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산하와 문화재

<국보 제78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세계적 반가사유상들

모산재 2012. 3. 1. 22:59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국보 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과 국보 78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을 교대로 전시하고 있는데, 지금은 78호를 전시하고 있는 중이다.

 

보살상의 높이는 80㎝. 의자에 앉아 오른발을 왼쪽 무릎 위에 올려 놓고, 오른팔을 무릎 위에 고이고 손가락을 뺨에 대고 미소지으며 생각에 잠긴 모습…. 이 미륵보살상은 우리 나라 최초의 반가사유상으로,  6세기 중엽 광대뼈가 나온 얼굴 가득 미소를 띤 한국적 보살상을 성공적으로 나타낸 우아한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1912년에 어느 일본인이 안동 지역에서 입수했다고 전해지는데, 조선총독부에 기증했던 것을 1916년 총독부박물관으로 옮겨 놓았고,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전시하고 있다.

 

 

 

 

 

 

 

 

머리에는 화려한 관을 쓰고 있으며, 여기에서 나온 2가닥의 장식은 좌우로 어깨까지 늘어져 있다. 네모꼴에 가까운 얼굴은 풍만한 느낌을 주며, 광대뼈를 나오게 하고 입가를 들어가게 하여 미소 띤 얼굴을 만들었다.

늘씬하고 가는 허리가 신라 불상의 전형을 보여준다. 두 팔에는 팔찌를 끼었고, 왼손은 반가(半跏)한 오른발을 잡고 있으며, 오른손은 오른쪽 무릎에 팔꿈치를 얹고 손가락을 볼에 대어 사유(思惟)하는 상을 나타내었다. 하반신에 걸친 치마는 배 앞에서 매듭을 지어 내려오면서 도식화된 옷주름을 가늘게 표현하였고, 왼쪽에 1가닥의 끈이 드리워졌다.

 

 

 

 

 

 

 

 

상체는 당당하지만 쭉 곧고 늘씬한 모습이어서 중국 북위 말 이래의 우아하고 귀족적인 형태미를 능숙하게 표현하고 있다. 하체에서는 우아한 곡선미를 느낄 수 있다. 또한 왼쪽 허벅지에 올려놓은 오른쪽 다리의 약간 치올린 무릎과 종아리가 이루는 곡선미에서도 충분히 느낄 수 있으며, 굽힌 두 팔에서도 잘 묘사되고 있다. 늘씬한 팔이나 체구에 비해서 손이나 발은 상대적으로 큼직한 편이다. 전체적으로 탄력이 있고 매끄러우며 부드럽고 율동적이어서 보살상의 우아한 모습을 한층 더 돋보이게 한다.

목 뒤로 돌아 양 어깨를 감싼 천의(天衣)는 새의 깃털처럼 치켜 올라갔다가 다시 가슴쪽으로 흘려내려 왼쪽 다리에서 교차한 다음, 양 무릎을 지나 두 팔을 감아 내렸다. 하체에 입은 치마는 다소 두툼해 보이는데 U자형 주름이 능숙하게 새겨져 있다.

발을 올려 놓은 타원형의 대좌에는 연꽃 무늬가 새겨져 있으며, 머리 뒷부분에 흔적만 있을 뿐 광배는 없어진 상태이다.

 

 

 

 

 

 

 

83호 반가사유상이 연꽃 모양의 연화관을 쓰고 있는 반면, 78호 반가사유상은 태양과 초승달을 결합한 독특한 모양의 탑형 보관을 쓰고 있다. 이는 일월식 삼산관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연화관에 비해 화려한 모습으로 눈길을 끈다.

 

 

 

 

 

 

늘씬한 체구, 어깨의 새 깃 같은 옷자락, 자형의 천의 자락, 규칙적인 옷주름 등은 중국 북위 양식을 계승한 동·서위 말 내지 북제(北齊)·북주(北周) 초기 양식의 반가사유상과 매우 친연성이 강한 것으로 생각된다.

 

전체적으로 균형잡힌 자세, 아름다운 옷주름, 명상에 잠긴 듯한 오묘한 얼굴 등으로 보아 한국적 보살상을 성공적으로 완성시킨 6세기 중엽이나 그 직후의 작품으로 생각된다. 신라의 것으로 보는 것이 통설이지만, 백제나 고구려의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1963년 방사선 투과법으로 촬영한 결과 내부의 결함이나 고친 흔적이 없으며, 재질이나 만든 기법이 매우 특이함이 밝혀졌다. 머리 부분과 몸체 부분을 따로 주조한 다음 연결, 용접하여 만들어졌음이 확인되었다.

