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산하와 문화재

영주 소수서원, 숙수사 절터에 세운 조선 최초의 사립대학

모산재 2012. 10. 4. 10:00

 

봉도각을 돌아보고 난 뒤 소수서원을 향해 걷는다. 부석사 방향 931번 지방도를 따라 10분 정도 거리...

 

 

사과 묘목 밭에 상큼한 향기를 풍기는 때 아닌 사과꽃이 피어 있다.

 

 

 

 

 

광장이라 해도 좋을 넓은 주차장, 소수서원이 더 이상 한적한 관광지가 아님을 증명한다. 그 너머로 보이는 솔숲은 소수서원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다.

 

 

 

 

소수서원 선비촌 안내도

 

 

 

 

 

선비촌이 들어서면서 소수서원은 관광지로 북적이게 되었다. 선비촌은 2004년에 영주시가 건설한 일종의 테마파크. 조선시대 전통가옥을 복원하여 유교문화를 직접 체험하고 학습할 수 있도록 조성한 관광단지다.

 

 

소수서원 들어서는 길, 수백 년 수령의 낙락장송 숲을 걷는 상쾌함은 최고다. 겉과 속이 모두 붉은 이 적송으로 일본 국보인 코류지(廣隆寺)의 미륵보살 반가사유상을 만들었다 하지 않던가.

 

 

 

 

 

솔숲을 불어오는 바람을 송뢰(松籟)라고 한다. 폐부로 스며든 상쾌한 기운이 온 몸을 돌며 잠들어 있던 세포들을 다 일깨우는 듯 정신이 소쇄된 듯 맑아진다.

 

늘 푸른 소나무는 학문에 정진하는 지조 곧은 선비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추사의 '세한도'를 통하여 더욱 널리 알려진 <논어> '자한(子罕)'편의 "歲寒然後知松柏之後凋"라는 구절은 소나무의 모습이 곧 선비의 모습임을 나타낸다.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잎을 떨어뜨리지 않음을 안다." 이 솔숲을 거닐며 소수서원의 청년들은 변치 않는 청청한 선비정신을 길렀으리라.

 

한편 이 솔숲은 소수서원의 뒤가 허한 단점을 보완하기 위한 풍수적 목적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숲길 안쪽에는 당간지주가 나타난다. 보물 제59호로 지정된 숙수사지 당간지주.

 

 

당간을 받치는 받침돌은 사라지고 높이 3,91cm 폭 52cm 의 거대한 당간지주만이 남아 있는데,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숙수사(宿水寺)는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1953년 현재의 소수서원 뒤편에서 출토된 청동불상 25구와 경내에 남아 있는 각종 석조물이 통일신라시대 양식으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숙수사는 고려 후기에 주자학을 도입한 안향과 그 아들 손자들이 수학했던 곳. 숙수사가 언제 사라졌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세조3년(1457) 금성대군의 단종복위운동 실패로 순흥도호부가 풍기군의 행정구역으로 편입되면서 없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주세붕이 풍기 군수로 부임한 이듬해인 1542년(중종37), 흠모하던 안향이 자라고 수학하던 숙수사 옛터에 서원을 세웠으니 그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 소수서원(紹修書院)의 전신인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이다.

 

 

백운동서원은 "소백산이 높이 솟아 구름이며 산이며 언덕과 물줄기가 실로 송나라 때 주희가 재흥시킨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이 있는 여산(廬山)에 못지 않다."고 여기고 "하얀 구름이 항상 서원이 있는 골짜기에 가득했기 때문이다."고 하여 '백록동서원'과 '흰 구름'의 의미를 담아 지은 것이다.

 

주세붕은 백운동사당에 안향의 영정을 모시고 '죽계사' 3장을 낭독하며 경건히 제례를 올렸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동쪽에 죽계수 서쪽에 소백산 그 사이에 공을 모신 사당
백운이 가득찬 골자기에 앞 길이 희미하네,
시냇물에는 고기 놀고 산에는 잣나무
여기는 공이 놀던 옛 터인데 어이하여 돌아오지 않으시나,
돌아와 주오 돌아와 주오 나를 슬퍼잖게
서쪽에는 소백산 동쪽에는 죽계수 산 위에는 구름
강물에는 달빛 고금에 변함 없네
공이 오실 적에는 옥규를 타고,
더러는 난조를 타고
나의 술잔을 드시고 나의 정성에 흠향하시어
기쁨을 다하소서.
공이 옛적 낳기 전에 유도가 어두웠고
윤리가 땅에 떨어져 구름 연기에 쌓인 황혼이었네.
공이 나신 후로 삼한이 일신되어
푸른 하늘 태양처럼 의리의 도가 높여졌네.
훤출한 사당에 공의 영정 봉안되니
죽계수는 더욱 맑고 소백산은 더욱 높아.

