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제클리크천불동(柏孜克里克千佛洞)은 고창고성에서 그리 멀지 않은 화염산 계곡에 자리잡고 있다.
천산의 만년설이 녹아 흘러내려 화염산을 가로질러 투르판으로 흘러내리는 무르투크 강을 10km 정도 거슬러 올라가 강줄기가 완만하게 서쪽으로 구부러지는 화염산 뒤의 골짜기 서쪽 절벽에 있다.
불의 땅이라 화주(火洲)로 불린 투루판, 화염산은 투루판의 상징이기도 하다. 화염산은 하나의 산이 아니라 동서 98㎞, 폭 9㎞에 이르는 작은 산맥이다.
풀 한포기 없는 화염산은 전체가 붉은 색을 띠고 있는데다 산줄기에 구불구불한 작은 골들이 새겨져 불꽃이 타오르는 듯한 형상을 하고 있다. 여름철 뜨거운 햇살을 받은 지표면 온도가 80℃까지 올라가간다니 그야말로 불타는 산이나 다름없다.
<서유기>에서 손오공은 나찰녀의 남편 우마왕으로 변신하여 나찰녀의 부채 파초선을 훔쳐와서 구도의길을 막는 무시무시한 화염산의 불길을 잠재운다. 남쪽 아이딩을 향해 기울어져 있는 분지를 뜨겁게 달구는 투루판 분지의 특수지형 때문에 특히 화염산은 뜨겁다. 위구르인들은 화염산을 '구즈로다고'라 부르는데, '(빨간산`이란 뜻을 가진 말이라 한다.
<서유기> 영화 세트장을 지난다.
삼장법사(현장)와 손오공, 저팔계와 사오정을 형상화해 놓은 조형물이 보이고, 낙타를 타고 화염산을 트레킹을 하는 코스도 만들어 놓았다.
화염산을 가로지르는 오아시스 골짜기로 들어서 어러간 달리자 베제클리크천불동이 길 아래에 나타난다.
천불동으로 내려서는 길...
2000년에 처음 투루판을 왔을 때에는 개방을 하지 않아서 찾지 못했던 곳.
겉으로 보기에는 깨끗하게 보수되어 아름다운 모습을 보이고 있다. '아름답게 장식한 집'이라는 뜻을 가진 베제클리크라는 위구르 이름이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
이 석굴은 7∼12세기 석굴이다. 당나라 때인 8세기에 조성이 시작되어 위구르 시대 (9~10세기)의 것이 가장 많고, 원나라 때인 14세기까지 계속된다.
둔황 막고굴과 함께 실크로드의 대표적인 불교 유적으로 전체 80여 개 석굴 가운데 50여 개의 석굴 내부에 벽화가 그려져 있다.
사각형에 돔 천장, 원형에 볼트(궁륭)천장으로 구성되어 있는 건축 양식은 인도·이란 전통을 이어받고 있으며, 내부 벽화는 불교적인 벽화와 위구르족의 마니교적인 벽화가 함께 보존되어 있다. 대개 부처·보살의 예배상을 안치하고, 둘레 벽에는 불교적 주제에 바탕을 둔 프레스코화가 채워졌다.
베제클리크천불동은 키질석굴사원과 마찬가지로 제국주의 국가들이 파견한 도굴꾼들과 이슬람 세력들에 의해 크게 훼손당했다.
1902년부터 1914년 사이에 독일은 네 차례(1902,1905,1906년, 1914년)에 걸쳐 '탐험대'란 이름으로 르콕 등의 도굴꾼들을 투루판으로 보내 베제클릭크 제9호 굴의 서원도(誓願圖)의 거의 전부를 비롯하여 토욕구천불동의 벽화를 뜯어내 128상자의 유물을 베를린으로 가져갔다. 하지만 2차세계대전 때 박물관이 폭격되어 절반 이상이 사라져버렸다.
