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6일 일요일 / 둔황
가이드가 기차를 타지 못하는 초유의 돌발 상황.
여행에서 별일이 다 생기기도 하지만 이런 경우도 있을까. 어쨌든 이미 일어난 일을 어쩌겠는가. 다행히도 중국인보다 더 중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송희 양이 역할을 잘 해 내며 연락을 취하여 새벽녘에야 급행열차를 타고 따라잡은 허광씨와 합류할 수 있었다.
밤새 달리는 기차 속에서 우리는 백주와 맥주를 마시며 긴장을 풀었다. 새벽녘에 잠시 눈을 붙였는가 싶었는데 어느새 둔황(유원)역에 도착했다. 아침 8시 20분.
둔황역(옛 유원역)에는 현지 가이드 김철규 씨가 나와 맞이한다.
역 주변에서 아침 식사를 한 다음 대기된 버스를 타고 둔황으로 출발한다.
시커먼 모래사막, 멀리 보이는 바위 구릉... 수 년 전에 단 한번 왕복했던 길이지만 사막 풍경은 매일 다니면서 본 것처럼 눈에 익었다.
철규 씨가 고비의 3대 식물이 무엇인지 아느냐고 묻는다.
실크로드 두번째 여행인데, 고비의 식물을 어찌 모를까.
"낙타풀!"
"홍류!"
" ......."
딱 여기까지다. 사실 아는 사막 식물 이름은 이 둘밖에 없지 않은가.
낙타풀은 자타가 공인하는 콩과의 사막식물로 이름이 풀이지 실제로는 바늘보다 굵은 억센 가시가 촘촘하게 나 있는 관목이다. 수분이 거의 없는 모래 언덕에도 자라는 억센 생명력을 자랑하는데, 사막을 건너는 낙타에겐 생존을 보장하는 최후의 먹이풀이라 할 수 있다.
홍류는 우리 이름으로는 위성류인데, 영명으로 흔히 타마리스크라 부른다. 사막에서도 물기가 있는 주변 지역에서 붉은 꽃을 피우는데, 나무 줄기가 버들 같아서 홍류(紅柳)라 부른다.
그러면, 나머지 하나의 고비 식물은...?
철규 씨가 말한다. 그건...
쇄양(鎖陽)이라는 이름의 기생식물이란다. '사막의 인삼'이라고도 부른다는데, 강정제로 소문나 있단다.
철규 씨의 설명만으로는 알 수가 없어 인터넷 검색을 하여 보니 학명은 Cynomorium songaricum. 사막 지대에서 야생 말의 유정이 땅에 떨어져 남근처럼 자란다는 속설이 있으며 육종용(오리나무더부살이)처럼 꽃대가 자라고 땅속 줄기는 비늘 같은 껍질이 즐비하며 근맥이 서로 엉키어 버섯류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소과백자(小果白刺, Nitraria sibirica)'라는 남가새과 나무를 숙주로 하여 기생하는 식물이다.
다음 이미지가 바로 쇄양이다.
그리고 함께 앉은 H양의 사랑 이야기를 들으며 어느 새 우리 숙소인 둔황산장에 도착한다. 수 년 전에 왔을 때도 머물렀던 곳이다. 나무통 욕조가 그대로인 욕실에서 몸을 씻은 다음 점심 식사를 한다.
점심 식사 후 둔황의 첫 방문지는 옥문관(玉門關).
옥문관은 둔황에서 서북쪽으로 90㎞ 떨어져 있다. 둔황에서 7리가 떨어져 있다는 칠리진(七里镇)을 지나 둔황을 가로지르며 흐르는 당허(党河)를 따라 양관 방향으로 가는 포장도로를 달리다, 서천불동과 당허저수지(党河水库)를 지날 무렵부터는 비포장 길로 들어서게 된다. 1시간 반쯤 걸린다.
옥문관 입구에는 독특한 형식의 출입문을 세워 놓았다.
매표소 맞은편에 조그마한 옥문관 박물관이 있는데, 그곳에는 옥문관 터에서 발견된 죽간 등이 전시되어 있다.
옥문관이란 이름은 곤륜산의 '옥이 들어오는 문'이란 뜻으로 지어진 이름이다. 남쪽에 있는 양관이 타클라마칸 사막 남쪽 쿤룬산맥을 따라 이어지는 실크로드 남로의 관문이라면, 옥문관은 투루판을 지나 타클라마칸 북쪽 톈산산맥의 오아시스를 따라 가는 북로 쪽 관문이라 할 수 있다.
