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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대만 여행

실크로드(19) 둔황 막고굴, 불교 예술의 최고 성지

by 모산재 2014. 8. 20.

 

♣ 8월 7일 월요일  /  둔황 막고굴

 

 

 

2,000년에 이어 두번째로 막고굴(莫高窟)을 찾는다. 당시에는 불교미술에 대해서 거의 무지했고 관심도 별로 없었는데, 언제부턴가 박물관을 찾는 것도 흥미로워지고 불교미술이 친근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둔황시 남동쪽 외곽지대로 나서자 목화와 옥수수밭이 펼쳐진다. 차가 시내에서 멀어지자, 둔황이 있는 오아시스 지대가 마치 지평선 끝에 바다처럼 푸르게 보인다.

 

 

막고굴은 둔황 남쪽 25km 지점, 명사산 동쪽 끝 당하(党河: 치렌산맥과 쿤룬산맥의 동북쪽에서 발원하여 둔황을 지나 고비사막에서 사라지는 강)가 흐르는 강가 절벽에 자리잡고 있다.

 

막고굴 바로 앞에는 당하 강줄기를 따라 띠 모양의 긴 오아시스지대가 펼쳐지고 백양나무와 느릅나무가 한껏 자라고 있다. 자작나무처럼 하얀 줄기를 뽐내는 백양나무는 잎사귀를 떨며 햇살을 부지런히 반사하며 시원한 그늘을 만들고 있다.

 

 

 

 

 

막고굴 비문에 따르면, 서기 366년 낙준(樂僔)이라는 승려가 수행 길에 올라 해질 무렵 명사산 동쪽 기슭에 이르렀는데 석양이 마침 맞은편의 삼위산(三危山)을 비추자 산봉우리가 장엄한 금빛으로 빛나며 천만 부처님이 광명을 내는 것 같고 천상의 향음신(香音神)이 춤을 추고 있는 듯하여 장인을 불러 석굴을 만들었다고 한다.

 

막고굴은 16국 시대인 366년부터 건립되기 시작하여 위진남북조, 수, 당, 오대(五代), 서하(西夏), 원(元)에 이르기까지 13세기까지 1천여 년에 걸쳐 조성되었다. 당의 무측천(武则天) 시기에 건립된 석굴이 이미 천개를 넘어 천불동(千佛洞)이라고 불렸다. 1,600여 m에 달하는 현존 492개의 석굴에는 헤아릴 수 없는 벽화와 2,400여 점에 달하는 불상 및 소조상 남아 있어 세계 최고 규모를 자랑하는 불교 예술의 보고라 할 수 있다.

 

 

 

 

 

 

막고굴에 이르면 으레 기념 사진을 찍는 곳, 막고굴의 중심인 9층 누각.

 

막고굴에서 가장 큰 불전인 96번굴 북대불전이다. 겉으로는 9층누각이지만 그 속은 하나로 트여 있어 거대한 미륵불을 모시고 있다. 높이 35.5m. 원래는 5층누각이었던 것을 훼손이 심해 1936년 9층누각으로 다시 지은 것이다

 

 

 

 

 

 

우리 일행도 기념 사진을 남긴다. 찍사인 나는 없다.

 

 

 

 

 

막고굴은 건축, 조각, 벽화로 이루어진 예술작품으로, 현존 492개 석굴은 선굴(禅窟), 전당굴(殿堂窟), 탑묘굴(塔庙窟), 영굴(影窟) 등 다양한 형태가 있으며, 불상을 모시고 벽화를 그린 신전으로 승려가 종교 활동을 하는 장소였다. 초기의 석굴은 가운데 탑주(塔柱)를 설치한 형태였으며, 수당시기의 석굴은 평면사각형인 복두정(覆斗顶)으로 뒷벽에 불감(佛龛)을 두었다. 당대 후기에서 송원대에는 벽화 불감이 동굴 중앙의 불단을 대체하여 대형벽화에 자리를 내주는 형태로 변화하였다.

 

 

 

우리가 볼 수 있었던 석굴은 모두 11개. 하지만 사진 촬영이 금지 돼 있어 구글 검색을 통하여 구할 수 있었던 이미지로 부족하나마 찬란한 둔황 예술을 감상해 보기로 한다.

