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산하와 문화재

괴산 산막이옛길 (2) 산막이마을과 노수신의 귀양지 수월정(水月亭)

모산재 2012. 10. 23. 00:37

 

산막이마을은 모두 네 가구로 단촐하다. 산이 막아선 곳에 달천이 호수로 변하면서 물에도 막힌 오지가 되었다. 35가구나 되는 제법 큰 마을이 있었지만 수몰과 함께 주민들은 대부분 외지로 떠나가버렸다.

 

댐이 생기기 전 얕게 흐르던 달천(또는 달래강)은 '연하구곡'이라 부를 정도로 아름다웠고, 주민들은 돌다리와 섶다리를 건너 바깥 세상을 오갔다 한다. 그러나 괴산댐 건설로 아름다운 계곡은 마을로 통하던 길과 함께 잠기고 주민들은 나룻배로 건너거나 새로 낸 아슬아슬한 벼랑길을 타고 다녔다 한다.

 

작년 산막이옛길이 생긴 다음 엄청난 인파들이 몰려들면서 대대로 농사를 짓던 이곳 주민들은 식당을 겸하는 민박집을 운영하고 산다.

 

 

 

산막이마을의  남쪽 강 언덕에는 '노수신 적소(盧守愼謫所)'라 명명된 수월정(水月亭)이란 정자가 있다. 충청북도기념물 제74호로 지정된 건물이다.

 

이름 그대로 조선 중기의 문신 노수신(1515~1590)이 귀양살이하던 곳이다. 그는 1545년 을사사화에 연루되어 파직되고 전남 순천과 진도를 거쳐 20여 년에 이르는 긴 유배생활의 마지막(1565~1567)을 이 곳에서 하였다.

 

 

수월정은 맞배지붕을 올린 1칸짜리 대문과 기와를 올린 아담한 돌담 안에 자리잡고 있어, 여느 정자와는 달리 민가의 형식을 갖추고 있다. 아마도 노수신이 거처한 집의 의미를 살린 공간 구성인 듯하다. 

 

 

 

담장 앞에는 노수신 적소에 대한 안내판과 유적비가 서 있다.

 

 

 

 

성종이 승하하고 1545년 인종이 즉위하자 노수신은 사간원 정언이 되어 을사사화의 두 원흉으로 꼽히는 이기를 파면하였다. 그런데 성종의 적자인 인종이 의문의 죽음을 당하고 성종의 후비 문정왕후 소생인 명종이 즉위하자 윤원형·이기가 주도한 을사사화가 일어나 그들에게 파면 당한다. 

 

이듬해(1546)에 순천에 유배되었다가 양재역 벽서(壁書) 사건이 일어나 죄가 더해져서 진도에 옮겨져 18년 동안 귀양을 살다가 1565년(명종 20)에 이곳으로 다시 옮겨져 1567년(선조 1)까지 2년 동안 유배생활을 하였다.

 

더보기

을사사화(乙巳士禍)

 

1545년 외척 간의 대립으로 일어난 사화로 다른 외척세력을 대거 숙청한 사건이다. 중종의 정실은 장경왕후 윤씨로 소생인 세자(인종)가 두 살 때 세상을 떠나고 문정왕후가 후실로 들어온다. 전실 소생인 인종과 후실 소생인 경원대군(명종)의 외척 간에 권력 암투가 일어나게 되었는데, 장경왕후의 오빠인 윤임을 중심으로 한 대윤과 문정대비의 동생인 윤원형을 중심으로 한 소윤이 그것이다.

 

중종이 승하하고 인종이 즉위하며 윤임 등의 대윤파가 득세하는 듯했으나, 인종이 재위 8개월 만에 후사도 없이 승하하고 명종이 즉위하면서 수렴청정하던 문정대비쪽 집안 즉 윤원형 등의 소윤파가 득세하였는데 대윤파를 역모하였다고 무고하여 숙청하였다. 이 과정에서 100여 명의 사림이 훈구파에 의해 죽임을 당하였다.

 

더보기

※ 정미사화(丁未士禍)=양재역 벽서사건

 

1546년 윤원로 ·윤원형 형제의 권력 싸움 끝에 윤원로가 유배되어 사사(賜死)된 데 이어 1547년에는 괴벽서 사건으로 다시 많은 사림이 화를 입었다. 이 해 9월 부제학 정언각과 선전관 이로가 경기도 과천 양재역 벽 위에서 "'여자 임금이 위에서 정권을 잡고, 간신 이기 등이 아래에서 권력을 농단하고 있으니, 나라가 망할 것을 기다리는 격이다. 어찌 한심하지 않겠는가' 라는 내용의 벽서를 발견했다. 이 벽서는 임금에게 보고되었고 섭정을 하던 문정왕후는 명종에게 지시하여 윤임 일파를 숙청하게 하였다.

 

이에 윤원형의 일파인 이기 ·정명순 등이 을사사화의 뿌리가 아직 남아 있는 증거라고 하여 그 잔당으로 지목된 봉성군(중종의 서자 岏) ·송인수 ·이약빙 ·임형수 등을 죽이고 권발 ·이언적 등 20여 명을 유배시켰다. 이 사건은 '벽서(壁書)의 옥(獄)'이라고도 부르며 윤원형 일파가 정적을 숙청하기 위해 만들어낸 일이었다.

 

 

대문으로 들어서면 '수월정(水月亭)'이란 편액을 단 건물이 모습을 드러낸다.

 

 

 

보통 민가의 집들처럼 돌과 흙을 섞어 기단을 쌓고 그 위에 정면 3칸, 측면 1칸에 퇴간을 둔 홑처마 팔작지붕 기와집을 올렸다.

