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산하와 문화재

사적 제104호, 남원 황산대첩비지

모산재 2017. 4. 26. 16:57

 

전북 남원군 인월 소재지 서쪽 2km 지점, 낙동강(남강) 상류인 람천 가까운 작은 반월형 산언덕에는 사적 제104호 황산대첩비터가 자리잡고 있다. (동쪽 자락에는 판소리 명창 박초월 생가가 자리잡고 있다.)

 

작은 숲이 있는 평지의 공원을 지나면 삼문이 솟아 있고 그 안으로 1973년에 세운 황산대첩비각과 파비각(破碑閣)이 보인다. 파비각에는 해방 직전 일제가 파괴해버린 황산대첩비를 보존하고, 대첩비각에는 1957년에 모각한 황산대첩비를 세워 두었다.

 

 

 

 

 

 

 

 

고려 말, 왜구의 노략질이 극성을 떨던 시절, 바로 이곳이 이성계가 왜구를 크게 무찌른 황산대첩의 현장이다.

 

고려 우왕 6년 (1380년) 9월, 금강 어귀 진포에서 최무선 등의 공격을 받아(진포대첩) 퇴로가 막힌 왜구들은 퇴각하며 지리산을 넘어 운봉현을 불사르고 인월역에 주둔하면서 광주를 거쳐 도망치려 하였다. 도순찰사로 임명된 이성계는 퇴로를 막고 소년 왜장 아지발도의 투구를 쏘아 벗기자 퉁두란(이두란)이 이마를 쏘아 죽이고 대승을 거두었다는 전설이 남기고 있는 전투가 바로 황산대첩이다.

 

 

 

 

 

 

 

 

이듬해 다시 이곳을 방문한 이성계는 자신과 휘하 장수의 이름을 암벽에 새겼으니 이것이 어휘각이다. 그리고200여 년이 지난 1577년(선조 10년)에 전라도관찰사 박계현이 태조가 승전보를 올렸던 황산이 지명이 바뀌어 잊혀져가니 비석을 세우는 것이 좋겠다는 건의를 하여 왕명에 의해 황산대첩비가 세워졌다.

 

 

비문 기록을 보면 아군보다 열 배가 넘는 왜적을 대파함으로써 만세에 평안함을 이루었으니 이 업적을 기려 비석을 세운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안내판

 

 

 

 

 

 

삼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대첩비각, 왼쪽 언덕 위에 파비각이 보인다.

 

 

 

 

 

파괴된 비석을 복원한 비석을 보존하고 있는 대첩비각

 

 

 

 

 

 

그러나 지금 어휘각과 대첩비는 그 잔해만이 남아 있다. 패망을 앞둔 일제는 1943년 전국 경찰에 항일의식을 북돋는 반시국적 유물들을 파괴하라는 비밀 지령을 내렸고 어휘각은 1945년 1월17일 새벽에 폭파되었다. 400년 동안 보존되어 오던 대첩비는 글자를 알아보지 못하게 정으로 쫀 뒤 폭파하였다.

 

1957년 파손된 귀부(龜趺)를 짜맞추고 비교적 온전한 이수(螭首)는 옛 모습을 되찾았으나 조각난 비신은 어쩔 수 없이 검은 대리석으로 다시 만들어 대첩비각 안에 보존하고, 폭파된 비신은 따로 파비각(破碑閣)에 보존하게 되었다.

 

 

 

일제가 파괴한 비석 잔해 보존되고 있는 파비각

 

 

 

 

 

 

황산대첩비 서쪽 암벽에는 특이한 구조를 가진 전각이 보이는데 어휘각(御諱閣)이란 전각이다.

 

 

 

 

 

 

어휘각은 석벽에 이성계가 자신과 8원수 4종사의 명단을 새기게 하여 황산대첩이 자신만의 공로가 아니라 여러 충신들의 공로임을 알리는 내용의 어휘(御諱)를 새겨 만든 비전(碑殿)이다.

 

황산대첩비와 함께 일제가 비전을 폭파하고 어휘를 쪼아버려 글씨를 알아볼 수 없게 만들었는데, 1973년 다시 어휘각을 건립하여 훼손되었지만 글씨가 새겨진 돌을 보존하고 있다.

 

글씨를 보존하기 위해 절벽에 세우다보니 정면 앞 기둥 네 개는 길고 뒷면 기둥 네 개는 짧은 특이한 건물 구조를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