 

 

 

96호굴

막고굴의 정중앙에 우람하게 솟아 있는 9층누각이 있는 굴이다. 북대불전으로 불리며 높이 35.5m의 초대형 미륵불(북대불)은 붉은 입술과 가슴, 눈매와 턱선이 여성적으로 여왕의 모습을 하고 있다. 당나라 초기 695년 중국 역사상 유일한 여성 황제인 측천무후의 명으로 조성되었는데, 측천무후를 모델로 한 것으로 보인다. 원래는 노출된 불상. 사천성 낙산대불 (75m), 아프가니스탄 바미얀 석불( 55m, 2001년 탈레반에 의해 파괴됨)에 이어 세번째로 큰 불상이다. 하단에는 통풍 채광구가 뚫려 있다. 

 

 

 

 

 

 

 

 

130호굴

굴 앞마당에서 지하로 들어간다. 당나라 전성기인 현종 때 29년에 걸쳐 조성된 26m 높이의 대형 미륵불로 '남대불'이라 부른다. 돌을 조각하고 흙을 붙여 만든 석태니소. 입구 양쪽 목심불 파괴된 흔적. 왼손가락을 무릎 위에 얹은 모습, 오른손가락 4마디. 오른쪽 벽에는 15m의 비천상이 있고, 천정은 용그림. 바닥벽돌은 서하시대의 것. 입구 벽면에는 기증자 이름이 새겨져 있다.

 

 

 

 

 

 

 

 

 

 

148호굴

당나라 전성기인 755년에 조성. 입구에는 인왕상. 주실에는 15m 길이의 금박 와불상(열반상), 여성스런 몸매. 뒤에는 72명의 제자(보살, 나한, 천왕) 불상들이 석가모니의 죽음을 맞아 혹은 울부짖고, 혹은 자해하며 슬퍼하며 서 있다. 천장은 천불화인데 채색 보존 상태가 아주 양호하다. 빛으로부터 보호가 잘 된 탓이라 한다. 천정은 천불상(20*50), ,천정이 관 모양으로 되어 있는 점이 열반상과 관련된 듯하다.

 

 

 

 

 

 

미륵상생경변

 

 

 

 

약사경변

 

 

 

 

 

 

237호굴

당나라 중기. 보현보살(코끼리) 관세음보살 문수보살(사자) . 천장은 달리는 토끼 세 마리가 원형으로 그려져 있는데 ‘3토천정화’라 부른다. 막고굴 안내자는 토끼가 상징하는 것은 알 수 없다고 말하며 원형은 영원함을 상징하는 것이라 대답한다.

 

왼쪽 벽 위쪽으로 아미타불 제자들 모아 설법하는 장면. 여러 가지 악기를 연주하는 모습, 막고굴과 돈황의 상징이 되어 버린 유명한 ‘반탄비파(返彈琵琶)’상이 자리잡고 있다. 비파를 머리 뒤로 들고 연주하는 여인의 맵시가 스냅 사진처럼 자연스럽고 경쾌하게 느껴진다.

 

 

 

 

 

 

입구 벽면 신라왕자 화랑의 모습 

 

 

 

 

 

 

249호굴

입장권에 그려진 수렵도, 위진남북조 초기(서위) 묘소 벽화 양식. 석가모니불이 여성적 모습으로, 양쪽에 가섭 아난 존자 사라짐.

청나라 때 수리. 머리가 12인 신수.

 

천장에는 말을 타고 사슴, 들소, 멧돼지, 상상속 머리 둘인 호랑이가 그려진 수렵도. 눈 4개인 아수라도, 양쪽 벽면은 천불도. 찬블도 중앙에는 설법도.

 

 

 

 

아수라도

 

 

 

 

수렵도

 

 

 

 

설법도

 

 

 

 

 

 

259호굴

개방 동굴로 가장 오래됨. 위진남북조 초기 북위시대. 석가모니불과 다보불이 나란히 모셔져 있는데, 옷 주름이 서역풍이고 아라비아 건축양식을 보이고 있다. 오른쪽 입구 첫 번째에 유럽인들이 ‘동방의 모나리자’라고 부르는, 미소가 아름다운 비로자나불의 법신불인 선정불이 있다. 양쪽 벽면 감실 속 보살상(위), 참선승(아래)

 

 

석가모니불과 다보불

 

 

 

 

선정불=동방의 모나리자

 

 

 

 

 

 

427호굴

전실에는 송나라 때의 사천왕상이 모셔져 있다. 안쪽 주실은 수나라 때 조성되었고 세 벽에는 과거, 현재, 미래를 상징하는 연등불, 석가모니불, 미륵불 등 삼존불이 모셔져 있다. 내려다보는 부드러운 시선이 느껴진다. 그러나 러시아 군들이 불상에 입힌 금을 깎아내 가는 등 훼손하였다. 벽과 천장은 천불화로 꾸며졌다.