이 유적이 옥문관 유적임을 확인한 것은 영국의 고고학자이자 문화재 약탈꾼 오렐 스타인.
그는 1907년 둔황 서쪽, 카라놀 남쪽 사막 가운데에서 높이 9m, 사각형 모양을 한 보루의 잔해를 발견하고 이것을 위먼관이 번창하였을 때의 유적이라고 확인하였다.
지금 남은 이 유적에는 '소방반성(小方盤城)'이라는 이름을 붙여 놓았다. '네모난 쟁반 모양의 작은 성'이라는 뜻인데, 동서 24m에 남북 26m, 높이 9.7m로 된 작은 성의 모양을 반영한 이름이다. 성문은 북쪽과 서쪽에 하나씩 나 있다. 북문은 실크로드 북로를 향하고 서문은 실크로드 남로로 이어지는 문이다.
이 옥문관을 지나면 그야말로 생명이라곤 발견하기 어려운 막막한 타클라마칸사막으로 들어서게 된다. 이른바 '악마의 늪'이라 불리는 죽음의 사막 *'백룡퇴(白龍堆)'가 펼쳐지는 곳이다. 현장에 앞서 400년에 인도로 향했던 법현이 "나는 새도, 달리는 짐승도 없다. 아무리 둘러봐도 망망하여 어디로 가야 할지를 알 수 없고, 오직 언제 죽었는지 모르는 사람들의 해골만이 길을 가리키는 표지가 되어준다."라고 기록한 곳이다.
* 백룡퇴(白龍堆) : 뤄부포호[羅布泊]와 위먼관[玉門關] 사이에 펼쳐진 사막지대. 해발고도는 약 1,000m이며 북동쪽에서 남서쪽으로 뻗어 있는 사막이 백룡의 형상 같다고 하여 바이룽두이(白龍堆)라 부른다.
옥문관은 기원 전 2세기 한무제가 설치하였다. 그는 하서회랑을 공략하고 주천군을 설치하면서 가장 서쪽의 변방 요새에 '옥문관도위'를 두었다.
그런데 한무제가 한혈마를 얻기 위해 처남인 이광리(李廣利)를 페르가나(대완) 원정(BC 104∼BC 103)에 보내기까지는 옥문관은 둔황의 동쪽에 있었고, 이후에 서쪽 교외로 옮겨지면서 양관과 함께 서역으로 통하는 중요한 관문이 되었다. 위진남북조 시대까지만 해도 옥문관은 '군영이 즐비하고 거마가 폭주'하는 곳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8세기 당나라가 쇠퇴하면서 옥문관은 다시 동쪽으로 옮겨져 안서(安西)현 동쪽의 분수령 근처로 후퇴하였다.
뜻밖에 옥문관 주변은 물이 고여 있고 갈대 등 푸른 풀들이 자라는 소택지가 형성되어 있다. 알아보니 이것이 1960년대에 사라졌다는 로프노르호(羅布泊)로 흘러들어가는 소륵하(疏勒河)와 연결되고 있다. 제법 실개천이 흐르는 듯한 풍경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다.
19세기말, 스웨덴의 탐험가이자 지리학자인 스벤 헤딘에 의해 사막에 묻혀있던 실크로드의 고대 도시 누란(樓蘭) 유적이 발견되었다.
기원 전 2세기 누란은 한나라와 흉노의 틈새에서 줄타기를 하며 실크로드 남로 로프노르 호수 부근에서 번성한 오아시스 도시였는데 기원 5세기 무렵 역사에서 홀연 사라지고 만다. 그 원인에 대해 헤딘은 '방황하는 호수' 설을 내세웠다. 타클라마칸 사막의 지형 변화로 로프노르 호수가 말라버렸고 누란도 사라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헤딘은 로프노르 호수가 1600년을 주기로 남북으로 이동한다고 주장했다.
사라진 누란 왕국과 누란의 미녀 미이라 이야기를 결합하여 이노우에 야스시(井上靖)는 <누란>이라는 소설을 썼다.
