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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여행

일본 여행 (8) 신라인의 얼이 서린 반가사유상의 절, 도쿄 고류지(廣隆寺)

by 모산재 2006. 1. 22.

 

 

미륵반가사유상의 절, 도쿄 코류지(廣隆寺)

2006. 01.13 / 도쿄

 

 

 

 

니조성을 돌아본 뒤에 찾아간 곳은 코류지(廣隆寺). 코류지는 일본 국보 1호인 미륵보살반가사유상으로 유명한 절이다.

 

 

안내문에 따르면 코류지는 603년 쇼토쿠(聖德) 태자에 의해 건립되었다고 되어 있는데, 이 일대의 세력을 쥐고 있던 신라인인 진하승(秦河勝, 일본명은 하다노 카와카쓰)이 쇼토쿠 태자에게서 받은 불상을 모시면서 건립했다는 설도 있다. <일본서기>에는 쇼토쿠 태자가 고귀한 불상을 가지고 있는데 불상을 모실 자를 찾자 진하승이 자원하여 고류사의 전신인 호코지(蜂岡寺)를 창건하고 이 불상을 모셨다고 한다.

 

 

호코사의 창건 설화는 836년에 기록된 <교류지연기(廣隆寺縁起)>에 전하는데, 쇼토쿠 태자가 진하승에게 다음과 같은 꿈 이야기를 하는 것에서 비롯된다.

 

나는 어젯밤에 이상한 꿈을 꾸었다. 향긋한 향기가 가득한 계수나무 숲에 큰 고목이 있었는데 오백 나한이 그 아래에 모여 불경을 읽고 있었다. 고목에서 큰 광명이 비치며 나한의 독경이 미묘한 목소리로 불법을 전파하는 것을 보니 참으로 신령스런 땅인 것 같았다.

 

진하승은 꿈이 가리키는 장소로 옛 교토인 카도노(葛野)로 생각하고 쇼토쿠 태자를 모셨는데, 계수나무 고목 주위에 무수한 꿀벌이 날았다. 그 꿀벌의 무리는 나한이 설법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곳에 절을 세우니 호코사(하치오카지, 蜂岡寺)라 하였다.

 

 

 

코류지로 연결되는 사철(私鐵) 전차. 사진은 우리가 타고 간 전차이다.

 

전차 오른쪽 뒤 길 건너편, 차도에 바짝 붙어서 고류지 정문인 천왕문이 보인다.

 

 

 

 

천왕문 양쪽에 인왕상이 보이는데, 철망으로 가려져 있다.

 

그리고 오른쪽 돌기둥엔 '우즈마사코류지(太秦廣隆寺)'라 적혀 있다. 코류지는 일본에서는 '우즈마사데라(太秦寺')로 더 잘 알려져 있다고 한다. 고류지가 있는 이 지역을 우즈마사(太秦)라고 부르는데, 이는 4세기에 신라에서 도래한 진(秦)씨들이 개척한 지역으로 진씨의 후손 진하승이 쇼토쿠(聖德) 태자를 위해 코류지를 세움으로써 태자의 '태'와 진씨의 '진'에서 유래한 이름이라 한다.

 

'우즈마사(太秦)'란 이름에 대해서는 다른 설이 전하기도 하는데, 진하승 자손 하다사케(秦酒)가 땅을 하사받아 누에를 기르고 비단을 짜서 천왕에게 바쳐 산처럼 높이 쌓여 천왕이 기뻐하여 준 칭호가 '우즈마사'로 이에서 비롯된 지명이라 한다.

 

 

 

천왕문을 지나 사찰 마당으로 들어서자마자 아름드리 녹나무가 서 있고 축축한 가지에는 일엽초가 밀생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잎이 저렇게 긴 일엽초는 낯설다.

 

 

 

 

저 멀리 정면에 상궁왕원태자전(上宮王院太子殿)이 보이고, 오른쪽 나무숲에 살짝 보이는 건물이 강당이다. 강당은 1165년에 세워졌는데 교토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라 한다. 강당 안에는 국보인 아미타여래좌상이 모셔져 있다고 한다.

