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산하와 문화재

금강소나무숲길 (2) 찬물내기샘터에서 조령성황사 넘어 소광리까지

모산재 2012. 10. 12. 19:09

 

서들골 합류 지점, 아름다운 계곡에서 충분히 쉰 다음 다시 길을 재촉한다.

 

계곡을 끼고 걷는 길은 경사가 없는 평탄한 길이어서 편안하기만 하다. 숲길 체험객의 발소리 외에는 인기척이 없는 한적한 골짜기, 갑자기 뒤쪽에서 엔진 소리가 들린다. 무슨 소린가 하고 돌아보니 밥차가 오고 있다. 찬물내기 쉼터까지 우리가 먹을 점심을 실어나르는 차다.

 

차를 지나쳐 보내고 계속 걷는 길...

 

 

 

해설사님이 갑자기 길가 언덕 위의 바위를 가리키며 꼬리진달래라고 한다.

 

 

진달래과 나무치곤 아주 늦은 시기인 7월에 잘고 소복한 흰 꽃을 피우는 나무. 하지만 꽃이 진 지 오래라 해설사님이 말해 주지 않았다면 꼬리진달래의 존재를 알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얼마를 가다가 만나는 머루. 그냥 머루인지 왕머루인지 구별이 어려운데... 잎과 마주 달린 열매가 제법 충실하게 달렸다.

 

 

 

 

다시 금강송이 군락을 이룬 곳에서 잠시 쉬어간다.

 

 

 

 

해설사님의 금강송에 대한 해설이 시작된다.

 

 

 

금강송(金剛松)은 줄기가 붉은 소나무인 적송(赤松)’의 일종으로 표준명은 금강소나무이다. 금강산 아래 울진 영덕에 이르는 태백산맥 일대에서 자라는 소나무를 가리킨다. 금강송이란 이름은 일본인 식물학자 우에키가 붙인 것으로 소나무(Pinus densiflora)의 곧은 품종이란 뜻에서 학명은 Pinus densiflora for. erecta이다. 이곳에서 나는 소나무가 봉화 춘양역에서 서울로 공급되어 '춘양목'이라 불리기도 했다.

 

척박한 지형에 자라다보니 일반 소나무보다 나이테가 3배 촘촘하여 금강석처럼 재질이 단단하다. 세포가 살아 있는 줄기의 바깥부분(변재)에 비해 죽은 세포로 이뤄진 심재는 황색 송진이 농밀하게 박혀있어 잘 썩지 않는다. 황색 속살 때문에 황장목(黃腸木)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심재율이 일반 소나무는 52%이지만 소광리 금강송은 무려 87%라고 한다. 궁궐을 지을 때 금강송부터 찾는 이유다.

 

황장목은 조선 왕실에서 건축 재료로 사용한 목재를 통칭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원래 조선 왕실에서 사용하는 소나무 관곽재(棺槨材)라는 주장도 있다. 

 

그런데 금강송은 산불이 나고나면 더 잘 자라게 된단다. 두터운 부엽층 때문에 땅에 닿지 못하던 씨앗이 산불로 표토를 만나 싹을 잘 틔우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얼마를 더 가니 옛날 주막거리가 있었다는 곳을 지난다. 

 

 

 

풀과 나무가 우거진 속에 집터로 보이는 평평한 터가 있고 돌담도 보인다.   

 

해설사에 따르면 이곳에는 주막과 함께 봉놋방이 함께 있어 보부상이나 선질꾼들이 하룻밤 묵어가기도 했단다. 봉놋방은 주막집의 부속채로 여러 나그네가 함께 묵을 수 있던 큰 방.

 

 

날이 저물면 길 옆 외딴 주막집에서 하룻밤을 보내며 술도 마시고 노름도 하며, 주막집 주인이 없으면 빈집에 쉬어가며 솥단지 밥을 지어먹고 다녔다고 한다.

 

술만 파는 주막도 있었고 봉놋방을 갖춘 주막도 있었단다. 봉놋방은 무료 서비스, 술값만 받고 숙박비는 따로 받지 않았단다. 마을 주민들과 친하지 않았던 선질꾼들은 주막집 주인들과는 친하였다. 봉놋방에는 나무베개인 목침(木枕)만 있고 이부자리는 없었다고 한다. 나무가 많은 산골이니 추우면 불을 때면 되고 이불 관리가 어려웠던 까닭일 것이다.

 

 

소나무 숲길 구간에는 두천 주막(말래 주막), 바릿재 주막, 장평 주막(쟁패 주막), 샛재 주막, 소광리 주막 등이 있었다.

 

 

사라진 봉놋방 터엔 쇠털이슬이 이슬보다 작은 꽃을 피우고 있고, 눈빛승마는 껑충 목을 빼고 꽃차례를 올렸다. 

