전 뜰에서 본 일월문과 만화루

 

 

 

 

 

 

※ 향교의 공간 구성과 기능

 

 

향교는 성현들의 위패를 모신 배향(配享) 공간, 또는 묘로서 대성전과 유생들이 가르침을 받는 강학(講學) 공간인 명륜당이 중심을 이룬다.

 

향교의 공간 구성은 지형에 따라 다른데 평탄한 대지에는 전묘후학(前廟後學)을, 경사진 언덕에서는 전학후묘(前學後廟)의 기준을 따랐다. 사당을 앞에 두거나 높은 곳에 둔 것은 성현을 모신 배향 공간을 강학 공간보다 우위에 둔 발상임을 알 수 있다.

 

향교가 처음 건립된 것은 12세기 초 고려 인종 때부터라고 하는데, 전국적으로 설치된 것은 조선 건국 이후의 일이다. 성리학을 국가 주도 이념으로 표방한 조선은 건국 직후 1읍 1향교의 원칙을 세우고, 모든 군현에 향교를 설립하였다. 그래서 지금도 전국 어디에나 읍내에는 교동이란 마을이 있다. 향교가 있는 동네라는 뜻이다. 향교는 지금의 중고등학교에 해당하는 관학으로, 강학과 배향 기능을 수행하였다. (그러나 서원과 같은 사학을 선호하게 됨에 따라, 향교는 점차로 강학 기능을 잃어버리고 배향 기능만이 남게 되었다.)

 

 

 

대성전 뒷담을 사이에 두고 명륜당이 있고 서쪽으로 장서각, 계성사, 양사재, 사마재가 있으며 주위에 고직사 등 여러 건물이 있다.

 

 

 

 

 

 

전주향교의 역사

 

 

전주 향교가 처음 세워진 것은 고려 말인 공민왕 때(1354)로 추정되고 있다. 본래 지금의 경기전 북쪽에 있었는데, 경기전이 들어서자 유생들의 글 읽는 소리가 시끄러워 태조의 영령이 편히 쉴 수 없다 하여 1410년(태종 10)에 화산동(지금의 신흥고 부근)으로 옮겼다고 한다. 그곳은 도둑이나 호랑이로부터 화를 입을까 염려하여 담장을 높이 둘렀다고 할 정도로 외진 곳이었다고 한다.

 

임진왜란이 지난 후 1603년(선조 36) 향교는 다시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다. 너무 외진 곳이라 유생들이 다니기 불편하기도 했거니와, 향교의 위치가 왕권을 상징하는 객사의 남쪽으로 왼편에 문묘를 오른쪽에 사직단을 두어야 한다는 좌묘우사(左廟右社)의 법도에 어긋났기 때문에 관찰사 장만(張晩)과 유림들이 힘을 합쳐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한다.(향교 자리에는 그 뒤에 화산서원이 창건되었다가 서원철폐령에 따라 사라졌다고 한다.) 현재의 전주향교는 1987년 대대적인 보수를 거친 것으로, 대성전과 동·서무는 완전 해체 복원하였고, 명륜당과 동서재·계성사 등은 중보수하였다. 그리고 지경문을 철거한 자리에 없어졌던 만화루(萬化樓)를 다시 건립하였으며 장판각도 이때 새로 건립하였다.

 

전주 향교는 오늘날 남아 있는 향교 중에서 가장 보존 상태가 좋은 향교라고 한다. 서울의 성균관을 모방하여 지었는데 원래는 99칸에 이르는 규모였다고 하며 지금은 대성전과 명륜당 등 16동의 건물이 남아 있다. 전국 향교 중 유일하게 공자 ·맹자 ·증자 ·안자의 아버지 위패를 봉안한 계성사(啓聖祠)라는 사당이 있고, 대성전 ·동무(東廡) ·서무(西廡)에 51선현의 위패가 봉안되었다. 또 장판각(藏板閣)에는 <주자대전> <성리대전> <사기평림(史記評林)> 등 9,600여 점이나 되는 목판이 소장되어 있다고 한다. 이는 한지를 생산하는 전국 최대의 생산지로 전국 최고의 인쇄문화를 자랑하는 도시였음을 나타낸다.