 

왼쪽에는 약사당(薬師堂), 능락당(能楽堂), 지장당(地蔵堂)이 나란히 있다.

 

 

 

 

 

■ 상궁왕원 태자전(上宮王院 太子殿)

 

쇼토쿠태자를 모신 코류지의 본당으로 건물은 1720년에 지어진 것이다. 건물 안에는 쇼토쿠 태자(573-621)가 33세 때 스스로 조각한 자신의 목조상이 있다고 한다. 이 태자 상은 역대 천황이 즉위 행사에 착용했던 속대(束帯)를 보내어 채우게 되어 있다. 지금 착용허고 있는 속대는 헤세이(平成) 천황이 보내온 것이라고 한다.

 

지붕은 특이하게도 회나무 껍질로 만든 것이라 한다.

 

 

 

 

옆 벽면에 '쇼토쿠 태자' '대승일본'이란 글이 보인다.

 

 

 

 

 

본당 오른쪽에는 진씨신사(秦氏神社)라는 곳이 있는데, 바로 진하승(秦河勝)을 모신 곳이다.

 

 

금당 앞 정원에는 가시남천 꽃이 아름답게 피고...

 

 

 

 

백량금 붉은 열매도 탐스럽게 달렸다.

 

 

 

 

 

■ 훼손당한 신라인의 얼, 영보전(靈寶殿)의 미륵보살반가사유상

 

본당 북쪽 깊숙한 곳에 영보전이 있다. 1982년에 신축하였다 한다.

 

영보전은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을 비롯한 국보급 불상들이 모셔진 건물이다. 이곳에는 반가사유상 외에도 빼어난 불상과 건물 등 국보 20점, 중요문화재 48점이나 소장하고 있다.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은 흔히 '일본 국보 제1호'로 알려지고 있는데, 이는 단순히 등록순일 뿐 문화재적 가치와는 무관한 수자라고 한다. 높이 123.5 cm의 목조불인 이 반가상은 흔히 우리의 국보 83호인 금동미륵보살반가상과 닮은 점으로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독일의 철학자 야스퍼스가 이 불상을 보고 아래와 같이 찬사를 표현했을 정도로 빼어난 작품이다.

 

고대 그리이스의 신(神)들을 조각한 조각과 로마 시대에 만든 수많은 기독교의 예술품은 아직 완전히 인간적인 냄새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이 불상은 지상에 있어서 모든 시간적인 것의 속박을 초월해서 이루워 낸 인간 존재의 가장 맑고 원만하고 영원한 모습의 표상이다.

 

일본측의 기록에 의하면, 이 불상이 코류지에 봉안된 것은 603년의 일이라고 한다. 쇼토쿠 태자(聖德太子)가 교토의 지도자였던 신라인 진하승(秦河勝)에게 전해 주고, 진하승은 곧 코류지의 전신인 호코사(蜂岡寺)를 창건하며 이 불상을 모시게 되었다. 

 

 

 

 

 

그리고 이 불상은 우리의 국보인 금동미륵반가사유상과 모든 면에서 너무 닮아, 한반도로부터 건너간 것이라는 주장이 대세를 이루는데 그 근거는 아래와 같다.

 

이 불상이 신라인이 만든 불상이라는 과학적 근거는 재질이 적송(赤松)이란 점이다. 1980년대 초, 불상의 미소에 반한 일본인 대학생이 자기도 모르게 불상에 접근했다가 실수로 오른손의 새끼손가락을 부러뜨리는 사건이 발생했다. 큰 소동이 일어났지만 다행스럽게 정밀 조사를 통해 재질이 한국에서 난 적송임이 밝혀졌다.

그러나 이 불상은 한국에서 적송을 들여다 일본 내에서 조각한 것인지, 아니면 신라에서 조각을 완성해 현해탄을 건너간 것인지는 입증되지 않았다. 다만 어느 쪽이든 한반도의 장인에 의해 조각된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당시의 상황에 비추어 보아 완성된 형태로 건너갔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이 절에는 또 다른 신라 불상이 봉안되어 있다.