 

우물마루를 깐 대청 1칸을 가운데 두고 좌우로 띠살문이 달린 온돌방이 배치된 구성이 독특하다. 앞쪽으로는 반 칸만큼의 툇마루를 두었다.

 

 

 

수월정(水月亭) 현판. 물의 맑고 깨끗함과 달의 원만하고 밝음을 즐긴다는 의미를 담은 것으로 보인다. 

 

달천 강 언덕에서 맑은 강물과 건너편 산 위로 떠 오르는 달을 바라보며 선비로서 마음가짐을 살폈던 노수신의 모습이 보이는 듯하다.

 

 

 

단기 4320년(1987년)에 쓴 '수월정 중건기'

 

 

 

조선 말기, 노수신의 10대손인 노성도(1819∼1893)라는 분이 이 골짜기를 찾아 들었다.

 

그는 조상인 노수신을 기려 원래 거주하고 있던 경북 상주를 떠나 노수신의 유배지였던 이 곳 연하동에 와서 수월정(水月亭)을 짓고 살았는데, 달천의 비경에 연하구곡이라 이름 짓고 '연하구곡가(煙霞九曲歌)'를 지었다고 한다. 주자의 무이도가(武夷歌)를 본뜬 작품이었다.

 

 

※ 소재(蘇齋) 노수신

 

1515년(중종 10)∼1590년(선조 23). 조선 중기의 문신. 호는 소재(蘇齋)

 

1531년 17세에 당시 성리학자로 명망이 있었던 이연경의 딸과 결혼하고, 장인의 문하생이 되었으며, 1541년 27세 때 이언적과 최초의 학문적 토론을 벌였다.

 

1543년 식년문과에 장원한 뒤로 1544년에 시강원사서(侍講院司書)가 되고, 같은해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인종 즉위초에 정언이 되어 대윤(大尹)의 편에 서서 이기를 탄핵하여 파직시켰으나, 1545년 명종이 즉위하고 소윤(小尹) 윤원형이 을사사화를 일으키자 이조좌랑의 직위에서 파직, 1547년 순천으로 유배되고, 이어 양재역 벽서사건에 연루되어 죄가 가중됨으로써 진도로 이배되어 19년간 섬에서 귀양살이를 하였다.

 

그 동안에 이황‧김인후 등과 서신으로 학문을 토론하였고, 진백의 <숙흥야매잠(夙興夜寐箴)>을 주해하였다. 이 주해는 뜻이 정명(精明)하여 사림 사이에 전송(傳誦)됨으로써 명성이 전파되었다. 《대학장구(大學章句)》와 《동몽수지(童蒙須知)》 등을 주석하였다.

 

1565년 다시 괴산으로 이배되었다가 1567년에 선조가 즉위하자 풀려나와 즉시 교리(校理)에 기용되고, 이어서 대사간‧부제학‧대사헌‧이조판서‧대제학 등을 지냈으며, 1573년에는 우의정, 1578년에 좌의정을 거쳐 1585년에 영의정에 이르렀다.

 

그뒤 1588년에 영의정을 사임하고 영중추부사가 되었으나, 이듬해 10월에 정여립의 모반사건으로 기축옥사가 일어나자 과거에 정여립을 천거했던 관계로 대간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시‧문‧서예에 능했으며 경일(敬一)공부에 주력할 것을 강조하고 도심미발(道心未發)‧인심이발설(人心已發說)을 주장했을 뿐만 아니라 양명학도 깊이 연구하였으므로 주자학파의 공격을 받았다.

 

한편 승려인 휴정‧선수 등과도 교분이 있었으므로 그 학문이 불교의 영향을 입기도 하였다. 학문에 있어서는 그가 일찍이 옥당(玉堂)에 있을 때 경연에서 《서경》을 강함에 인심도심(人心道心)의 설명이 주자설과 일치하였으나, 진도로 유배되어 그 당시 들어온 나흠순의 《곤지기(困知記)》를 보고 난 후는 전설(前說)을 변경하여 도심은 미발, 인심은 이발이라고 해석하게 되었다.

 

한편 그의 덕행과 업적의 성과는 매우 다양하여, 인군과 백성들, 그리고 많은 동료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그가 진도에 귀양갔을 때 그 섬 풍속이 본시 혼례라는 것이 없고 남의 집에 처녀가 있으면 중매를 통하지 않고 칼을 빼들고 서로 쟁탈하였다. 이에 예법으로써 섬 백성들을 교화하여 드디어 야만의 풍속이 없어졌다.

 

또 아버지의 상을 당했을 때 대상 후에 바로 흑색의 갓을 쓰는 것이 미안하다고 생각하여 백포립을 쓰고 다니기를 국상(國喪)때와 같이 하였는데, 그뒤 직제학 정철이 이를 본받아 실행했고, 뒤에 교리 신점이 주청하여 담제(禫祭)전에는 백포립을 쓰도록 제도화시켰다.

 

그는 온유하고 원만한 성격을 가진 문신이자 학자로서 사림의 중망을 지녔으며, 특히 선조의 지극한 존경과 은총을 받았다. 충주의 팔봉서원, 상주의 도남서원‧봉산서원, 진도의 봉암사, 괴산의 화암서원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소재집》 13권 8책이 있다. 

 

 

수월정에서 바라본 산막이마을

 

 

 

수월정에서 바라본 괴산호와 한반도 지형이 동쪽면

 

 

 

수월정 앞 호수에서 낚시하는 모습


 

 

 

<계속> 아름다운 산막이옛길 산책로를 따라 => http://blog.daum.net/kheenn/158558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