 

 

 

 

쯧, 이쪽의 계곡도 콘크리트로 막아 놓았다.

 

 

 

온갖 풀과 나무들이 떠내려오다 댐에 가로막혀 쌓인 채 썩어들어가 물 색깔이 흑갈색을 넘어 아예 꺼멓다. 농토도 없는 깊은 산의 자연 계곡을 왜 막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이번에도 해설사님이 못마땅해하는데, 누구나 같은 심정일 것이다. 

 

 

 

통통한 몸통을 한 이 나방은 누구?

 

 

 

계곡길을 걷다보니 소나무 대신 낙엽활엽수 사이로 걷는 길이 계속된다.

 

 

 

다리도 건너고...

 

 

 

속이 썩은 나무에 토종꿀벌이 앵앵거리고 있다. 산삼을 능가한다는 목청이 저 속에 들어 있을까...

 

 

 

연리지를 이루고 있는 참나무도 보고...

 

 

 

참나무산누에나방도 만나고... 

 

 

 

꽃을 피운 송장풀도 만난다.

 

 

 

양산 같은 꽃차례를 이룬 노란 마타리꽃, 가을이 성큼 다가선 느낌이다. 

 

 

 

앞서 가던 해설사님이 길가 절벽 앞에서 쪼그려앉으며 바위에 새겨진 글씨를 보여주며 설명하기 시작한다. 

 

 

1680년 숙종 때부터 왕실에서 쓰는 관곽재(棺槨材)와 궁궐 건축재 등을 공급하기 위하여 황장목 소나무가 분포하는 양질의 산림을 일반인이 벌채하지 못하도록 산을 막은 제도를'황장봉산(黃腸封山)'이라 하는데, 바로 이 글씨가 황장봉산의 동쪽 경계비라 한다. 

 

글씨는 작년에 숲해설가 중 한 분이 발견하였단다.

 

 

새겨진 글씨는 "黃腸封山 東界鳥城 至西二十里".

 

뜻을 풀이하면 "황장봉산의 동쪽 경계는 조성(鳥城)으로부터 서쪽으로 이십리다." '조성'은 소광리 세덕산 일대에 있는 삼국시대의 산성인 안일왕산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추정되며 조선시대에는 조성으로 불리워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더보기
실직국(悉直國)과 안일왕(安逸王)

 

삼한시대 지금의 강원도 삼척지방에 있었던 성읍국가. 신라 파사이사금 때 패망한다. 안일왕은 유일하게 이름이 전하는 실직국의 왕이다. 기원 후 50년경 울진의 파조국을 합병하나, 10년 후 강릉의 예국의 공격으로 안일왕은 울진으로 피난하였는데, 안일왕산성은 울진군 서면 소광리에 남아 있다. 울진에서는 안일왕보다 '에밀왕'으로 불려지는데, 예전 사람들이 어릴 적에 울음보를 터뜨리면 어른들이 "예 나온다 그쳐라." "예 쳐온다 그쳐라." 하고 달랬다는데, 이는 강릉지역의 예국이 쳐들어 오니까 울음을 그치라는 말로 전한다.

 

울진군 서면에는 안일왕이 피신하였으므로 왕피리라는 마을이 있고 통고천에서 발원하여 동해로 흐르는 강을 왕피천이라 한다. 왕피리에는 안일왕의 군사들이 머물렀다는 병위동, 군사들이 밥을 먹던 포전, 왕이 적에게 붙잡힌 핏골, 실직곡의 군량미를 저장하는 창고가 있었던 거리곡 등의 지명이 있다. 이웃한 삼근리의 복두괘현(일명 박달재)은 안일왕성이 함락되자 왕이 신하와 옷을 바꿔 입고 도망하다가 이곳에서 복두를 쓰지 못하고 그냥 도망한 곳이므로 두건을 걸어 놓은 고개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소광2리 금강송 군락지로 들어가는 길가에도 '황장봉계표석'이 있다고 한다.

 

 

'황장봉산'의 글씨가 새겨진 절벽 풍경

 

 

 

그리고 밥차가 기다리고 있는 찬물내기쉼터에 도착한다.

 

 

 

쉼터 오두막 뒤로는 샛재(조령)에서 흘러내리는 계곡

 

 

 

줄을 서서 비빔밥과 미역냉국을 받아들고

 

 

 

저마다 자리를 잡고 식사를 한다.

 

그 옛날 선질꾼들은 말래(두천) 주막거리에서 자고 일어나 50 킬로 이상의 소금을 지고도 바릿재에서 샛재까지의 30리를 훨씬 더 지나 느삼밭재에서 점심을 먹는다고 하였는데, 오늘 우리는 같은 말래에서 자고 그 절반 거리인 찬물나기샘터에서 점심을 먹는다.