 

 

주세붕은 백성을 위하는 후덕한 목민관으로도 알려져 있다. 풍기인삼이 유명하게 된 것도 바로 주세붕. 당시 백성들이 나라에 바치는 산삼 때문에 어려움이 많은 것을 알고 소백산에서 산삼 종자를 채취하여 인공 재배를 장려, 풍기 땅에 재배삼을 처음으로 성공시킨 인물이다.

 

 

당간지주를 지나면 하늘을 찌를 듯 높이 자란 은행나무가 나타난다.>

 

 

 

 

 

은행나무는 서원이나 향교에 많이 심었는데, 이는 공자가 은행나무 아래에서 제자들을 가르친 행단(杏壇)에서 유래한 것이다. 은행나무가 아니라 살구나무로 보기도 한다.

 

 

 

서원 경내로 들어서기 전, 서원 앞을 흐르는 내(죽계천) 건너편에 아담한 3칸 정자가 바라보인다.

 

이름은 취한대(翠寒臺). 퇴계 이황 선생이 이름한 것을 1986년에 신축했다고 한다.

 

 

 

 

 

'취한대'란 이름은 '소나무는 푸르고, 시내는 차다'는 뜻의 '송취한계(松翠寒溪)'에서 따온 것이라는데, 과연 이름처럼 정자 주변에 서 있는 소나무는 푸르고 그 아래를 흐르는 죽계천은 차게 흐르고 있다. .

 

주세붕 다음에 풍기군수로 부임한 퇴계 이황은 '백운동서원 생도들에게(白雲洞書院示諸生)'라는 글을 남기고 있다.

 

 

小白南墟古順興     소백산 남쪽 터에 옛 순흥 고을
竹溪寒瀉白雲層     죽계 차가운 물살 위에 흰 구름 드리웠네.
生材衛道功何遠     인재 기르고 도를 지키니 그 공 한이 없고
立廟尊賢事匪曾     사당 세워 성현을 받드니 일찍이 없던 일.
景仰自多來俊碩     덕을 흠모하여 우러러 빼어난 인재 모여들고      *景仰(경앙) : 덕을 사모하여 우러러봄
藏修非爲慕騫騰     학문 닦는 것이 출세를 위함이 아니라네.            *騫騰(건등) : 뛰어 오름. 벼슬에 오름을 뜻하는 말.
古人不見心猶見     옛분 볼 수 없어도 그 마음을 만나니
月照方塘冷欲冰     달은 연못에 비춰 차가움이 얼음 같구나.

 

 

 

취한대 위쪽 죽계천 바위에는 '경(敬)'자와 '백운동(白雲洞)'이라 새긴 글씨가 보인다.

 

 

 

 

 

바위 위쪽에 흰 글씨로 새긴 ‘백운동(白雲洞)’은 퇴계, 그 아래 붉은색의 '경(敬)'자는 주세붕의 글씨라고 한다.

 

'경(敬)'은 '마음을 한 곳에 집중하여 흐트러짐이 없다(主一無適)'는 뜻으로 마음가짐을 바르게 하는 수양론의 핵심이 되는 선비들의 지침이며 성인이 되어 가는 지름길과 같은 말이다. <효경>과 <맹자>에서는 '공경'의 뜻이지만 <논어>에서는 '삼가고 근신함'의 의미로 풀이되어 있다.

 

 

 

 

 

그런데 이 '敬'자 바위에는 '정축지변(丁丑之變)'이라는 순흥 땅의 아픈 역사에 얽힌 전설이 전하고 있다. 세조 3년(1457) 금성대군의 단종복위 거사 실패로 순흥도호부민들이 줄줄이 참살 당하고 그 시신이 이곳 죽계천에 수장되었는데, 그 후 밤마다 원혼들의 울음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이에 풍기군수 주세붕이 '경(敬)'자에 붉은 칠을 하고 위령제를 지냈고 그 후로 울음소리가 그쳤다고 한다. 당시 참화를 당한 사람들의 피가 죽계를 따라 10여 리를 흘러가 멎은 곳을 지금도 ‘피끝마을’이라고 부른다.