 

 

 

 

 

 

※ <국보 제78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국보 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고화질 사진 => http://blog.daum.net/kheenn/158550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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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제작국 논란

 

뛰어난 예술성을 갖춰 각각 국보 78호와 83호 지정된 금동반가사유상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불교조각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 불상 대부분 그렇듯 이 금동반가사유상들도 명문이 남아 있지 않아 연대와 제작국, 정확한 명칭이 알려지지 못한 채 국보 78호와 83호 등 국보 번호로만 명명돼 왔다. 더욱이 이 불상들은 발굴조사를 통해 세간에 알려진 것이 아니라 일본인 약탈범들에 의해 강탈된 것을 박물관에서 돈을 주고 사거나 개인이 소장하고 있던 것을 기증 받은 것이기 때문에 이 불상의 정확한 출처를 확인하기는 더욱 어려웠다. 이로 인해 학계에서는 양식과 재질 등의 특징만으로 이 반가사유상이 삼국시대 작품인 것에는 의견을 같이 했지만 제작국에 대해서는 이견이 많아 오랫동안 논쟁이 돼 왔다.

국보 78호와 83호 금동반가사유상이 삼국 중 어느 곳에서 제작되었는가에 대한 문제에 대해 제일 먼저 견해를 밝힌 이는 서울대 김원룡 교수였다. 김원룡 교수는 1961년 「사상계」에 기고한 글을 통해 “국보 78호 반가사유상은 근엄하고 비례가 비현실적이며 도식화 된 점을 감안하면 신라의 작품일 것으로 보인다.”며 “이에 비해 정교한 비례미와 사실적으로 묘사된 국보 83호 불상은 백제의 작품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동국대 황수영 박사는 『한국문화사대계4』(1970년)를 통해 “국보 78호와 83호 불상 모두 신라의 작품일 것”이라고 추정했다. 그는 일본 동경대 세키노 교수의 관련 글과 국립경주박물관장을 역임한 바 있는 일본인 학자 오사가 씨의 인터뷰를 통해 국보 83호 불상이 경주 남산 인근에서 출토된 것으로 신라의 작품으로 추정했다. 또 국보 78호 불상 역시 일본인들의 증언으로 미뤄볼 때 경북 안동 지역에서 출토된 것으로 신라의 작품임에 틀림없다고 강조했다. 황 박사는 “반가사유상이 많이 제작됐던 시기는 삼국시대의 막바지 통일 격동기에 해당하는 것으로 이 시기 신라지역을 중심으로 미륵신앙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며 “이런 이유로 신라 지역에서 유독 미륵보살 반가사유상이 많이 조성됐을 것”이라고 밝혔다. 황 박사의 이 같은 주장도 어디까지나 추정에 불과할 뿐 학계에서는 여전히 이견이 많았다.

홍익대 김리나 교수는 「삼국시대 불상 연구의 제문제」라는 논문을 통해 “국보 78호 반가사유상의 경우, 천의(天衣)가 몸 뒤에서 U형으로 길게 늘어지게 표현된 점이나, 일월식보관의 형태 등을 주목하면 백제의 보살상과 일본 사비시대 보살상과 유사한 점들이 발견된다”며 “이런 점들로 미뤄보면 이 불상은 백제계 반가사유상으로 유추해 볼 수 있다”고 반박했다. 김 교수는 이어 “국보 83호 불상은 이 반가사유상과 유사한 상의 하반부가 경북 봉화에서 발견됐고, 이 반가사유상과 유사한 목조 불상이 일본 교토 호류사에 봉안돼 있는데 이 절의 창시자 진하승(秦河勝)이 신라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점을 유추하면 신라의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에 대해 강우방 교수는 『금동일월식삼산관사유상』과『금동삼산관사유상』이라는 책을 통해 “국보 78호 불상은 고구려에서 제작한 것이며, 국보 83호 불상은 백제에서 제작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강 교수는 “태양과 달을 묘사하고 있는 보관의 화려함과 어깨에서 갑자기 넓어지고 끝이 뾰족해 지면서 탄력 있게 뻗어 올라간 천의를 두르고 있는 국보 78호 사유상은 역동적 영기(靈氣)를 표현한 고구려 미술의 특징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며 “이는 강서대묘의 사신도에서 표현된 무늬 양식과 유사하다”고 밝혔다. 강 교수는 이어 “78호에 비해 사실적이며 조형미가 뛰어난 83호 불상은 6∼7세기 불교미술의 꽃을 피웠던 백제 양식에서 비롯됐다”고 강조했다.

이처럼 국보 반가사유상의 제작국에 대한 논쟁이 끊임없이 제기됐지만 아직까지 이렇다할 결론을 내리지는 못했다. 누구의 주장도 가설일 뿐 이를 확증할 자료를 제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반가사유상에 대한 명문이 발견되기 전까지는 이 불상의 제작국 문제는 학계의 영원한 숙제로 남을 수밖에 없다.