 

 

 

대성전 서쪽에 나 있는 문을 통하여 들어가면 마당 한쪽에 수백년 묵은 은행나무가 드리운 짙은 그늘 아래에 고색창연한 목조건물 명륜당이 나타난다.

 

 

 

 

 

서울의 성균관을 본뜬 명륜당은 전주의 유생들이 공부하던 강학 공간이다. 명륜당 마당에는 동재와 서재가 나란히 있는데 유생들의 기숙사로 보면 된다.

 

그런데 명륜당 건물은 한눈에도 구조가 특이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정면에서 보면 3칸짜리 맞배지붕의 구조인데, 양쪽으로 지붕을 달아내 내부 공간을 넓힘으로써 5칸짜리 집이 되었다. 이렇게 달아낸 지붕을 눈썹지붕라고 한다.

 

 

 

 

 

그래서 지붕의 모양은 전체적으로 팔작지붕을 닮은 모양이 되었는데, 달아낸 부분의 천장은 서까래가 옹색하게 이어진 부분을 가려 따로 만든 천장으로 눈썹천장이라고 한다.

 

이를 위하여 눈썹천장의 도리가 뺄목으로 되어 길게 뻗어 나와 있는데, 향교 건물을 이와 같은 구조로 짓는 경우는 매우 드문 형식이다.

 

 

 

 

 

향교에는 양인(양반과 평민)이면 입학할 수 있었으나, 양반과 양인을 구분하여 동재(東齋)에는 양반 자제들이, 서재(西齋)에는 평민과 서얼의 자제들이 기숙하였다.

 

조선 초기에는 양반집 자제들이 입교하는 액내교생과 평민이나 서얼이 입교하는 액외교생으로 나뉘었는데, 조선 중기 이후에는 액내교생의 양반집 자제들이 자신들을 동재교생이라 일컫자 평민 및 서얼들이 액내교생에 새로이 입교하여 서재교생이라 칭하였다.

 

정원은 읍격에 따라 차이가 있는데, 전주부와 같이 부, 대도호부, 목 등 가장 큰 읍은 90명, 도호부 70명, 군은 50명, 가장 작은 읍인 현은 30명이었다. 전주 향교에는 액내생(額內生) 90명, 액외생(額外生) 90명으로 총 180명에 정7품의 훈도 1명이 배속되어 사서오경 등을 가르쳤다.

 

그러나 실제로는 정원 외에도 많은 학생들이 있었다고 한다. 과시를 통해 신분상승을 꾀하려는 측면도 있겠지만, 향교에 적을 두면 군역을 면제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예나 지금이나 군역을 피하고 싶은 마음은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전국 향교 중 유일하게 공자 ·맹자 ·증자 ·안자의 아버지 위패를 봉안한 사당, 계성사(啓聖祠)는 문이 굳게 닫혀 있다.

 

 

 

 

 

향교 뒤 언덕배기에 있는 현산정이란 작은 정자에서 내려다본 계성사는 낡고 퇴락한 모습인데, 이후 명륜당과 함께 보수공사에 들어갔다는 소식이 들린다.

 

계성사 앞쪽으로는 보이는 커다란 새 건물이 최근에 복원한 전주 동헌 풍락헌(豊樂軒)이다.

 

 

복원한 지 얼마되지 않은 것이지만 동헌도 구경하기로 하고 발길을 옮긴다.

 

 

 

<다음 글에 계 속>

 

 

 

 

※ 전학후묘의 산지형 향교, 고창향교 => http://blog.daum.net/kheenn/15854089

※ 동학서묘의 청송향교 =>http://blog.daum.net/kheenn/15856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