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산하와 문화재

선조의 피난길을 밝히기 위해 불탄 파주 화석정

모산재 2017. 7. 18. 22:11

 

율곡의 고향인 파주시 파평면 율곡리, 임진강을 내려다보는 언덕에 서 있는 화석정(花石亭).

 

임진년인 1592년 4월 13일 700여 척의 함선으로 부산에 상륙한 왜군은 조령을 넘어 4월 28일 신립이 이끄는 조선군을 충주 탄금대에서 패퇴시키고 한양으로 진격한다. 29일 패전 소식을 들은 선조는 다음날인 30일 새벽 2시 억수 같이 쏟아지는 빗속에 궁궐을 버리고 바로 피난길에 오른다. 

 

왜란에 대비해 주장했던 십만양병설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율곡은 미래를 예견하고 드나들던 화석정 기둥과 서까래에 들기름을 먹여 두었다고 하는데, 4월 29일 밤 선조가 강을 건널 때 이항복이 화석정에 불을 질러 어둠을 밝히고 무사히 강을 건널 수 있었다고 전한다. 부산에 상륙한 지 불과 20여 일 지난 5월 3일 한양은 왜군에 유린되고 만다.

 

 

 

정자 양쪽에는 화염에 싸인 정자의 불빛을 등에 지고 선조가 강을 건너 도망가는 것을 지켜보았을 560년 된 느티나무 노거수 두 그루가 양쪽에 서 있어 그 날을 증언하는 듯하다.

 

 

 

 

 

 

 

화석정이 있던 자리는 원래 고려 말 유학자인 길재가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들어서자 벼슬을 버리고 돌아온 고향마을에서 후학을 양성하던 곳이었는데, 그가 세상을 떠난 뒤 그를 추모한 서원이 세워졌다 나중 폐허가 되었다고 한다.

 

정자는 세종 25년(1443년) 율곡의 5대조가 처음 세웠고, 김천 출신의 문인으로 파주 발랑리에 묻힌 이숙함(1429~?)이 화석정이라 명명하였으며, 율곡 때에 중수되었다. 율곡은 여가가 날 때마다 이곳을 찾았고 관직을 물러난 뒤에는 이곳에서 제자들과 여생을 보내면서 시와 학문을 논하였다고 한다.

 

 

 

 

 

 

 

'花石亭' 현판은 박정희의 글씨. 문화재 곳곳에 남아 있는 그의 필적을 만나는 맘이 씁쓸하다. 민주주의를 유린한 독재자의 글씨는 명필에 버금갈 만하지만, 이완용의 명필이 어디 감흥을 주던가...

 

 

 

 

 

 

정자 내부 뒷면에는 율곡이 8살에 이곳 화석정에서 지었다는 '8세부시(八歲賦詩)' <화석정시>를 새긴 편액이 걸려 있어 눈길을 끈다.

 

 

 

 

 

 

林亭秋已晩   숲속 정자에 가을이 이미 깊은데
騷客意無窮   소객('시인'을 일컫는 말)의 마음은 끝이 없구나.
遠水連天碧   멀리 흐르는 물은 하늘에 닿아 푸르고
霜楓向日紅   서리 맞은 단풍은 햇살에 붉었네.
山吐孤輪月   산은 외로운 둥근 달을 토해내고
江含萬里風   강은 만리 바람을 머금었구나.
塞鴻何處去   변방 기러기는 어디로 가는지
聲斷暮雲中   울음 소리는 저문 구름 속으로 사라지누나.

 

 

5언 절구도 아닌 5언 율시로 운을 맞추고 승(承)과 전(轉) 구절을 완벽한 대구(對句)로 소화해 낸 재능도 재능이려니와, "騷客意無窮"이나 "山吐孤輪月"과 같은 정서의 표현에 감탄하다가도 아무려면 인생의 깊이에 도달하기 어려운 8살 아이가 쓴 것일까 하는 의문이 절로 든다.

 

 

 

230년 된 향나무 노거수

 

 

 

 

 

 

정자 바로 앞으로는 임진강이 도도히 휘돌아 흐르고 있다. 고려의 도읍지였던 개성이 지척이고 밤낮으로 배가 드나들었을 임진강, 그러나 지금은 민간인의 출입이 불가능한 분단의 현장이 되었다.

 

 

 

화석정 앞을 흐르는 임진강

 

 

 

 

 

 

2km쯤 하류에 임진강 유일의 섬 초평도가 자리잡고 있다. 50만 평의 제법 큰 섬으로 예전에는 논이었지만 한국전쟁 뒤 사람이 살지 않는 땅으로 남겨져 지금은 생태계의 보고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