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여행

일본 여행 (10) 교토, 킨가쿠지(금각사)와 극우 민족주의자 미시마 유키오의 죽음

모산재 2006. 1. 22. 17:15

 

킨가쿠지(金閣寺)와 미시마 유키오

/ 교토, 2006. 01. 13

 

 

 

 

입장권을 부적으로 대신하는, 금빛 찬란한 누각과 연못의 조화가 아름다운 절이다.

 

1397년에 건립된 선종 사원으로, 절의 정식 명칭은 '로쿠온지(鹿苑寺)'인데, 연못 위 2,3층에 금칠을 한 누각이 유명하여 '금각사'라 부른다. 본래 무로마치막부 시대의 장군 아시카가 요시미쓰(足利義滿)가 1397년 지은 별장이었으나, 그가 죽자 유언에 따라 로쿠온지(鹿苑寺)라는 선종 사찰로 바뀌었다. 금각은 무로마치시대 전기의 기타야마문화를 상징하는 건물이다.

 

이 절이 유명하게 된 것은 미시마 유키오의 소설 '금각사'(1956)의 배경이 된 때문인다. 금각사는 1950년에 한 사미승의 방화로 소실된 것을 1955년에 복원되었다. 1994년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긴가쿠지 입구

 

 

 

 

● 킨가쿠(金閣)

 

3층 건물은 각층마다  건축 양식의 시대가 다르다고 한다. 1층은 후지와라기 침전식 건축물, 2층은 가마쿠라기 무가식 전통 건축물, 3층은 당대(唐代) 선종 불당 양식으로 각 시대의 양식을 독창적으로 절충한 무로마치시대의 대표적 건축불이라고 한다.

 

1층은 침전과 거실로 쓰이며, 2층에는 관세음보살을 모셔두었다. 3층은 선종 불전이다. 2층과 3층은 옻칠을 한 위에 금박을 입혔다. 지붕은 화백나무의 얇은 판을 여러 겹 겹쳐 만든 널조각으로 이었고, 그 위에는 봉황을 얹었다.

 

1987년 가을 다시 옻칠을 한 뒤 금박을 새로 입히고, 천정 그림과 요시미쓰 인물도도 복원하였으며, 그리고 2003년 봄에는 지붕도 새로 이었다고 한다.

 

 

 

 

 

● 교코지(鏡湖池)

 

이 연못을 중심으로 하여 크고 작은 선과 당시 지방 영주들이 헌납한 이름난 돌들을 배치하였고, 서쪽의 산을 배경으로 하여 무로마치시대의 대표적인 지천회유식 정원으로 조성되었다고 한다.

 

 

 

치자 열매

 

 

 

금각사 사리전(1층)

 

 

 

 

※ 소설 <금각사>의 내용

미시마 유키오의 소설. 1956년 1월부터 10월까지 잡지 <신죠(新潮)>에 연재되었고, 같은 해에 단행본으로 간행하였다. 실제로 있었던 로쿠온지(鹿苑寺) 방화사건을 바탕으로 쓰여진 작품으로 요미우리문학상을 수상했다.

말더듬이라는 생리적 장애를 갖고 있는 나는 어려서부터 아버지에게서 금각사의 아름다움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들어오다가 금각사의 도제(徒弟)가 된다. 장애 때문에 자신과 외부와의 통로 없이 폐쇄적인 소외감으로 고민하던 나는 전쟁 말기의 한때 금각사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친화감을 갖는다. 패전과 함께 나는 금각사에 대한 거리감을 느끼며 금각사가 자신의 인생의 길을 방해한다는 생각이 마음을 지배한다. 전후 금각사 내부의 타락을 알게 되면서 나는 금각을 태워버리고 금각에서 벗어날 결심을 하고, 마침내 방화한다.

말을 더듬는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는 청년이 금각사의 미에 매료되어 새로운 인생을 꿈꾸며 방화를 결심하게 되기까지의 심상이 치밀한 구성과 명석한 문체로 묘사되어 있다. 미시마 유키오의 대표 작품이며, 전후 문학의 기념비적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금각사는 아름다움의 상징이면서 동시에 사람의 마음을 속세와 두절시키는 힘이다.

 

 

 

● 안민타쿠(安民澤)

 

'백성을 편안히 하는 연못'이라는 뜻의 안민택, 유교적 메시지가 워낙 강한 이름이다.선종 사찰 호수 이름으로는 썩 어울리지 않는 듯하다.

 

 

 

 

● 셋카테이(夕佳亭)

 

다실 풍의 정자인데, 에도시대 다도가로 유명한 가나모리 소와라는 사람이 좋아했던 양식이라고 한다. '저녁 노을의 경치가 특히 아름다워' '석가정(夕佳亭)'이란 이름을 붙였다 한다.

 

 

 

지붕을 갈대로 엮어 이었다.