 

또 다른 전설로 주세붕이 숙수사를 허물고 백운동서원(소수서원)을 창건하면서 불상을 소(沼)에 던져버리자 밤마다 괴변이 일어나 불상을 위로하기 위해 ‘경(敬)’ 자를 새겼다는 전설도 전한다.

 

 

소수서원은 소백산의 기운이 죽계 바로 앞에서 솟아난 영귀봉에 의지하여 터를 잡고 있는데, 남북으로 벋어있는 영귀봉 동쪽에 자리잡은 소수서원은 풍수지리적으로 ‘신령스런 거북이가 알을 품은 듯하다.'는 영귀포란형(靈龜抱卵形)의 지세로 명당에 해당된다.

 

 

소수서원 정문 앞. 오른쪽 죽계천을 내려다보는 곳에 '경렴정(景濂亭)'이라는 정자가 보인다.

 

 

 

 

 

서원 경내와 외부의 자연 풍광을 이어주는 전망 시원한 경렴정(景濂亭)은 일종의 휴게 공간. 주세붕 선생이 백운동서원을 건립하면서 지은 정자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정자 중의 하나이다. 유생들이 시를 쓰기도 하고 담소를 나누거나 토론하는 등 풍류를 즐기던 공간이다. 정자 내부에는 주세붕 선생과 퇴계 선생 등 당대 묵객들의 글이 적힌 현판들이 걸려 있다.

 

 

 

 

'경렴정'이란 이름은 북송의 염계 주돈이(濂溪 周敦頤)를 경모하는 뜻으로 그의 호에서 첫 글자 '濂'자를 취했고 안향 선생을 높인다는 뜻에서 '景'자를 취해 붙인 말이라고 한다.

 

호방한 필치의 초서 현판은 퇴계의 문인인 고산 황기로(孤山 黃耆老)의 글씨라고 한다.

 

 

 

 

 

황기로는 초서를 잘 써서 '초성(草聖)이라 불렸는데, 일설에 의하면 앞쪽에 정자로 쓴 현판 글씨는 황기로가 처음 퇴계 앞에서 쓰면서 위축된 상태에서 써서 다소 어색한 모습이 되었고, 나중에 다시 자신이 능한 초서체로 쓴 것이 안쪽에 걸린 초서현판이라고 한다.

 

그런데, 마지막 글자 '정(亭)자의 꼬리 부분이 원래 승천하는 용처럼 기운차게 감겨 올려진 모습이었으나 일제에 의해 훼손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정문 앞에서 소수서원 서쪽으로 우백호처럼 두른 언덕 위에는 낙락장송들이 멋드러지게 굽어져 어울린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이곳을 '소혼대(消魂臺)라 부른다.

 

 

 

 

소혼대(消魂臺)는 죽계계곡이 내려다보이는 서원의 정문 밖 영귀봉의 중턱에 있으며 이곳에는 숙수사의 별대(別臺)로 쓰였던 건물 주초자리가 남아 있다.

 

 

 

 

서원이 들어선 후 이 자리는 유생들이 공부하며 머리를 식히는 장소로 사용되었다고 하며, 방문한 손님을 배웅하던 장소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한다. 방문객들이 여기서 작별을 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소혼(消魂)'이란 말 그대로 풀이하면 '혼이 사그러든다'는 뜻인데, 넋이 나갈 만큼 심하게 근심하다'로 풀이되는 말이다. 현대 중국어에서도 '혼이 나가다, 넋을 잃다'는 뜻으로 사용되는 말이다. '소혼대'란 이름은 남송시대 강엄이 이별을 노래한 옛 시 '별부(別賦)'의 "암연소혼자 유별이이의(黯然消魂者 惟別而已矣)"이라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말도 없이 혼이 나가는 건 오직 이별뿐이라네."

 

이별의 정경이 저 언덕 위에 그림처럼 그려지는 듯하다.

 

 

 

이제 소수서원의 정문으로 들어선다.

 

 

 

 

 

정문에 서서 앞마당을 한번 돌아보고...