1909~10년 러시아 올덴부르그가 약탈해 간 수집품은 에르미타주 미술관에 보관되어 있다. 영국의 오렐 스타인은 1915년 제4호 굴사를 중심으로 약탈해 갔는데 그 수집품은 뉴델리 국립박물관에 수장되어 있다. 일본인 오타니(大谷) 탐험대가 독일 탐험대과 같은 기간 걷어간 작품들 중 상당수는 우리나라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오오타니가 약탈 문화재를 싣고 떠나는 모습
도굴꾼들이 벽화와 조각을 약탈하는 사이 금붙이를 찾아내느라 곡괭이로 파헤치는 도굴꾼들이 달려들고 농부들은 볏짚 등이 섞여 있는 유적의 흙 담장을 부숴 농토로 날랐다. 중국 관리들은 이러한 일들에 무관심하였고 유물의 해외 반출을 금지시킨 것은 1930년에 이르러서다.
우리가 내부를 볼 수 있었던 것은 모두 6개 굴이었다.
예상한 일이었지만 석굴의 보존 상태는 거의 엉망이었다. 불상은 파괴되고 없었고 벽화도 손길이 닿는 곳은 거의 훼손되고 손길이 닿지 않는 곳조차 흙칠되어 온전한 모습을 가진 곳은 없었다.
내가 대강 메모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20호굴 -보존 상태가 가장 양호한 굴. 벽면 아래 부처의 발만 남아 있어. 20호 굴은 10세기, 베제클리크석굴 조성이 절정에 달했던 위구르 왕국 시기의 벽화가 발견된 곳, 그러나 벽화를 잘라낸 흔적들만 무수히 남아 있다. 위구르 왕가의 왕과 왕비 귀족 등이 부처님께 공양 올리는 각종 공양도가 그려져 있었으나 지금은 모두 독일 베를린박물관에 보관돼 있다고 한다. 그나마 벽면에 남아있는 위구르 공주의 모습은 당시 위구르 왕가의 단면과 함께 이 석굴을 장엄했던 벽화들이 얼마나 섬세하고 우아하며 아름다웠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26호굴 - 불상 사라지고 광배 흔적만 남아 있어. 삽으로 훼손한 흔적
27호굴 - 양벽의 불상 파괴 광배만 남아. 천정에는 천불도. 보살상은 비교적 보존 상태 양호
31호굴 - 스타인이 톱으로 잘라간 자국. 흐릿한 색채의 공양도가 남아있다. 천정은 온통 흙칠. 맨 안쪽 북경의 한 교수가 흙칠을 벗겨내. 양들을 몰고 들어 와 양이 문지른 자국. 본행경도 열반변경도 공양도. 불상과 공양자들의 눈과 입 훼손. 정면 아래 와불상 파헤쳐져
33호굴 - 양쪽벽 윗부분 스타인이 잘라가 버려. 얼굴 눈 부분 훼손. 돔형 천정 흙 도배. 부처님의 장례식에 참석한 각국 왕자들을 그린 벽화가 남아 있다. 열반에 든 부처님의 모습은 사라지고 뒤에 보살과 호법신장들, 그리고 각국의 왕자들이 도열해 있는데, 관모를 한 신라 왕자가 그려져 있다는 설.
39호굴 - 천정 흙칠. 양쪽 벽화들 다 긁혀. 전면 뜯겨나간 불상자리만 남아
사진 촬영이 금지돼 있어서 인터넷에서 검색한 자료로 감상을 대신한다.
회화는 쿠처·소그디아나·당(唐)·토번 등의 영향이 섞여 있고, 동아시아·이란 취향의 근접점을 나타내나, 당대 미술의 영향이 압도적으로 강하다(7∼8세기). 그러나 벽화의 대부분은 9∼10세기 위구르 시대에 속한 것으로, 당의 양식은 차차 굳어져 정감이 조잡한 그래픽적 장식 효과가 뚜렷해진다.