 

 

 

 

※ 금각사(녹원사) 경내도

 

 

 

 

※ 극우 민족주의자 미시마 유키오의 삶과 죽음

많은 작품을 쓰며 불꽃처럼 화려한 인생을 살았던 일본 작가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피와 죽음, 그리고 자살이었다. 또 전통적 가치관과 현대적 가치관 - 사무라이 무사도 전통과 현대 일본의 서구화 - 사이의 갈등이 그를 괴롭혔다. 미시마 유키오는 문화의 갈등을 해소하고 죽음에 대한 자기의 동경을 신성화하기 위해 그의 명성이 최고도에 달했을때 공개 할복 자살을 선택한다.

자기 인생의 끝장을 미시마처럼 분명히 미리 보여준 사람은 거의 없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자살을 꿈꿨으며 어른이 되어서는 자살에 대한 글을 쓰고 영화에 출연하여 할복 자살을 연기했다.유명 인사 가운데 그만큼 종말을 예고하거나 연습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의 최후는 그 불씨가 그의 시작에 있었다고도 볼 수 있다. 1925년 11월 14일, 히틀러와 나치즘에 깊이 빠져있던 아버지의 아들로 태어난 기미타케 히라오키는 훗날 미시마 유키오라는 필명을 쓰게 되는데, 그는 이 이름을 일본어로 적을 때 '죽음에 홀린 신비한 악마'라는 뜻으로도 읽힐 수 있도록 썼다. 그러면서 그는 친구들에게 "좀 섬뜩하지만 내 이름은 그런 식으로 쓴다."고 말하기를 좋아했다.

미시마의 친할머니는 병고에 시달리면서 그가 열두 살이 될 때까지 어둠침침한 자기 방에서 데리고 살았다. 할머니는 약하고 내성적인 미시마를 중세 일본의 전설로 양육했다. 외로운 소년은 폭력, 화려한 예식, 고귀한 자결이 등장하는 전설들을 굶주린 듯 받아들였으며 동화책 같은 전설의 세계는 그를 둘러싼 현실 세계보다 훨씬 더 다채롭고 감동적이었다.

그는 재미삼아 전투에서 부상당해 죽어가는 멋진 무사들의 그림을 그리곤 하였다. 어느날 그는 멍하니 들여다보던 어떤 그림 속의 순교자가 자기가 생각해 보고 야릇한 흥분을 느끼던 상상과는 달리 남자가 아니라 잔 다르크라는 이름의 소년처럼 생긴 프랑스 여자라는 사실을 알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 이후로 미시마는 옷을 남자처럼 입은 여자를 보기 싫어했으며 자기 아내가 바지 입는 것을 금하였다.

섹스와 죽음은 그의 마음 속에서 기괴하게 융합된다. 열두 살때 미시마는 성 세바스티아누스가 말뚝에 묶여 화살에 관통당하는 그림을 보고 몽상을 하면서 첫 오르가슴을 경험했다. 그는 1949년 스물 네살 때 출판한 자기의 첫 소설 <가면의 고백>에서 이 경험을 다루었는데, 부분적으로 자서전적인 이 소설은 미시마의 동성애가 노출되는 계기가 되었다. 일단 그의 동성애가 공개되자 이제는 유명해진 이 젊은 작가의 성관계는 악명 높게 난잡해졌다.

그런데도 그는 결혼하여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되었으며, 그의 아내 요코 스기야마와, 질투심과 소유욕이 강하며 미시마를 아들로서보다는 애인으로 여기던 어머니 사이에는 전투가 벌어져 교착상태에 빠진다.그의 아내와 어머니는 소수파에 속했다. 일본 여성들은 미시마가 육체적으로 매력이 없을뿐더러 혐오스럽기까지 하다고 생각했다. 한 잡지의 여론 조사에서 여성 독자의 50%가 그의 정부가 되느니 차라리 자살하겠다고 응답했다.

섬뜩하게도 미시마의 자결 의식은 그의 1966년 단편 소설 <애국>에서 미리 선보였다. 그 뒤 이 단편 소설이 영화 <유코쿠>로 만들어질 때 미시마는 감독과 주연을 맡아 4년 뒤에 올 자기의 운명을 문자 그대로 실연해 보였다. 이 소설의 등장 인물인 한 초급 장교가 자기 배를 칼로 가른 순간을 묘사한 미시마의 글을 읽어보자.

벌거벗은 칼 끝 네다섯 치가 그의 살 속으로 완전히 사라졌다. 의식이 돌아왔다. 틀림없이 칼날이 그의 위벽을 뚫었다고 그는 생각했다. 숨쉬기가 어렵고, 가슴이 쿵쿵거렸으며, 자기 자신의 일라고 믿기 어려운 깊은 속 어느 곳에서, 무섭게도 격심한 고통이 마치 갈라진 땅에서 부글부글 끓는 용암이 흘러나오듯 솟아올라 왔다.

그래 이게 할복이었구나!

 

미시마의 진짜 할복 자결로 이어지는 사건은 1970년에 일어났다.