 

 

벽과 천정 맞닿은 부분에 비천상 연속무늬.

 

 

 

 

 

 

 

 

424호굴 - 가장 작은 꼬마 동굴

 

 

 

328호굴

당 초기. 석가모니와 가섭, 아난존자 모심. 왼쪽 맨 앞쪽의 공양보살상이 미국인에게 약탈되었다는데, 좌대를 떼어낸 흔적이 선명히 남아 있다. 약탈된 보살상은 보스턴대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입구쪽 벽면엔 서하시대 공양 보살의 채색과 선이 완벽한 모습으로 보존되어 있다. 역시 빛과 인간의 간섭을 덜 받은 탓이다.

 

 

 

 

보살과 아난

 

 

 

 

아난

 

 

 

 

사라진 공양보살상(보스턴대)

 

 

 

 

 

 

 

16~17호굴

16호굴 속에 17호굴이 있다. 당나라 말. 석가모니불이 모셔져 있고 천장은 봉황과 용, 벽은 천불도. 벽화는 돋을새김되어 있다.

 

 

 

 

 

17호굴은 장경굴로 16호굴 옆에 감추어져 있었다.

 

1900년 6월 22일 석굴을 지키던 태청궁 도사 왕원록이 모래가 가득 쌓인 16호굴을 청소하다가 막혀 있던 밀실을 발견하였다. 길이가 2.6m, 높이 3m의 이 석굴에는 5만 점의 고문서가 잠들어 있었다. 4세기에서 11세기에 걸친 오호십육국 시대에서 북송까지의 고문서와 고대악기, 고화, 고서 등등이었다. 1907년 오렐 스타인이 왕원록에게 소액의 기부금을 주고 약 7,000점의 유물을 유출하여 대영박물관에 가져가면서 세계의 주목을 받게 된다. 1908년 프랑스인 폴 펠리오가 또 한 번 혜초의 왕오천축국전 등 7,000점의 유물을 프랑스로 유출하였다.

 

 

 

 

이 굴의 불상은 오화상이라고 불린 당나라 고승 홍변의 상이다. 어려서 출가하여 이민족의 언어와 티베트어를 익힌 역경승으로 역장사원의 귀족자제학교에서 문화교육과 종교적인 사무를 주관하였는데, 그의 사후 문하의 승려들과 본가에서 홍변의 기념 사당으로 바꾼 것인데 바로 17호굴 장경동이다. 당 선종 때(848년) 16호굴은 돈황의 유력가인 장의조가 그를 도와준 고승 홍변의 자문을 받아 만든 것이다.

 

 

 

 

우리가 구경한 석굴은 여기까지다.

 

당나라 전성기의 화려한 주불과 아름다운 비천상, 산수화와 장구 치는 그림이 있다는 172호굴, 막고굴 정문 중심이 되는 곳으로 석가모니 전생이 간다라 풍의 벽화로 남아있다는 428호굴, 호선무를 추는 여인과 우리 나라 왕자를 포함한 각국 왕자상이 있다는 220호굴, 백제관음상과 거의 같은 벽화가 있다는데 428호굴 등 우리가 구경할 수 없는 석굴은 아쉽지만 인터넷 검색을 통해 구경할 수밖에...

 

 

 

 

오후는 자유시간이라 돈황 시내 구경에 나섰다.

 

돈황의 번화가 네거리에는 돈황의 상징이 된 반탄비파상(反歎枇琶像)이 중심을 차지 하고 있어 관광객의 눈길을 끈다.

 

 

 

 

 

이 반탄비파상은 비파를 머리 뒤로 넘겨 자유자재로 연주하는 모습을 표현한 것으로, 위에서 보았듯 막고굴 237호굴 벽화 기악합주도 속 그림을 돈황의 마스코트로 삼아 설치한 것이다.

 

 

 

그리고 둔황 시장 거리를 구경하기도 하고...

 

 

 

 

 

 

둔황박물관을 잠시 둘러 보기도 한다.

 

 

 

 

 

하지만 막고굴이 박물관이나 다름없으니, 박물관은 그다지 볼 것이 없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조선족 식당인 고려회관에서 저녁식사를 하고, 실크로드 마지막 일정이 남아 있는 우루무치로 돌아가기 위해 유원역(둔황역)으로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