그러나 석존이 전세(前世)에서 과거 부처님께 성불의 서원을 세워 수양함에 미래에 성불할 약속을 받는 것을 주제로 한 서원도(誓願圖)와 공양자(供養者) 초상화의 희귀한 유행이 있어, 아프가니스탄의 가필시국(迦畢試國)에서 유행한 '연등불수기(燃燈佛授記)'(2∼3세기) 전통이 부활한 점이 주목된다.
제16호굴 열반경변도 중 주악도(부처님 열반을 주악으로 애념하는 그림)
제9호굴 관모와 의상을 착용한 위구르 왕자 / 베를린 다렘박물관
제20호굴 꽃 공양을 올리는 위구르 공주 / 베를린 다렘박물관
제16호굴 위구르 남자 공양도
제27호굴 몽고녀 공양도
제18호굴 약사정토 변도
제24호굴 위구르 공주와 남편의 공양도
제31호굴 본행경 및 열반경 변도
제9호굴 석가가 왕이었을 때 여의불에게 공양하여 법왕으로 부르게 되었다는 것을 형상화한 그림
제9호굴 서원도
제4호굴 왕자였던 석가가 형인 라트나시킨불에게 등을 시주하는 모습
제4호굴 왕과 왕비상
위구르왕자
그런데 2009년 우리 나라 국립중앙박물관이 신장위구르 자치구와 협정을 맺어 5년간 이독 베제클리크 석굴사원 벽화를 조사하고 보존하는 작업에 들어갔다고 한다.
천불동 구경을 마치고 돌아나오는 길, 천불동 아래 골짜기에서 내려 화염산 풍경을 잠시 구경한다.
그리고 호텔로 돌아와 늦은 점심 식사를 한다.
오후에는 자유시간이 있어 피로를 풀 겸 발 마사지를 하였다.
그리고 저녁이 가까워 시간 포도농원을 방문하였는데 아쉬움이 컸다. 우리를 상대로 아주 소박한 위구르 춤을 선보인 좁은 민가의 정원에서 별 볼거리도 없고 그냥 포도 구매 외에는 할일이 없었다. 2000년에 가본 적이 있긴 하지만 포도구를 갔더라면 훨씬 좋았을 것이다.
※ 투르판 관광 안내도(구글 위성을 바탕으로 그린 것임)
저녁은 '인사동'이라는 한식당을 지나 지나 '고려촌'이라는 조선족 식당에서 삼겹살과 두부만 들어간 김치찌개에 소주잔을 기울이며 식사를 하였다.
오늘 밤은 밤새워 기차를 타고 둔황으로 이동할 예정.
투루판역은 북서쪽 화염산 너머 천산 자락에 멀리 떨어져 있는 대하연진(大河沿镇)에 있어 두 시간 전 쯤에 서둘러 나가야 할 것 같은데, 가이드 허광은 시간이 충분하다며 여유를 부린다.
한 시간 조금 넘는 정도를 남긴 시간에 투르판역을 향해 버스가 출발한다.
투루판에서 화염산 뒤에 있는 해발 800m의 기차역까지 가는 길은 솥단지 한가운데서 가장자리를 향해 점차로 고도를 높이며 나선형을 그리며 벗어나는 듯한 느낌이다. 주변의 땅도 무쇠 솥바닥처럼 시커먼 사막이다.
투루판역 가는 검은 사막 위로 저녁노을이 붉게 물들고 있다. 송희 양은 서녁 하늘을 한동안 물끄러미 바라보며 깊은 상념에 잠겨 있다.
사막은 금방 캄캄한 어둠 속에 잠기었는데 기사가 길을 잃은 듯 도착할 시간이 되었는데도 역은 나타나지 않는다. 가까스로 역을 찾았는가 싶었는데 진입하는 도로가 공사중으로 막혀 있다. 기차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다시 길을 찾아 역에 도착했을 때는 정확히 기차 출발 시간이었다.
배낭을 메고 후닥닥 뛰어 들어가는데, 가이드는 우리를 먼저 들여보내고 확인하는 절차를 밟기 위해 뒤에 남았다. 결국 가이드는 기차를 타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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