미시마는 본질적으로 서구적인 생활 양식대로 살았으며 서양 문화에도 방대한 지식을 갖고 있었지만 일본의 서양 모방에 격분했다. 그는 부지런히 일본 전래 무술 가라테와 검도를 연마하여 많은 논란을 일으기게 될 개인 군대 '방패회' 를 만들었다. 이 군대의 목표는 일본의 무사도 정신을 보전하고 좌익 또는 공산주의자들의 공격이 있을 경웅 정규군을 보조하는 것이었다. 언론에서는 이들을 미시마의 '장난감 군대'라고 조롱하였다.

1970년 11월 25일, 4명의 방패회 부하들과 함께 미시마는 도쿄 도심지 부근에 자리잡은 군본부 사령관실을 점령했다. 그는 발코니에서 아래에 모인 1000명의 군중에게 약 10분 동안 열변을 토하면서 일본의 전후 헌법이 허약하다고 공격하였다.(일본의 전후 헌법은 전쟁과 재무장을 금지하고 있었다). 그의 희망은 국회로 쳐들어가 헌법 개정을 강요하는 것이었다. 강요 수단으로는 인질을 잡을 예정이었다.

이 계획이 실패할 경우 그는 할복을 결행할 예정이었다. 미시마의 뒤틀린 마음에서는 내장을 쏟아 내는 할복 자결이 명예롭게 죽는 수단이었을 뿐 아니라 그가 표현했던 대로 '궁극적인 형태의 자위 행위' 였다. 일단 내장을 꺼내 놓으면 지휘 서열 2위인 스물 다섯 살의 모리타 마사카츠가 그의 목을 베게 되어 있었는데 모리타는 미시마의 친구들이 미시마의 '약혼자'라고 부르던 사람이다. 그런 다음 모리타 자신도 할복하여 그 맛을 직접 체험하고, 지휘 서열 3위의 후루 고가에 의해 목이 베이게 되어 있었다.

계획은 처음부터 빗나갔다.

인질 마쓰다 장군을 건물 안에 확보해 놓고 미시마는 발코니에 올라가 군중에게 연설했다. 연설 첫마디부터 그의 목소리는 군중이 화를 내며 외치는 소리에 파묻혀 버렸다. 경찰 헬리콥터들이 선회하며 내는 굉음 때문에 그의 메시지는 더욱 지워졌다. 약 30분으로 예정되었던 그의 연설은 대혼란 속에서 7분 만에 끝났다.

미시마와 모리타가 "천황 폐하 만세"를 제창한 뒤 건물 안으로 퇴각할 때 미시마는 그의 마지막 말을 한다. "내 말이 들리지도 않았던 것 같은데"

기괴한 고요 속에서 미시마는 무릎을 꿇고 두 손으로 단검을 쥐고 왼쪽으로 가져갔다. 글에서, 영화에서, 마음속으로 충분히 리허설한 대로 그는 칼날을 수평으로 세워 오른쪽으로 잡아당겨 배의 내벽을 갈랐다. 미시마는 <애국>에 등장하는 초급 장교와 똑같은 경험을 한다. "그가 마침내 칼을 자기 배 오른쪽으로 쭉 잡아당겼을 때 칼날은 이미 얕게 베고 있었으며 피와 지방으로 미끈거리는 칼 끝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러나 미시마는 그 고통이 견딜 수 없을 정도이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그의 옆에는 마루 위에 종이 한 장과 붓이 있었다. 그의 원래 의도는 그 붓으로 피를 찍어 '검(劍)'이라고 쓰는 것이었다. 그러나 미시마가 심한 고통 속에서 앞으로 푹 쓰러지자 모리타는 즉각 대도를 내리쳐서 자기 사령관의 참수를 시도한다. 그러나 이번에도 현실은 환상을 모방하려 하지 않았다. 첫번재로 내려친 일격은 강력했으나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두 번째도 마찬가지였다. 모리타의 대검을 잡아채 마침내 미시마의 목을 절단한 것은 후루 고가였다.

다음으로 모리타는 자기의 영웅이며 사령관이자 아마 그의 애인이었을 미시마 곁에서 무릎을 꿇었다. 미시마와 똑같은 냉정함과 결의로 그는 단검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잡아당겨 할복했다. 칼을 배에서 빼내며 그는 후루고가에게 "지금!"이라고 명령했고 그의 머리도 떨어졌다. 후루고가와 그들의 사관 생도 두 명은 인질을 풀어주고 경찰에 투항했다. 그들은 울면서 건물 밖으로 끌려 나갔다.

장례식 때 미시마의 몸은 그의 요청에 따라 그가 만든 군대의 군복을 입고 있었다. 머리는 가족과 친구들이 참가한 공개 참관 때 제자리에 돌아가 있었으며 베인 상처는 스카프로 가려져 있었다. 화장시키기 위해 관 뚜껑을 닫기 직전 미시마의 아내는  그의 곁에 그가 좋아하던 만년필과 쓰고 있던 원고를 넣어 주었다.

- 찰스 패너티<그것은 이렇게 끝났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