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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대만 여행

실크로드(14) 투루판, 두 강 사이 절벽 위의 교하고성

by 모산재 2014. 8. 13.

 

 

8월 5일 토요일 오전 / 투루판 교하고성

 

 

 

 

7시 30분에 일어나 8시를 지나 교하고성(交河古城)으로 출발.

 

 

교하고성은 투루판의 오아시스 지대 맨 서쪽에 자리잡고 있다. 이름 그대로 두 갈래 하천이 흘러 만나면서 그 사이에 형성된 버들잎 지형 위에 건설된 성이다. 강물이 깎아 나간 땅은 30m 높이의 깎아지른 듯한 벼랑이 사방을 두르고 있는 자연 요새다.

 

 

 

절벽 아래 하천을 따라 백양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곁에는 포도밭이 푸르게 펼쳐져 있다.

 

 

 

 

이곳이 교하고성의 남쪽 입구, 남문이다. 두 갈래의 하천이 만나는 곳 서쪽에 자리잡고 있다. 이 길로 고창고성으로 실크로드가 이어졌다 한다.

 

 

 

 

 

 

2000년에 처음 찾았을 때와 별 다름없는 모습인데, 2006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남문 앞에는 1997년에 세운 문물진열관이 있다.

 

 

 

길가에 푸르게 자라고 있는 것은 날카로운 가시가 뻬곡히 나 있는 낙타풀이다.

 

 

 

 

 

너비 300m 길이 1,650m에 달하는 길쭉한 지형의 고성은 떡버들잎 모양 같기도 하고 항공모함 같기도 하다.

 

 

원주민들은 이곳을 '야르호토'라 부른다고 하는데, '야르'는 위구르어로 '절벽'을 '호토'는 몽골어로 '도시'를 뜻한다고 한다. '절벽 위에 건설된 도시'가 교하고성인 것이다.

 

 

 

 

 

※ 교하고성 안내도(구글맵 이용)

 

 

 

 

 

투루판의 무더위야 소문나 있는 것이지만 아침부터 그야말로 불가마 속에 들어 있는 듯 드겁다. 안내원은 보도블록이 깔려 있는 길로만 다니게 통제한다.

 

 

 

 

출입문이 있는 남쪽 구역은 병영, 중앙은 민가와 수공예, 관청과 왕궁, 북쪽은 사원구역으로 되어 있다.길을 중심으로 왼쪽은 주민, 병사 주거지역(민가는 땅을 파서 만들고 위층은 병사용 주거), 오른쪽은 수공업과 관청, 사찰지구로 구분된다.

 

 

 

 

 

 

고성의 동쪽 아찔한 절벽 위에서 바라본 하천 오아시스.

 

 

 

 

 

요망대(了望臺). 성내 치안을 유지하는 건물이었던 듯...

 

 

 

 

 

관청이 있었던 자리로 들어가는 입구.

 

 

 

 

 

넓은 마당으로 들어서면 사방 벽에는 터널 형태로 파내서 만든 방들이 들어서 있다. 왕궁과 왕의 집무실, 관리들의 사무실 등이 자리잡은 곳이다.

 

 

 

고창고성이 흙벽돌을 쌓아 만든 도시라면 교하고성은 흙을 파내려가 만든 것이다.

 

 

 

 

 

 

동문 자리는 막아 놓았다. 그 아래로 보이는 오아시스.

 

 

 

 

 

주변은 민간 가옥이 들어선 곳.

 

 

안내판에는 이 집이 8개의 방과 가정 불당, 그리고 우물을 가진 전형적 민거라고 적어 놓았다.

 

 

 

 

 

 

사원 구역으로 가는 길. 길을 따라서 맨 안쪽(북쪽)으로 들어가면 사원구역이다.

 

 

 

 

 

사원 구역에서 제일 먼저 만나는 것이 최대 사원인 대불사(大佛寺).

 

 

원래 명칭이 아니라 가장 큰 절집이라 해서 붙인 이름인 듯하다. 넓이는 5100㎡ 정도의 대형 사찰인데, 무너지기 모습을 상상해보려 해도 그림이 잘 떠오르지 않는다.

 

 

 

 

 

안으로 들어서니 이렇게 넓은 법당 마당이 펼쳐진다. 그리고 거기에 자리잡은 대법당.

 

마당 왼쪽으로 고루(鼓樓) 오른쪽으로 종루(鐘樓) 터가 남아 있다. 이 절터에는 당나라 현장법사가 숙박했다는 기록도 있다.

 

 

 

 

 

대법당 앞마당에는 깊이가 보이지 않는 우물이 있다. 아마도 하천 바닥보다 더 깊었을 것이니 30m 이상이었을 것인데 120m라는 기록도 있다. 

 

 

 

 

 

대불전 뒤에는 거대한 탑이 무너진 모습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교하고성의 집들이 땅을 파서 만든 것과는 달리 사원 건축은 흙을 쌓아서 만든 건축물이다.

 

원래 16m 높이였다고 하는데 감실에 부조된 불상은 두부가 파괴된 채 흔적을 남기고 있다.

 

 

 

 

 

감실에는 불상의 흔적이 남아 있다.

 

 

 

 

 

폐허 곳곳에는 콩과 식물인 낙타풀이 자라고 콩꽃을 닮은 붉은 꽃을 피웠다.