 

- 출처 : <법보신문> http://beopbo.com/news/view.html?category=171&no=39849§ion=93

 

 

 

 

 

 

※ 반가사유상

반가사유상은 석가가 태자였을 때 생로병사의 인생에 무상함을 느끼고 중생들은 구제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고뇌하는 태자사유상(太子思惟像)에서 유래된 도상이다. 불교 교리의 발달에 따라 석가모니가 열반한 후 인간 세상에 나타나 한 사람도 빠짐없이 중생을 깨달음의 경지로 인도하겠다는 미래불인 미륵불 신앙으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출가 이전 석가가 태자 때의 모습은 도솔천(兜率天)에 상주하면서 장차 용화수 아래에서 중생 제도하기를 기다리는 미륵보살의 모습과 비슷하다. 그러므로 미륵보살상도 반가사유 모습으로 조성하게 되었다. 이처럼 반가사유상은 처음에는 태자반가사유상으로 조성되다가 점차 미륵보살반가상이 만들어지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반가사유상도 태자상과 미륵상 등 두 종류가 있다.

반가사유보살상의 원형은 간다라 조각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인도에서는 간다라와 마투라에서 3세기경 불좌상의 양 협시의 형식에서 출발하여 단독상으로 변한 것으로 추측된다. 초기에는 흔히 태자의 말 찬타카와 마부 칸타카와 이별하는 장면으로 표현되며 명문에는 흔히 태자사유상(太子思惟像)으로 기록된다.

중국에서는 5세기 말 북위시대 운강석굴에서 교각미륵상과 함께 불좌상의 협시로서 나온다. 이후 6세기 후반의 북제시대에 성행하였으며, 단독상으로 태자사유상이라 새긴 것도 있다. 간혹 '용화수사유상(龍華樹思惟像)'이라는 명문도 발견되고 있다. 용화수는 석가여래의 제자로서 미래에 성불하리라는 언약을 받고 도솔천에 올라가 있는 미륵불이 석가 입멸 후 56억 7천만 년이 지난 뒤에 이 세상에 나타나서 남아 있는 모든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용화수 밑에서 세 번의 설법을 한다고 하는 미륵불의 하생(下生)을 상징하는 것이다.

우리 나라에서는 삼국시대에 각국이 6세기 중반경부터 반가사유상을 만들기 시작하여 통일신라 초까지 집중적으로 조성되었다. 우리 나라에서 태자사유상으로 만들어진 확실한 예는 아직 발견되지 못하며 모두 미륵보살반가상으로 이해되고 있다.

 

 

 

 

※ 세계 최고의 반가사유상

 

 

● 고구려의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국보 제118호) / 6세기 후반, 삼성미술관 리움

 

 

1944년 평양시 평천리에서 공사를 하던 중 출토된 작은 보살상으로 높이 17.5㎝이다. 전면에 녹이 많이 슬었고 오랫동안 흙속에서 침식된 흔적이 뚜렷하며, 불에 탄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아쉽게도 턱을 괴고 있었을 오른팔이 사라지고 없다.

 

 

출처: 문화재청

 

 

 

 

●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국보 제83호) / 7세기 전반, 국립중앙박물관

 

출토지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1920년대 이후에 발견되어 오랫동안 덕수궁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었다. 머리에는 삼면이 각각 둥근 산 모양을 이루는 관을 쓰고 있어 ‘삼산관반가사유상(三山冠半跏思惟像)’으로도 불린다.

 

제작 국가에 대하여는 백제와 신라의 두 가지 의견이 있다. 그러나 경북 봉화북지리 석조반가상과 형태나 옷주름 처리 등에서 유사성이 지적되고 일본 교토 고류사(廣隆寺) 목조반가사유상과 매우 비슷한데 고류사의 창시자인 진하승이 신라인이라는 점에서 백제보다는 신라에서 제작되었을 가능성을 높여 준다. 제작 연대는 대체로 7세기 전반으로 추정된다.

 

 

출처: 문화재청

 

 

 

 

● 고류지 목조미륵보살반가사유상 (일본 국보 1호) / 7세기 초, 일본 교토 고류지(광륭사)

 

 

일본이 자랑하는 반가사유상으로 신라인이 만든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위의 금동미륵보살반가상(국보 제83호)과 비교해보면 머리에 쓴 삼산관이나 오른손으로 턱을 살짝 받치듯 생각에 잠긴 모습, 오른 다리를 왼쪽 무릎위에 살짝 올려놓은 모습, 옷주름이 늘어져 있는 좌대, 발을 둔 모습 어느 하나 닮지 않은 데가 없다.

 

신라인 진하승이 고류지를 창건하며 모신 불상으로 재질이 적송(춘양목)으로 밝혀졌다. 지금의 상호는 19세기말 메이지시대에 뜯어 고쳐진 것이라고 한다. 금동미륵반가상과 닮은 순박한 얼굴이었던 것을 날렵한 일본 불상의 모습으로 바꾸었다는 것이다. (※ 자세한 내용=> http://blog.daum.net/kheenn/6399889 참조)

 

 

출처 : 네이버 미술작품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