 

 

 

 

 

정문을 들어서면 옆모습을 보이는 강학당과 마주친다.

 

 

 

 

강학당 계단으로 축담을 올라 내부를 들여다보면 명종이 친필로 쓴 '소수서원(紹修書院)'이란 현판이 보인다.

 

 

 

 

 

1548년 풍기군수로 부임한 퇴계 이황이 관찰사를 통하여 사액을 요청하여 명종이 이를 허락하고 대제학 신광한에게 서원의 이름을 짓게 했다. "이미 무너진 유학을 다시 이어 닦게 했다(旣廢之學 紹而修之)"라는 뜻을 담은 ‘紹修書院'으로 정하자 친필로 편액을 써서 사서오경, 성리대전 등의 서적과 함께 노비를 하사한다.

 

이로써 서원은 관학인 향교에 대응하는 공인된 사립 고등교육기관으로 성리학의 실천 도장이자 도학의 아카데미로 등장하게 된다.

 

 

강학당 처마 아래 축담에서 바라본 서원 담장 밖의 소혼대 소나무. 바라보고 또 바라보아도 눈이 시원하고 정신이 맑아진다. 풍광 좋은 이런 곳에서 공부는 절로 될 것 같다.

 

 

 

 

건물 정면으로 돌아서 바라본 대강당 내부 모습

 

 

 

 

 

소수서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이자 사립대학으로 한국 성리학의 르네상스를 이룬 곳이며 영남을 추로지향(鄒魯之鄕)이라 부르게 된 뿌리이기도 하다.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도 명맥을 유지한 47개 서원 중의 하나다.

 

서원에서 수학한 유생들의 이름을 적은 '입원록(入院錄)'에 따르면 소수서원은 문을 닫는 1888년까지 총 4천여 명의 유생이 수학했으며, 조목, 권문해, 김성일과 그의 4형제 등은 모두 소수서원이 배출한 주요 인물들이다.

 

 

 

앞마당에서 바라본 강학당과 서재 건물들

 

 

 

 

 

강학당(보물 제1403호)은 학문을 강론하던 장소...

 

 

 

경내에서는 가장 규모가 큰 건물로 남북으로 길게 지어졌으며, 높은 기단 위에 세워진 정면4칸 측면3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집이 간결하면서도 위엄있다. 네 귀퉁이 지붕의 추녀를 받치는 활주가 눈에 띈다.

 

전통 한옥의 평면 구성으로 보면 동향으로 볼 수도 있으나 건물의 전면에 붙어있는 '백운동' 현판이나 '소수서원'이라는 명종의 친필 현판이 남향으로 붙어있는 것을 본다면 건물의 정면을 측면으로 삼은 의도가 보인다. 그러니까 앞마당이 아니라 옆마당이라 하는 것이 옳겠다. 

 

 

 

 

 

강학당의 북쪽에서 강학당을 바라보고 있는 직방재(直方齋)와 일신재(日新齋)는 여느 서원의 동서재에 해당하는 건물이다.

 

 

강학당 오른쪽으로 길게 늘어선 건물이 서재에 해당하는 직방재와 일신재이다. 하나의 건물로 되어 있다.

 

 

원장, 교수 및 유사(有司)들의 집무실 겸 숙소로 독립된 건물이 아닌 연속된 한 채로 이루어져 있다. 조선 말기인 1805년(순조5년)에 세워졌다. 마루와 방의 높이를 강학당보다 낮게 하여 성현들의 학문을 숭상하고자 하는 뜻을 담았다.

 

서재에 해당하는 직방재는 건물 오른쪽 2칸으로 <주역>의 "경(敬)으로써 마음을 곧게 하고, 의(義)로써 방정한 행동을 한다(敬以直內 義以方外)"는 말에서 취한 이름이다. 동재에 해당하는 일신재는 왼쪽 2칸으로 <대학>의 "日日新又日新"에서 따온 이름이다. 

 

 

 

문성공묘(보물 제1402호)는 강학당의 뒤편 솔숲과 담장을 끼고 자리하고 있다. 

