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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대만 여행

실크로드(15) 투루판, 고창고성과 지하수로 카레즈(칸얼징)

by 모산재 2014. 8. 15.

 

 

교하고성을 나와 간 곳은 바로 부근에 있는 투루판 칸얼징박물관

 

 

솥단지처럼 움푹 들어간 해저 분지 투루판은 50만 인구에 면적이 한반도와 비슷한 22만 제곱 킬로미터이다. 대부분의 땅은 증발량이 많은 초건조 기후로 불모의 사막, 하지만 사막의 한 복판 오아시스 지대의 농경지는 풍부한 수량으로 당도가 빼어나기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대규모 포도농장이 들어서 있고 또 면화가 재배하되고 있다.

 

 

투루판의 오아시스는 바로 '카레즈', 또는 '칸얼징(坎儿井)'이라 부르는 관개시설에 의해 유지되고 있다.

 

 

 

 

칸얼징박물관으로 들어서 지하수로 칸얼징을 관람한다.

 

 

 

 

 

 

칸얼징(카레즈)은 건조 지대에 물을 끌어들이기 위한 지하 수로.

 

연간 16mm밖에 되지 않는 강수량에 3800mm에 이르는 엄청난 증발량을 자랑하는 사막 기후는 지상으로 흐르는 물을 모두 증발시키고 투루판은 해저의 오아시스마을이 되었다. 아이딩 호수조차 사라져가는 열악한 기후를 극복하기 위해 증발을 최대한 막는 지하수로를 건설한 것이다. 천산의 물을 끌어들인 이 지하 수로가 바로 카레즈(또는 칸얼징)이다.

 

이 지하수로는 투루판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건조지대에 널리 형성되어 있다.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카레즈(karez)', 이란에서는 '카나트(qanat)'라 하며, 모로코에서는 '레타라(lettara)', 북부 아프리카에서는 포가라(foggara), 중국에서는 '칸얼징(坎儿井)' 또는 '칸얼즈(坎儿孜)'라 부른다.

 

 

 

 

칸얼징 박물관의 칸얼징 시의도(示意圖)는 천산의 설산의 물을 끌어들여 만든 칸얼징의 수로 개념을 시각적으로 잘 보여 주고 있다. 

 

 

 

 

 

 

투루판 시내의 지도를 보면, 칸얼징 지도인가 싶게 '칸얼즈(坎儿孜)' 이름으로 가득하다.

 

 

 

 

 

 

칸얼징은 20~30m 간격으로 수직굴을 먼저 판 다음 이를 서로 연결해서 만든 것이다.

 

 

칸얼징은 기원전 6~5세기부터 만들기 시작하였다고 하는데, <사기(史记)>에는 '우물도랑'이란 뜻의 '정거(井渠)'로 기록되어 있다. 칸얼징은 투루판분지에 1,200여 개가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으며, 그 길이는 무려 5,000㎞를 넘는다고 한다. 투루판의 칸얼징은 대부분은 청나라 시기 이후에 만들어진 것이라 한다.

 

 

 

수로의 물은 너무도 맑고 힘차게, 그리고 시원스럽게 흘러내려 투르판의 모든 생명들을 적셔 준다.

 

 

 

 

 

지하수로에서 올려다본 수직동굴. 도르래로 연결하여 수로를 관리하도록 해 놓았다.

 

 

 

 

 

수로에는 쪼그려 앉은 인부들이 곡괭이로 수로를 파는 모습을 재현해 놓았다.

 

허리도 펴지 못하고 너비 1m, 앉은 키 높이로 무려 5,000km의 거미줄 같은 지하 수로를 완성하고 풍요로운 오아시스를 건설한 이들의 도전정신에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다.

 

 

 

 

 

투루판의 칸얼징은 진시황의 만리장성, 수양제의 경항 대운하(베이징~항저우, 3200km)와 함께 중국의 3대 역사로 꼽히고 있다.

 

 

 

 

 

 

수로로 연결된 지역에는 포도농장이 형성되어 있다. 포도는 이렇게 건조한 바람이 잘 통하는 포도 건조창(凉房)에서 말린다.

