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산하와 문화재

영주 순흥 봉도각(최고의 경로 정원), 사현정(안축의 세거 유적)

모산재 2012. 9. 26. 18:21

 

어둠이 깃드는 순흥.

 

비로봉 산행을 마치고 도착한 순흥은 생각보다도 작은 '동네'였다. 한 때는 도호부가 있었던 큰 고을이 지금은 외진 '면'소재지, 쓸쓸한 시골마을로 남아 있으니 세월이 무상하다. 

 

그래도 소수서원과 선비촌이 있고 멀지 않은 곳에 부석사가 있으니 오고가는 차량의 행렬로 한적하지는 않다. 작은 동네지만 길거리에는 식당도 있고 여관도 있다. 겉으로는 멀쩡하지만 속은 허름한 여관 수준인 한 모텔에서 하룻밤을 보낸다.

 

 

 

다음날 아침 부근 식당에서 아침을 먹고 소수서원으로 가는 길, 면사무소 앞을 지난다.

 

 

 

 

 

수백 년 노거수가 그늘을 드리운 넓은 대지에 팔작지붕을 얹은 퓨전 2층 건물인 관청의 모습이 이채로운데, 면사무소 건물치고 이처럼 폼나는 건물도 드물 듯하다.

 

느티나무 아래엔 '읍내리 문화마을'이란 표석이 서 있다.

 

 

 

 

 

면사무소를 지나자 한옥과 정원에서 옛 풍류가 느껴지는 멋진 공원이 눈에 들어온다. 뜻밖에도 출입문에는 '경로소(敬老所)'란 현판이 걸려 있다.

 

 

 

 

 

궁금하여 들어선 곳에는 역시 '경로소'란 현판이 걸린 정갈한 3칸 한옥 건물 한 채가 눈에 뜨일 뿐 별다른 건물이 없다.

 

 

 

 

 

 

경로소 건물 앞에는 멋들어진 연못이 있고 주변은 수백 년 되어 보이는 노거수들이 숲을 이루고 있다. 근래에 만들어진 공원이 아니라 유서 깊은 정원임을 느끼게 한다. 

 

 

 

 

 

한쪽에 세워져 있는 녹슨 안내판을 발견하고 그 내용을 읽어 보고서야 지금부터 260여 년 전 조선 영조 때 만들어진 정원임을 확인한다.

 

 

 

 

 

정조 임금 때 옛 순흥도호부 청사가 있던 뒤뜰에 논을 파서 연못을 만들고 그 가운데 섬을 만들어 봉도각이란 정자를 세워 조성한 조선 후기의 정원이다.

 

안내판의 글을 그대로 옮겨본다.

 

 

● 봉도각(蓬島閣)

여기는 옛 순흥도호부 청사 조양각 뒤뜰... 융체도 무상한 고을의 역정을 지켜보며 더불어 애환을 함께 해온 천년 노송이 울창했다. 영조 29년(1754) 부사 조덕상이 여기에 승운루라는 누각을 짓고 그 서편 벼논을 파서 네모진 연못을 만들어 그 가운데 섬을 쌓고 정자를 세워 봉도각이라 했으니, 봉도란 신선이 산다는 봉래를 뜻함이다. 연못 둘레에는 단을 만들고 온갖 꽃나무를 심어 매우 그윽하고 운치로운 동산을 이루었다. 관원-아전들의 쉼터를 삼았다는 사연이 옛 순흥지(영조 때 편찬)에 전한다. 연못이며 섬은 옛 모습 지니고 있다.

 

 

 

옛 모습을 그대로 지니고 있는 연못 속 넓은 터 위에 육모 지붕의 봉도각을 복원해 놓았다. 

 

 

 

 

 

단청이 없던 소박한 백골집이었던 정자가 근년에 단청이 입혀지면서 화려하게 변모하였다. 

 

하지만 예전에 걸려 있던 '봉도각(蓬島閣)'과 연비어약(鳶飛魚躍)'이라 새긴 현판이 보이지 않는다.

 

 

 

 

 

연비어약(鳶飛魚躍)'이라는 성어는 <시경>' 대아(大雅) 한록편(旱麓篇)'에 나오는 말이다.

 

 

瑟彼玉瓚(슬피옥찬)      산뜻한 구슬 잔엔
黃流在中(황류재중)      황금 잎이 붙었네.
豈弟君子(기제군자)      점잖은 군자님께
復祿攸降(복록유강)      복과 녹이 내리네.
鳶飛戾天(연비려천)      솔개는 하늘을 날고
漁躍于淵(어약우연)      고기는 연못에서 뛰네.
豈弟君子(기제군자)      점잖은 군자님께서
遐不作人(하부작인)      어찌 인재를 잘 쓰지 않으리.

 

 

'연비어약(鳶飛魚躍)'은 '솔개가 하늘에서 날고 고기가 연못에서 뛴다.'는 뜻이니 이는 성군(聖君)의 다스림으로 세상이 조화롭고 정도(正道)에 맞게 움직여지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

 

 

퇴계 선생은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의 제6곡에서 천지만물의 자연스런 운행을 이렇게 노래했다.