 

 

 

 

 

 

사당에는 '사(祠)'가 아닌 '묘(廟)'라는 명칭을 쓴 것이 예사롭지 않은데, '묘(廟)'라는 이름은 역대 임금들의 사당인 종묘(宗廟)나 공자를 모신 성균관의 문묘(文廟) 등 특볍한 경우가 아니면 쓰지 않는 존귀한 명칭이다. 따라서 문성공묘는 그 격이 특별함을 알 수 있는데, 동방 주자학의 시조로 '안자(安子)'로 추앙 받는 문성공 안향의 위상을 말해준다.

 

묘에는 안향을 주향(主享)으로 안축, 안보, 주세붕의 위패를 함께 봉안하고 있다. 1542년 주세붕에 의해 안향이 배향되었고 2년 뒤에 안축과 안보 형제가 추가 배향되었다. 그리고 조선 후기인 1633년에는 설립자인 주세붕 선생이 추가 배향된다.

 

단정한 해서체의 현판 글씨는 성균관의 명륜당과 전주객사 '풍패지관(豊沛之館)'이라는 현판을 쓰기도 한 명나라 사신 주지번의 글씨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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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헌 안향(晦軒 安珦)

  

회암 주희(晦庵 朱熹)를 흠모하여 스스로 호를 회헌(晦軒)이라 했고 시호는 문성공(文成公)이다. 소백산 아래 순흥에서 나 주자학을 최초로 이 땅에 유입 보급하였다. 청년 시절 순흥의 숙수사를 왕래하면서 독학으로 경서 강독 등 수학에 전념하였으며 18세 되던 1260년(원종1년) 과거에 급제 관직 생활을 시작하여 64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

1289년 원나라에 들어가 이듬해 주자전서를 가지고 돌아와 주자학을 연구하였다. 1304년 국학의 대성전에 공자를 비롯한 선성(先聖)들의 화상을 모시고 문묘 제도를 갖추게 하였다. 그는 오늘날의 육영재단에 해당하는 섬학전(贍學錢)을 설치해 장학사업을 펼쳐 인재 양성을 장려하고 성리학 보급에 활력의 샘줄기를 터놓았다.

고려 후기는 불교의 폐해와 무인의 장기집권 및 몽고의 침입과 홍건적의 난 등 이민족의 잦은 침입으로 대내외적으로 국운쇠퇴기였다. 이러한 때에 안향 선생은 중국 원나라에 가서 새로운 사상인 주자학을 도입해 새로운 학풍으로 어지러운 통치기반을 안정시키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 안향 선생의 이러한 노력 덕분에 마침내 주자학을 수양(修養)과 치세(治世)의 원리로 삼은 성리 학자들이 중심이 되어 훗날 새로운 왕조 조선을 개창하게 되고 조선왕조가 성리학을 나라의 통치이념으로 삼게 되면서 민족의 스승으로, 동방 도학(道學)의 비조로 추앙받게 되었다.

선생의 묘소는 오늘날 국립묘지에 해당하는 경기도 장단군 진서면 눌목리(訥木里) 구정동(口井洞)에 있다. 한편 1917년에는 중국 공자의 77대손인 공덕성(孔德成) 씨가 회헌 안향선생을 ‘안자(安子)' 로 높이 찬양하여 지은 찬문과 안자묘(安子廟) 편액 친필글씨를 보내왔다. 또한 공자의 76대손인 공영이(孔令貽)씨는 회헌 안향의 신도비명(神道碑銘)을 지어 보내왔다. 공덕성씨와 공영이씨가 보내온 안자묘 편액 친필글씨와 회헌 안향의 신도비명은 1977년 경기도 시흥시 의왕읍에 안자묘 건립과 함께 그곳에 보존되고 있다.

   集群聖之大成者孔子也                   성인의 학문을 모아 집대성한 분은 공자이시고
   集群賢之大成者朱子也                   현인의 학문을 모아 집대성한 분은 주자이시고 />
   祖孔宗朱以啓東方之聖學者安子也   공자와 주자를 조종으로 동방성리학을 집대성한 분은 고려의 안자(安子: 안향)이시다. />
- 중국 공덕성씨가 안향 선생을 찬양한 찬문 全文

 

 

 

학구재(學求齋)와 지락재(至樂齋)는 유생들이 기거하며 공부하던 곳이다.

 

 

↑왼쪽이 학구재, 오른쪽이 지락재

 

 

스승의 처소인 직방재와 일신재의 동북쪽에 ㄱ자로 배치되었다.