 

고온 건조한 기후는 투르판의 과일 당도를 최상으로 만들어 포도와 하미과 등은 세계적인 맛을 자랑한다. 최열(最熱), 최저(最低), 최한(最旱)의 악조건을 가진 투루판은 칸얼징을 통해 이렇게 최감(最甘)의 땅이 되었다.

 

 

 

 

 

 

칸얼징을 구경한 다음, 동쪽으로 30㎞를 달려 화염산 부근에 있는 고창고성(高昌古城)으로 향한다.

 

 

 

불타오르는 듯한 화염산을 배경으로 고창고성은 거의 폐허만 남아 있어 쓸쓸함을 더한다. 기원전 1세기에 건설된 고창성은 13세기 몽골에 점령되면서 역사에서 막을 내린다. 

 

 

 

우리가 볼 수 있는 유적지는 당나라 때 완성된 것인데, 도시 안의 유적 대부분은 9세기 이후 위구르가 지배하던 고창국이 남긴 것이다. 고창국은 거대한 성의 도시, 그래서 '성(城)'이라는 뜻의 위구르어 '카라호자 불렸다.

 

 

 

 

투루판에는 7천 년 전 신석기시대부터 사람들이 산 흔적이 있으며, 3천년 전부터 정착 농경이 시작되었다. 원래 토착민들은 텐산 산맥 북쪽에서 유목하다 남하한 이란계 차사인(車師人)으로 전한 시대(기원전 3~기원후 1세기)에 야르호토(교하고성)를 도읍 삼아 차사전국을 세웠다. 그후 한나라와 흉노가 번갈아 통치하다 5세기 중엽 북량이 지방정권을 세운다.

 

 

 

460년부터 누란에 의해 정복되어 감씨, 장씨, 마씨에 의한 고창국이 이어지다 501년부터 국씨(麴氏) 고창국이 들어서 640년 당에 멸망될 때까지 140여 년간 통치한다. 전성기때 인구 8만명에 불교 승려만 8천명이 살았다. 하지만 고창 국왕이 흉노와 손을 잡자 당태종은 군대를 보내 고창국을 무너뜨리고 초토화한다. 이 때 보내진 당나라 장수 중에 나중에 백제를 멸망시킨 소정방이 있었다.

 

 

9세기 중엽부터는 북쪽 초원에서 남하한 위구르족이 차지했으며, 13세기 초 몽골군의 포위 공격으로 반 년만에 고창 왕이 전사하면서 차카타이 칸국의 지배를 받았다. 17세기 중엽부터 청나라가 설치한 중가르부에 속했다가 1881년 신장성이 신설되자 행정구역으로 독립했다.

 

 

 

폐허의 고창고성은 당나귀가 끄는 관광객용 마차로 붐비고 있다. 드넓은 고창고성, 호젓이 걸으며 감상에 잠기는 것도 좋을 듯한데, 마차가 날리는 먼지를 견디기 어려워 보인다. 당연한 듯 당나귀 마차를 타고 그냥 걸어가는 관광객은 보이지 않는다.

 

 

 

 

 

지금은 사원과 궁전 유적 정도만 형태가 남아 있고 일부 어색하게나마 복원되어 있을 뿐, 대부분의 유적은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파손되어 있다.

 

 

땅을 파내어 건물을 만든 교하고성과는 달리 고창고성은 흙벽돌로 쌓아 올려 만든 건축물들인데, 그만큼 무너지기도 쉬웠던 모양이다. 게다가 흙벽돌을 견고하게 하기 위해 버들가지나 마른풀을 섞었는데 이 흙벽돌을 부수어서 비료로 쓰는 바람에 훼손이 심해진 것이라 한다. 르콕 일행이 이곳을 찾았을 때 고창고성 곳곳은 경작지가 되어 있었다고 한다.

 

 

 

 

 

고창고성의 둘레는 5.4㎞이고 면적은 220만 ㎡이다. 고성은 외성과 내성, 궁성(宫城)으로 나뉜다. 외성의 벽의 두께는 12m이고 높이는 11m이다. 남면에는 3개의 성문이 있고 나머지 삼면에는 성문이 각각 2개씩 있다. 외성은 농민들이 다 뜯어 가져가서 없고 내성만 남아있다.

 

 

 

당나귀 마차는 폐허 사이로 난 길을 달려 외성 남서쪽에 있는 큰 사찰터로 간다.