 

'보관미륵보살 반가사유상'과 거의 같은 시기에 제작된 불상으로 균형도 잘 잡히고 기교도 뛰어나지만 어쩐지 우는 아이의 모습 같아 그곳에서는 '우는 상투 미륵상'으로 부르는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이다. 그러나 재질은 장목으로 616년에 신라에서 사신을 보내며 전해 준 것이라 한다.

 

 

▼ 고류사 소장의 또하나의 미륵보살반가사유상

 

 

 

또 하나. 일본 미술사 박사 학위를 받고 캘리포니아 주립대 동양미술사 교수로 재직했던 존 카터 코벨은 '고류사' 미륵불상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견해를 밝혔다고 한다.

 

목조미륵반가사유상이 안치된 고류지는 603년 한국에서 이주해 온 직물기술자 진하승(秦何勝)이 건립한 절이다. 그는 한국계 혈통을 지닌 '쇼토쿠 태자'와 절친한 사이였다.

쇼토쿠 태자가 48세에 홍역으로 급사하자 진하승은 자신이 세운 절인 고류사에 자신이 존경했던 쇼토쿠 태자를 기리려는 미륵보살상을 신라에 요청했다. 신라의 장인은 시일이 촉박하여 청동으로 주조하는 대신 적송 통나무로 걸작 미륵보살상을 깎아내고 금을 입혔고, 그 불상이 '목조미륵반가사유상' 이다.

봄에 서거한 태자를 기린 금부처가 7월(623년)에 도착했다는 일본서기의 기록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우리 국보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과 일본 국보인 미륵반가사유상을 비교해보자.

 

머리에 쓴 삼산관이나 오른손으로 턱을 살짝 받치듯 생각에 잠긴 모습, 오른 다리를 왼쪽 무릎위에 살짝 올려놓은 모습, 옷주름이 늘어져 있는 좌대, 발을 둔 모습 어느 하나 닮지 않은 데가 없을 정도다.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국보83호)          ▼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일본 국보1호)

 

 

한국의 것(국보 83호)이 재료가 금동이고 일본의 것(국보 1호)이 목재라는 점. 그리고 왼발을 자연스레 내려 밟고 있는 연꽃 좌대의 꽃잎이 한국의 것이 복엽인 반면 일본의 그것은 단판 소엽인 점이 다를 뿐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코류지에서 만난 미륵상의 얼굴이 원래의 모습이 아니고 메이지시대에 뜯어 고쳐진 것이라고 한다. 금동미륵반가상과 닮은 순박한 얼굴이었던 것을 날렵한 일본 불상의 모습으로 바꾸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일본 미술대학 교수 인 나가이 신이치는 "고치기 전에는 한국인의 얼굴이었는데 일본인의 얼굴로 고쳐서 더 일본인에게 사랑받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행위를 했다고 해서 국보의 가치를 손상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는 주장을 하였다고 한다. 신라인들이 창조한 최고의 예술품이 일본인들에 의해 훼손된 채 전시되고 있다는 것이다. 현재 원형의 본을 떠 둔 것이 도쿄예술대학에 보존되어 있다고 한다.

 

 

※ 금동미륵반가사유상(국보 제83호)

 

삼국시대 말인 7세기 경의 작품. 높이 93.5cm.

의자 위에 미륵보살이 삼산관(三山冠)을 쓰고 앉아 있는 모습이다. 왼발은 내리고 오른발은 왼쪽 무릎에 얹은 채 오른 손 끝을 빰에 살며시 대어 입가에는 엷은 미소를 띠며 명상에 잠긴 보살의 모습은 자비로움 그 자체다. 보살의 부드러우면서도 섬세한 표현에 숨이 막히는 감동이 전해진다.

 

 

 

※ 금동미륵반가사유상(국보 제78호)

 

 

※금동미륵반가상에 대해서는 => https://kheenn.tistory.com/kheenn/15855089  https://kheenn.tistory.com/158550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