 

'배움을 구한다'는 뜻의 학구재는 동몽재(童蒙齋)라고도 하며, '배움의 깊이를 더하면 즐거움에 이른다'는 뜻의 지락재는 앙고재(仰高齋)라고도 한다.

 

학구재는 중앙의 우물마루 좌우로 각각 온돌방 1칸을 둔 데 비해, 지락재는 1칸의 온돌방 외에 나머지 2칸은 우물마루로 처리해 외부공간과 마주하도록 개방했다.

 

건물 입면은 배움을 장려하기 위한 의도로 ‘공부(工夫)’의 ‘工’자 형태로 지어졌다. 스승의 거처인 직방재, 일신재보다 한 자 낮게 뒷물림하여 지었다.

 

 

 

강학당의 뒤쪽에 일신재, 직방재와 나란히 배치된 장서각(藏書閣)

 

 

 

 

 

장서각은 오늘날의 대학 도서관 격으로 서원의 서적과 서원에서 출판한 판각들을 보관했던 곳이다. 임금이 지어 하사한 <어제 내사본(御製 內賜本)> 비롯해 3천여 권의 장서를 보관하던 곳으로, 1543년에 주세붕이 건립하였다.

 

서책은 으뜸자리에 둔다고 하여 스승의 숙소인 직방재의 오른쪽에 자리했다. 습기를 방지하기 위해 바닥은 땅에서 떨어뜨려 마루의 형태를 취하고 환기구나 살창을 설치한다.

 

 

 

소수서원은 최초의 서원이라 조선 후대의 서원과는 달리 건물들이 비교적 자유롭게 배열된 것이 특징이다. 정문을 들어서면 강학당이 측면을 앞으로 하고 있고, 강당 좌우에 배치하는 동서재가 없고, 재실인 일신재(日新齋), 직방재(直方齋), 지락재(至樂齋), 학구재(學求齋)가 독립적으로 산재하며, 누각이나 정문 같은 별도의 경계 건물도 없다. 다만 경렴정(景濂亭)이란 정자를 세워 후대 서원의 누각이 지녔던 풍류 기능을 대신하였다.

 

그리고 경내의 한 구석 높은 토대 위에 사당이 강학당과 각각 남향으로 독자적으로 위치하고 있다. 동학서묘(東學西廟)로서 배움의 공간은 동쪽에, 제향의 공간은 서쪽에 두었다. 사당으로 들어서는 문도 삼문(三門)이 아닌 외문으로 된 것도 다른 점이다.

 

이러한 전각 배치는 자연 환경이나 필요에 따라 실용적으로 배치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 하나 소수서원의 특징이라면 영정각이라는 존재이다. 

 

 

 

 

 

1975년에 신축한 것으로 이곳엔 회헌 안향의 영정(국보 111호)과 신재 주세붕의 영정(보물717호), 회암 주희, 오리 이원익, 한음 이덕형, 미수 허목 등 영정 5점을 봉안 하던 장소다.

 

원본은 소수박물관 수장고에 보관중이고 이곳에는 복사본이 전시되어 있다.

 

 

회헌(晦軒) 영정(국보 제 111호) 복사본

 

 

회헌 영정 원본 사진(출처:문화재청)

 

 

 

대성지성문선왕전좌도(보물 제 485호)

 

 

공자를 중심으로 제자들이 공자 앞에 길게 늘어서 앉아 있는 그림으로, 가로 65㎝ 세로 170㎝의 비단에 그렸다. 머리에 사각관모를 쓰고 손에 홀(笏)을 든 차림으로 묘사되어 조례의식 광경을 연상케 한다. 중종 8년(1513)에 원래 있던 그림을 베껴 그린 것으로 종렬 대칭구도와 위에서 아래를 보는 듯한 부감법, 원근법 등을 사용하여 조선시대 궁중행사의 기록화 형식에 영향을 미친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출처:문화재청

 

 

주세붕 영정(보물717호)

 

↑출처:문화재청

 

 

주자 영정

 

 

 

 

서원의 안쪽에는 사료관이 자리잡고 있다. 

 

 

 

 

사료관에는 서원의 양대 기능인 '강학(講學)'과 '제향(祭享)'을 주제로 하여 유물을 전시하였다. '강학'과 '제향'의 모습을 '디오라마"로 제작하였고, 또한 사당에 봉안된 안향, 안축, 안보, 주세봉 선생에 대한 설명과 서원의 발생, 운영, 교육, 제향, 사회적 기능 등 당시 서원의 역할에 대한 도판을 제작, 전시하여 관람객들에게 서원의 이해를 돕고자 하였다.