 

 

이 사원에는 '당승강경적불사(唐僧讲经的佛寺)'라는 이름을 붙여 놓았다. 당나라 승려들이 불경을 공부하던 사원이라는 뜻이다.

 

 

 

 

 

사원 오른쪽 마당에는 주발을 엎어 놓는 듯한 독특한 건물을 복원해 놓았다. 이곳은 40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건물로 630년 현장법사가 고창국에 들렀을 때 불자들에게 설법했다는 곳. 바로 강경당(講經堂)이다.

 

 

 

 

 

내부로 들어서니 건물은 뜻밖에 지붕이 없이 뻥 뚫려 있다.

 

 

 

 

 

아래는 방형, 위는 원형의 독특한 건축구조인데 이는 설법이 잘 들리도록 소리의 울림을 조절하는 기능을 한다고 한다.

 

 

사원 한가운데는 많은 감실이 있는 방형탑이 자리잡고 있다. 측면에 불감이 많이 있어 '만불탑(万佛塔)'으로 불린다. 많은 부분이 복원되어 2000년 첫 여행 때와는 달라진 모습이다.

 

 

 

 

 

 

 

627년, 현장이 온다는 소식을 들은 고창국 왕 국문태는 이오국(지금의 하미)까지 모시러 갔다. 국문태는 현장이 자신의 등을 밟고 왕좌에 앉아 설법을 하게 하는 등 극진히 대접하였다고 한다. 현장은 법회를 열며 2개월을 머물러야 했다. 국문태는 고창국에 머물며 중생들을 이끌어 달라고 애원을 넘어 협박하다시피 하며 현장을 붙들려 하였지만, 현장은 단식을 통해 천축에 가려는 의지를 꺾지 않았다.

 

결국 국문태는 고집을 꺾을 수밖에 없었고, 현장은 천축에서 불경을 얻고 오면 1년 머물기로 약속을 한다. 국문태는 현장을 위해 서역 24개국에 통행을 허락하라는 조서를 써주고 말 4마리, 부역꾼 25명, 가사 30벌, 황금 100냥, 은 200매, 비단 500필 등을 하사했고, 떠나는 날에는 현장을 100리 밖까지 배웅까지 했다고 한다.

 

그로부터 10여 년 후 현장이 불경을 구해 당나라로 돌아가는 길에 다시 고창국에 들러 국왕에게 감사의 뜻을 전하려 했으나, 안타깝게도 640년 서돌궐과 결탁한 고창국은 당나라에 의해 멸망 당하고 국문태도 죽임을 당한 뒤였다.

 

 

 

 

 

내성 북부 정중앙에는 높이 솟은 '커한바오(可汗堡)'라는 궁전 유적이 있다. 9세기 위구르가 통치하던 시절 왕(가한, 칸)을 상징하는 뜻에서 커한바오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성곽 외곽을 나오는데, 고성 빈터에 당나귀 한 마리.

 

 

 

무심코 들여다보는데, 이 당나귀 민망한 모습을 보여준다...

 

 

 

 

 

 

13세기 후반 몽골에 점령 당한 이후 고창고성은 역사의 침묵 속으로 들어선다. 오랜 세월이 흐르며 성은 폐허가 되었다.

 

18세기 청 건륭제는 몽골의 준가르를 몰아내고 신장을 손에 넣었다. 수많은 세력들이 다투는 기복무상한 역사 속에서 투루판은 중국의 역사 속으로 편입되었다.

 

오늘날 50만 인구 중에서 위구르족이 주류를 이루고 있지만 신장이나 티벳 등이 일반적으로 그러하듯 한족이 끊임없이 유입되며 한족 인구가 급속히 증가하고 있다. 중국 내에서 가장 강성하고 가장 이질적인 민족인 티벳과 위구르를 제어하기 위한 중국의 교묘한 정책에 따른 현상이다. "위구르인은 어머니가 낳고 한족은 기차가 낳는다."는 속담처럼 위구르를 말살하려는 한족의 대규모 이주정책은 위구르인들의 운명에 암운을 드리우고 있다.

 

 

 

 

다음 여정은 가까운 화염산 골짜기에 있는 베제클리크천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