 

 

 

 

 

대불사 뒤쪽으로는 대불사보다 조금 작은 동북불사(東北佛寺)가 자리잡고 있다.

 

 

 

 

 

 

탑림(塔林)

 

101개의 탑이 있는데 중앙탑만 비교적 양호하게 남았다.네 모퉁이에 각 25좌식 방형의 작은 탑이 있었다.

 

탄소연대측정으로 1640년의 역사를 가진 것으로 밝혀졌다. 차사전국시대 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서북대불사(西北小佛寺)

 

4~5세기에 건립. 10세기 전후에 고쳐 세움.

 

 

 

 

 

 

 

 

최근 고고학자가 고성을 발굴하는 도중에 최초로 지하 사원과 차사국의 귀족 무덤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천변 오아시스지대에는 제법 풍성한 들판이 형성되어 있다.

 

 

 

 

 

 

 

3,000년 전부터 이 강에는 사람이 살고 있었으며 기원 전 1세기 경, 교하고성은 야르호토라 불리는 차사전국(車師前國)의 왕성으로서 고창고성과 함께 투르판 지역의 중심지였다.

 

처음에는 불교를 신봉하던 이란계 사람이 살았다. 전한 시기(기원 전 1세기)에서 북위 때(5세기)까지 차사국은 700가구에 인구 6050명, 병사 865명의 조그마한 왕국이었다. 차사국은 교통의 요지에서 한나라와 흉노족의 틈바구니에서 시달리는데 한무제가 흉노족을 완전히 몰아낸 후 평화가 찾아든다. 이후 4~7세기 한족 왕조인 고창국 시절 트루판은 평화를 누리며 번영한다.

 

하지만 640년 고창국은 당에 멸망되고 안서도호부가 설치된다. 그리고 8세기말에는 토번에게 함락당하고 뒤이어 위구르의 지배를 받았다. 이 시기 토번과 위구르에 의해 이란계 원주민들은 무자비하게 학살되었고, 13세기 이후엔 몽골군이 교하고성, 고창고성을 폐허로 만들어버렸다.

 

현재의 유적은 주로 고창국 이후의 유적이다.

 

 

 

 

교하고성을 노래한 시로 당나라 이기(李頎, 690~751)가 쓴 '고종군행(古從軍行)'이 널리 알려져 있다. 당나라가 안서도호부를 설치하여 고창국을 다스리던 시기, 병사들이 겪어야 하는 고통을 절절이 노래한 시다.

 

白日登山望烽火   한낮에는 산에 올라 봉화를 바라보고

黃昏飮馬傍交河   황혼에는 교하 가에서 말에게 물을 먹이네

行人刁斗風沙暗   행인들은 조두와 모래바람 소리에 암울한데

公主琵琶幽怨多   공주의 비파 소리에는 원한이 서려있네

野營萬里無城郭   야영하는 만리에는 성곽도 하나 없는데

雨雪紛紛連大漠   눈비는 넓은 사막에 어지럽게 날리네

胡雁哀鳴夜夜飛   호기러기 슬피 울며 밤마다 나는데

胡兒眼淚雙雙落   오랑캐 아이의 눈에는 두 줄기 눈물이 흘러내리네

聞道玉門猶被遮   옥문관은 아직도 막혀 있다는 말이 들리는데

應將性命逐輕車   병사들은 목숨 걸고 전차를 따라가야겠지

年年戰骨埋荒外   해마다 병사들의 뼈는 사막에 묻히는데

空見蒲桃入漢家   부질없이 바라보네 포도가 한나라 왕실로도 들어오는 것을

                   

* 조두(刁斗) : 놋쇠로 만든 한 말 들이 솥으로 군중(軍中)에서 낮에는 음식을 만들고 밤에는 이를 두드리며 경계를 하는 데 썼음

* 경차(輕車) : 전차. 한문제(漢文帝) 때의 명장 이광(李廣) 장군이라고 풀이하기도 함. 하도 날래서 흉노들이 ‘飛將軍(비장군)’이라 불렀다고 한다.

 

 

 

흉노와 전쟁을 하던 한나라 때를 배경으로 전쟁에 동원된 병사들이 사막 속에 묻혀 죽어갈 때 한나라 왕실에는 트루판의 포도가 들어온다는 풍자 가득한 이 시는 죄없는 병사들과 민중들만 고통받는 게 아니라 정략 결혼의 희생물이 된 공주의 아픔을 표현하고 있어 흥미를 끈다.

 

 

비파를 연주하는 공주는 한무제 형의 딸 유세군. 흉노를 몰아내기 위해 터키계 유목 민족인 오손국왕과 동맹하려던 한무제는 형의 딸 유세군을 공주로 가장하여 늙은 오손국왕에게 정략적으로 시집을 보낸다.

 

고향으로 돌아갈 날만 손꼽아 기다리는 비련의 유세군. 하지만 늙은 오손국왕은 죽고 유세군은 오손의 풍속에 따라 국왕의 손자에게 다시 시집을 가야 하는 운명이 된다. 유세군은 한무제에게 제발 돌아가게 해 달라고 애원하였지만 그 간절한 청은 거절당한다. 결국 오손국왕의 손자인 손잠에게 시집가 딸을 낳게 되었고 그녀는 한을 지닌 채로 이민족의 땅에서 생을 마쳤다고 한다. 그녀가 힘들 때마다 켰을 비파의 소리는 또 얼마나 애절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