 

아울러 '학맥도', 선현문집', '경서류', '시판' 등을 전시하여 유교문화의 당면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고자 하였다.

 

 

 

서원의 안쪽 죽계천변에는 넓은 정원이 자리잡고 있는데, 바위에 새긴 안축의 '죽계별곡'이 눈길을 끈다. 

 

 

 

 

 

정원 한쪽에는 숙수사의 흔적을 보이는 석조 유물들이 보인다.

 

 

 

 

 

정원 아래쪽 죽계천변에는 탁영대(濯纓臺)와 탁청지(濯淸池)를 복원해 놓았는데, 임진왜란 중인 1593년 풍기 군수로 부임한 겸암 류운용이 문성공묘를 참배한 후 대를 쌓고 못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지락재(至樂齋)에 걸린 류운용의 시판(詩板)에 "못을 파고 대를 쌓았다."는 기록에 근거하여 그 원형이 발견하여 복원한 것이라 한다.

 

 

 

죽계천을 건너면 2004년 문을 연 숙박 관광단지 선비촌이다.

 

 

 

 

 

경북도 유형문화재 제81호인 두암고택 등 이 지역의 유명 고가옥을 본떠 지은 기와집 15채와 초가집 13채, 저잣거리, 퇴계가 신분을 따지지 않고 유생들과 함께 학문을 가르친 대장장이 배순의 대장간 등 조선시대 촌락의 모습이 재현돼 있다는 곳.

 

 

두암고택이나 김문기가 등을 돌아보았으면 싶었지만 다음 일정이 빠듯하여 돌아서고 만다.

 

 

 

 

 

소수서원 뒤에는 단종 복위운동에 실패하고 죽음을 당한 금성대군과 순흥부사 이보흠 등을 제사지내는 금성대군 신단과 금성대군의 위리안치지, 순흥 향교 등이 있는데 이곳도 다음 기회로 미루고 생략한다

 

 

 

 

 

 ※ 안동 병산서원 => http://blog.daum.net/kheenn/15855058

 ※ 안동 도산서원 => http://blog.daum.net/kheenn/15855622

 

 

 

 

 

 

※ 서원에 대하여

 

관학인 향교에서 공자와 중국인 성현들을 배향하는 것과는 달리 사학인 서원은 이 땅의 선현들을 제향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게다가 세조의 왕위 찬탈 반대로 집현전이 폐지되고 연산군에 의해 성균관이 황폐화되면서 관학이 점차 교육기능을 상실하게 되었다. 이에 사림에서는 개인적으로 서재, 정사(精舍) 등의 사학을 설립하여 학문을 보급하고 학문을 계승하였다.

중종반정 후 성균관을 중수하는 등 교학 진흥책을 추진하였지만 효과를 얻지 못하였고, 이에 조광조를 중심으로 한 신진 사림세력은 의리명분을 바탕으로 한 민심수습과 내적 인격도야를 추구하는 위기지학(爲己之學)의 학문풍토를 추구하며 도학정치에 기초한 교학 진흥책을 제시하였는데, 문묘종사(文廟從祀)운동이 그것이다.

이는 사림의 학문적 정치적 입장을 강화해 주는 한편 향촌 교화라는 명분을 가지는 것으로서 서원 발생의 토대를 제공하였다. 이후 선조 때에 이르러 사림파가 정치의 주도권을 잡으면서 서원은 본격적인 발전을 이루게 되었다.

이와 같이 서원은 도학을 이상으로 삼던 사림세력들의 정신세계가 반영된 조선시대 유교사회의 대표적 산물이다. 서원은 선비들이 학문을 연마하고 선현에게 제향을 올리는 곳으로 향촌사회를 이끌어가는 정신적 지주 역할과 아울러 후에 지방 사림의 구심점이 되었으며 나아가 중앙 정치에 대한 견제 기반으로서의 기능을 갖게 되었다.

과거시험과 법령의 규제에 얽매인 관학과는 달리 서원은 학문의 자율성이 존중되어 출세주의에서 벗어나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길렀던 민족교육의 산실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