로프노르 호숫가에서 평화롭게 살아가는 작은 오아시스 나라 누란. 하지만 흉노와 한나라 틈바구니에서 왕은 아들 중 하나는 흉노에, 다른 하나는 한나라에 인질로 보내야 했다. 누란 왕이 죽고 흉노에 인질로 갔던 안귀가 왕위에 오르자 한나라를 멀리하고 흉노와 가까운 지낸다. 그러자 한나라는 안귀를 살해하고 한나라에 인질로 있던 안귀의 동생 위도기를 왕위에 앉힌다. 위도기는 한나라의 협박으로 로프노르를 떠나 멀리 선선으로 이주하기로 한다. 이주 며칠 전, 안귀의 부인이 목숨을 끊었다. 누란 사람들은 부인의 시신을 로프노르 호수가 바라보이는 언덕에 묻어준 뒤 누란을 떠났다.
세월이 흘러 누란이라는 나라는 모래 속에 묻힌 채 지상에서 사라져갔다. 로프노르 호수도 점점 물이 마르더니 자취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그로부터 천오백 년이 넘는 세월이 흘러 스웨덴 탐험가 헤딘이 누란의 유적을 찾아 나선다. 그의 눈에 반짝이는 물줄기가 하나 들어왔다. 다시 살아난 로프노르 호수. 헤딘은 로프노르 호숫가에서 한 구의 미라를 발굴했다. 이 미라의 주인공이 로프노르 호수를 떠날 수 없었던 여인, 안귀의 부인이 아니었을까.
이 미라의 주인공이 우루무치박물관에 누워 있는 '누란의 미녀'라는 것이다.
습지에는 갈대류들도 풍성히 자라고 있다. 아마도 옥문관이나 장성을 쌓을 때 이들 갈대를 베어서 토성의 재료로 썼을 것이다.
소택지 주변에 가득 자라고 있는 콩과 식물. 감초 종류로 보이는데 보랏빛 꽃을 피우고 열매를 달았다.
옥문관 성문지 주변 구릉. 성벽의 일부였을까...?
옥문관 옛터를 둘러본 다음 그곳에서 서쪽 4km 지점에 있는 한장성(漢長城)으로 향한다.
갈대와 진흙을 섞어서 층층히 쌓은 모습에 눈에 띈다. 오랜 세월의 풍화작용에 갈대층에 두껍게 남고 흙층은 패어나가 가로줄을 길게 그어놓은 듯한 모습이 되었다.
한장성은 한나라 때 만든 장성이라는 뜻. 만리장성의 원형이라는 장성이 어째서 관문인 옥문관과 멀리 떨어진 서북쪽에 자리잡고 있을까...
한장성은 기원 전 2세기 초에 축조한 것으로, 명나라 때 산해관에서 가욕관까지 개축된 만리장성보다 1,500년 앞서 지은 것이다. 둔황 동쪽 안서로부터 서쪽의 로프노르 호수 부근까지 150여 ㎞에 이르는 이 한장성은 기단 너비는 3m, 높이는 2.6m 정도로 쌓았다.
기원전 221년 진이 중국을 통일한 후, 전국시대 제후국들이 축조한 장성을 하나로 잇고 보수하여 만리장성을 축조하였던 것을 한나라 때 보수하여 서쪽은 둔황에서 신장 지역까지 확장하고 동쪽으로는 길림성까지 확장하였다.
한장성은 주로 흉노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축조한 것이다.
진시황은 몽염의 10만 대군을 보내 황하 남쪽 오르도스 지역을 평정하게 하고 흉노를 황하 북쪽으로 몰아낸 뒤 장성을 쌓았는데, 흉노는 생활터전을 되찾기 위해 부족체제를 넘어 긴밀하게 결집했고 강력한 카리스마를 지닌 묵특 선우(기원전 209~174년 재위) 때에 대제국을 이루었다.
월지에 인질로 가 있던 묵특 선우는 아버지 두만 선우가 자신을 제거하려 하자 아버지를 죽이고 2대 선우에 올랐다. 그는 동쪽으로는 동호를, 서쪽으로는 월지를, 남쪽으로는 오르도스 지역을 되찾는 등 진한 교체기에 세력을 크게 확장하여 한나라와 국경을 맞닥뜨리며 대치하게 되었다.