 

그것도 멀고 힘든 길이라고 땀을 흘린 끝이라 담백한 비빔밥과 시원한 미역냉국이 입에 잘 맞으니 목으로 술술 잘 넘어간다. 

 

 

 

 

점심 식사를 마치고 이제 샛재(조령)를 오른다.

 

 

 

금강소나무숲길 1구간의 가장 힘든 코스다. 찬물내기쉼터까지는 평지에 가까웠는데, 급한비탈이 계속 이어진다.

 

 

 

 

가파른 고개를 오르며 다시 한번 바지게꾼의 소리를 떠올려본다.

 

미역 소금 어물 지고 춘양장을 언제 가노

 (후렴) 가노 가노 언제 가노 열두 고개 언제 가노

          시그라기 우는 고개 내 고개를 언제 가노

 한 평생 넘는 고개 이 고개를 넘는구나

 서울 가는 선비들도 이 고개를 쉬어 넘고

 꼬불꼬불 열두 고개 조물주도 야속하다

 

 대마 담배 곡물 지고 흥부장을 언제 가노

 오나 가나 바지게는 한평생 내 지겐가

 오고 가는 원님들도 이 고개를 쉬어 넘고

 꼬불꼬불 열두 고개 언제 넘어 고향 가노.

 

 

얼마쯤 오르자 잠시 평탄한 오솔길이 이어지고 곧게선 적송 군락이 나타난다.

 

 

 

독특한 모양으로 줄기가 벌어진 금강송 사이로 사태가 난 임도가 보인다. 해설사는 이곳 금강송을 실어내기 위해 일제가 임도를 내었다고 한다.

 

 

 

미인의 다리보다 더 아름답게 유난히 쭉쭉 벋은 금강송.

 

금강송의 특징은 옹이가 없다는 것이라 한다. 일반 소나무와 달리 금강송은 자라면서 아래쪽 가지가 절로 삭정이로 떨어지고, 덜어진 옹이자국은 시간이 지나면서 완전히 사라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목제로서의 가치가 뛰어난 것이다.

 

 

 

샛재로 오르는 길은 쉬 끝나지 않는다.

 

 

잠시 임도로 올라선 시간  

 

 

 

노랑불봉선

 

 

 

임도는 발판처럼 잠시 디뎠을 뿐 다시 산길로 접어든다. 

 

 

 

못 생겨서 살아남은 금강소나무 두 그루가 사이좋게 나란히 서 있다. 400년 수령으로 못 생겼기에 잘리지 않고 화를 면한 할아버지소나무와 할머니소나무라는데...

 

 

 

해설사는 금슬이 좋아진다며 소나무 사이에 서서 손을 잡고 사진을 찍으라고 한다.

 

 

 

그러구러 샛재에 도착

 

 

 

샛재를 넘자마자 나타나는 조령성황사(鳥嶺城隍祠).

 

여기서 지금까지 우리를 안내하던 해설사는 되돌아가고, 소광리에서 온 해설사가 임무를 이어받는다.

 

 

 

110여 년 전에 당시 상인들의 모금으로 건축되었다는 정면 1칸 측면 1칸의 작은 제당이다. 내부에는 '조령성황신위(鳥嶺城隍神位)' 라 쓴 위패를 모셔 두었는데, 원래 여자 화상이 있었지만 지금은 없어졌단다. 

 

부상(負商)들과 선질꾼들이 십이령을 오가며 장사를 할 때 이들이 주도하여 제물을 준비하여 제를 지냈으며, 신변의 안정과 가정의 안녕을 기원하고 서로의 안부를 전하고 연락을 하던 장소로 역할을 하기도 했던 곳이다. 선질꾼들이 사라진 이후에는 빛내마을에서 제당을 관리하고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바로 아래에 주막도 있어 한때는 선질꾼들이 붐비는 곳이었지만 지금은 지붕에 풀이 가득 자라는 등 을씨년스런 모습이다. 체험객 외에는 길손이 없는데, 해마다 당에서 제사를 올린 흔적이 있다고 한다.

 

 

부근에 흔하게 피어 있는 가는장구채

 

 

 

제당 옆 언덕에는 금강소나무들이 대군락을 이루고 있는데, 커다란 나무에는 노란 페인트로 줄을 두르고 흰 페인트로 숫자를 적어 놓았다.

 

 

1982년 산림유전자원 보호림으로 지정한 이곳 소나무군락은 2001년에 ‘문화재용 목재 생산단지’로 1번에서 1487번까지 번호표를 써 놓았는데, 경주 황룡사9층목탑 등 문화재 복원용 목재로 사용할 계획이라고 한다.

 

 

우리 팀이 물러간 뒤에 성황사 사진을 찍으려고 했더니 뒤따르는 팀들이 금방 등장하는 바람에 별수없이 이 사진 한장 찍고 사라진 팀을 따라 내뺀다.