한고조는 흉노 토벌을 위해 측근 한왕 신을 보냈지만 그는 흉노와 화평을 시도하다 고조의 책망을 득고 흉노에 투항해 버렸다. 기원 전 200년, 묵특은 한왕 신의 인도를 받아 40만 대군을 이끌고 한나라를 공격해 들어와 산서성 동쪽의 평성에 이르렀고 한고조는 이에 맞서 직접 32만의 대군을 일으켰으나 백등산에 쫓겨 들어가 7일간 포위 당한 후 항복하는 변을 당한다. 한고조는 묵특의 왕비에게 선물을 주어 겨우 장안으로 도망쳐야 했고 이후 한고조는 묵특에게 황실의 여인을 선물하고, 매년 조공을 바치기로 하였다. 공주를 선우에게 시집보내고 매년 옷감과 음식을 보내주며 관시(關市)를 여는 대신, 장성을 경계로 서로 침략하지 않기로 했다.
한고조가 죽고 혜제가 즉위하자 묵특은 고조의 비인 여태후에게 청혼의 편지를 보냈다. 여태후는 크게 노하여 흉노를 토벌하고자 하였으나 어찌하지 못했다. 이후 이런 저런 굴욕을 당하면서도 한나라는 흉노에 조공을 하며 화친정책을 유지하였지만 늘 전전긍긍하는 처지가 되었다.
문제와 경제의 평화 시기를 지나 한무제 때인 기원전 119년 위청과 곽거병을 보내 흉노를 쳐서 하남을 차지하기도 했지만, 기원전 99년에는 이릉이 흉노에 투항하고 밀리며 결국 한무제도 흉노에 대한 전쟁을 그만두게 된다.
선우(單于)는 중국의 천자 또는 황제에 해당하는 흉노제국의 대군주를 일컫는 말이다. 아래에는 여러 명의 왕을 두었는데, 이 왕은 평화 시에는 번왕이나 제후로서 다스리고 전쟁 시에는 장군으로서 싸웠다. <한서> '흉노전'에 의하면 선우라는 호칭은 탱리고도선우(撑犂孤塗單于)의 약칭으로, 탱리는 하늘, 고도는 아들, 선우는 광대함을 뜻한다. '하늘의 아들인 대군장' 선우의 위세는 중원의 황제를 떨게 했다. (흉노의 뒤를 이은 유목 부족들인 유연, 돌궐등은 '선우'라는 명칭을 쓰지 않고, 카간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였다.)
묵특이 기원 전 176년에 한문제에게 보낸 서신의 표현대로 '하늘이 점지한 대선우'가 통치하는 흉노 제국에 복속된 민족과 국가의 수는 내륙 아시아에서만 26개에 이르렀다. 제국의 경계는 동으로 한반도 북부, 북으로 바이칼 호와 이르티시(Irtish) 강변, 서로는 아랄 해, 남으로는 중국의 위수(渭水)와 티베트 고원, 그리고 카라코람 산맥을 잇는 거대한 영토를 포함하게 되었다.
이렇게 대단한 위세를 떨치며 한나라를 괴롭힌 흉노는 한나라에게는 그야말로 악몽이었을 것이다. 이 흉노를 막아내는 것이야말로 절대절명의 과제였고, 이를 위해 장성을 쌓았던 것이다.
한과 흉노의 전쟁은 많은 세월이 흐른 후 흉노가 분열되어 남흉노의 초대 선우 호한야 선우(재위 48∼53)가가 한에 항복하면서 일단락되었다. (이 호한야 선우는 왕소군을 아내로 맞아들인 호한야 선우가 아니며, 그는 이 호한야 선우의 할아버지로 동명이인이다.)
지평선으로 이어지는 한장성의 흔적. 오랜 세월 사막의 풍화작용에 의해 무너져 사라지고 있는 모습이다.
검게 보이는 무더기는 성을 쌓는 데 이용된 갈대 등 풀이 풍화된 것.
옥문관과 한장성을 떠나면서 문득 떠오르는 이백의 시! 이역만리 흉노와의 싸움터인 이곳에 사랑하는 임을 떠나보낸 중국 여인들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을 듯하다.
長安一片月(장안일편월) 장안엔 한 조각 외로운 달
萬戶擣衣聲(만호도의성) 집집마다 다듬이 소리
秋風吹不盡(추풍취부진) 가을 바람은 그치지 않는데
總是玉關情(총시옥관정) 님이 있는 옥문관을 떠올리게 하누나.
何日平胡虜(하일평호로) 언제 오랑캐를 평정하는 날이 와서
良人罷遠征(양인파원정) 낭군님이 싸움터에서 돌아올까.
호텔로 돌아와 저녁 식사를 마치고 명사산(鳴沙山)으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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