 

 

 

얼마간 내려가자 주막거리 터가 나타나고...

 

 

큰 바위 위에 세운 작은 비석이 보인다.

 

'이광전영세불망비(李光筌永世不忘碑)'라는 비석의 주인공 이광전은 무관으로 1838년 울진현령으로 부임하여 1842년 이임하였다고 하는 인물이다. 현령도 이 고개를 넘어 부임하고 이 고개를 넘어 퇴임하였으며 그렇게 넘나들던 샛재 고갯마루 주막거리 입구에 이런 비석을 세운 것이다.

 

이 비석은 같은 1842년에 세운 조령성황사와 함께 샛재가 주요 교통로이었음을 증명하고 있다.

 

 

 

그 아래쪽에는 마고할미의 전설이 전하는 말무덤이 자리잡고 있다.

 

 

전설인즉, 옛날 안일왕산성을 쌓을 때 큰 바위돌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마고할멈이 큰 바윗돌을 이고 말의 등에도 바위를 싣고 가는 도중 말이 죽자 말무덤을 만들고 바위를 올려놓고 떠났다는 이야기...

 

전설다운 증거물, 두 개의 큰 바위가 앞뒤로 있는 것이 제법 그럴싸하다.

 

 

 

 

그런데 갑자기 빗방울이 듣기 시작한다. 샛재를 오를 때부터 습도가 유난히 높아지고 햇살이 사라지는 것이 심상치 않다 싶더니...

 

점차 빗방울은 굵어진다. 비에 쫓기듯 사람들의 발걸음이 빨라진다.

 

결국 카메라도  배낭 속에 집에 넣고 만다. 

 

 

샛재를 내려서자 대광천이 나타난다. 백병산에서 발원하여 소광리를 흘러 광천으로 유입하는 하천이다. 하염없이 내리는 빗속에서 개울가에 흩어져 잠시 휴식을 취한다.

 

 

 

물가에 꽃을 피운 물꽈리아재비

 

 

 

다리를 건너 하류쪽으로 이어지는 도로를 따라 잠시 걷다가 다시 산을 넘는 길로 접어든다.

 

몇 굽이의 산길을 걷는 동안 비는 더욱 거세어져 사진을 담지 못해 아쉬움이 크다. 빗속을 걷자니 사람들의 발걸음이 빨라지니, 오전과는 달리 힘에 부치기 시작한다. 게다가 오르막길이니...

 

 

한때는 느삼(고삼)이 많았다는, 하지만 지금은 흔적도 없는 너삼밭재라는 고개를 넘는다. 말래(두천)을 떠난 선질꾼들은 50kg 소금가마를 지고도 이곳에서 점심을 먹었다는데, 우리는 오후 3시 무렵에야 이곳에 도착한다.

 

속새들이 대군락을 이룬 습지를 지나고, 저진터재를 넘으면서 비로소 소광리로 들어선다. 저진터재는  신라가 보부천에 주둔하던 실직국 안일왕의 공격을 받아 패주한 혈전지라고 한다.

 

 

소광리로 내려서며 돌아본 풍경. 민가 뒤 오른쪽으로 보이는 샛길이 내려온 길이다.

 

 

 

드디어 소광리마을이 눈앞에 펼쳐진다.

 

 

 

넓은 마당에 들어선 틔는 건물은 금강소나무펜션. 폐교된 초등학교를 리모델링해서 만든 숙소라는데, 마을 주민들이 공동으로 운영한단다.

 

 

 

앞서온 사람들은 모두 휴게소 처마 밑에 앉아 파전에 막걸리를 마시고 있다.

 

엊저녁 두천의 민박집에서 숙박했던 젊은 부부가 자리를 잡고 있다가 손짓을 한다. 마시던 술을 함께 나눠 마시며 긴 산행의 피로를 씻는다.

 

 

 

산골 물맛 때문인지 주민이 담았다는 막걸리맛은 칼칼하면서도 부드럽게 목에 감긴다. 한 주전자로는 부족해서 또 한 주전자를 더 시키고, 그러고도 모자라 또 반 주전자를 더 시켜서 마신다. 시장한 탓인지 안주로 먹는 파전, 감자전도 훌륭하다.

 

어느 새 마당으로 울진행 버스가 들어서고, 술자리에 화기애애 이야기꽃을 피우던 사람들은 자리를 잡으려고 버스로 몰려든다. 그래도 이 맛 좋은 막걸리를 버리고 갈 수야 있나.

 

순식간에 몇 잔을 마시고 버스에 오르니, 서서 가는 데도 기분은 이미 신선이다. 창 밖으로 보이는 대광천 계곡은 아름답다. 이런 계곡도 있었나 싶다.

 

잠시 뒤에는 대광천을 벗어난 버스가 험준한 바위 풍경을 자랑하는 불영계곡을 달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