 

 

春風(춘풍)에 花滿山(화만산)하고 秋夜(추야)에 月滿臺(월만대)로다.
四時佳興(사시가흥)이 사람과 한가지라
하물며 魚躍鳶飛(어약연비) 雲影天光(운영천광)이야 어내 그지 이시리.

봄바람 부니 꽃은 산에 가득 피고 가을밤에 달빛이 누대에 가득하구나.
사계절의 아름다운 흥취가 사람과 마찬가지로다.
하물며 물고기 뛰놀고 솔개가 나는 것과 구름이 그림자 짓고 하늘이 빛남이 어찌 다함이 있으랴.

 

 

요컨대 '연비어약(鳶飛魚躍)'은 만물이 우주의 이치에 순응하여 살아가는 모습을 집약한 표현인 것이다.

 

 

관원과 아전들의  쉼터였다는 이곳 봉도각과 연못 정원은 그러나 지금은 순흥 읍내리 문화마을 노인들의 쉼터가 되었다.

 

 

 

 

 

 

이 땅에 이렇게 멋진 노인들의 쉼터가 달리 있을까.

 

노인들로 북적거리는 서울의 파고다공원, 아파트 어느 구석에 자리잡고 있는 쓸쓸한 노인정이나 경로당 정도밖에 모르는 내게 '경로소'라는 이름을 단 이 아름답고 운치 있는 조선후기의 정원은 참으로 놀라운 풍경으로 다가온다.

 

 

정원 한쪽에는 1995년에 조성한 애국지사 최봉환 선생 추모비'가 자리잡고 있다.

 

 

 

 

 

경북 영주 출신으로 중국 봉천성 장백현 14도구에서 포목상을 운영하며 광복단에 군자금과 피복 등을 제공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가 1923년 일군의 습격을 받아 피체되어 1년여의 옥고를 치렀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 영주 순흥 

순흥은 고려 충렬왕과 충목왕이 태를 봉안하여 순흥부로 승격되었고, 조선 태종 때 영월, 단양, 봉화, 안동, 예천의 일부까지도 그 행정권이 미치는 도호부로 바뀐다. 하지만 세조 때 이 고을을 피로 물들인 역사적 사건으로 거덜이 난다. 이 사건을 역사에서는 '정축지변(丁丑之變)'이라 한다.

단종1년(1453) 수양대군이 당시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김종서, 황보인 등을 제거하는 계유정난을 통하여 전권을 장악하자 어린 단종은 영의정이던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넘긴다. 사육신의 단종복위가 실패한 후, 순흥에 위리 안치된 세종대왕의 6남 금성대군은 세조가 상왕인 단종을 노산군으로 강등하여 영월에 유배시키자 순흥부사인 이보흠을 비롯한 이 고장 선비들과 단종의 복위를 도모했으나 내부 고변으로 발각되어 단종은 죽임을 당하고 금성대군은 사사되고 순흥부사 이보흠은 참형되었다.

세조3년 정축년에 일어난 이 참화로 순흥부는 혁파되었으며 토지와 백성들을 모두 풍기군에 붙이고 창고와 관사를 파괴하고 기지를 허물어 버렸으며 순흥지방의 많은 사람들이 함께 죽임을 당하였다. 그때 참화를 당한 도호부민들의 시신일부가 죽계천에 수장되었고 핏물이 10여 리 흘러가 멎었다는 곳의 마을 이름이 피끝마을(동촌1리)이다.

순흥이 도호부로 되살아난 것은 숙종 9년인 1683년이다. 하지만 1829년(순조 29) 일시 강등되어 현감을 둔 일이 있었다. 1895년(고종 32) 안동부의 순흥군이 되었다가, 다음해 경상북도의 군(郡)이 되었고, 1914년 행정구역개편 때 영주군으로 편입되었다. 1980년 영주시로 승격되면서 영풍군의 관할이 되었다. 1995년 영주시와 영풍군이 통합되어 새로운 영주시가 되었다.

 

 

 

 

아, 그리고 순흥 여행에서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점 하나!

 

순흥은 여말 성리학의 비조인 회헌 안향과 그 후손인 안축을 낳은 순흥안씨의 고향이라는 사실이다. 성리학을 이 땅에 처음 소개한 안향과 경기체가 '관동별곡'과 '죽계별곡'으로 유명한 안향의 후손 안축 등 순흥 안씨의 세거지에 주목하지 못한 점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안축과 안보 형제는 고려는 물론 원나라의 대과에까지 급제한 재원으로, 조선조 개국 초 '나라 안 전체의 학문을 다 합쳐도 이들의 학문을 당할 수 없다'는 말을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목은 이색이 안보의 비문을 썼고, 가전체인 '죽부인전'을 쓴 이색의 아버지 이곡은 안축의 문하생으로서 안축의 사후 그의 비문을 썼다고 하니 두 집안의 인연이 예사롭지 않은 듯하다.

 

 

안축 형제와 관련된 유적으로 '사현정(四賢井)'이란 우물이 순흥 읍내리에 남아 있다는 사실을 나중에야 알게 된다. '어진 이 네 사람의 우물'이란 뜻의 '사현정'은 고려 후기 안석 선생과 그의 세 아들이 쓰던 우물이다.

 

 

↑  사진 출처 :  문화재청

 

 

'사현'은 이 곳에 세거한 아버지 안석과 세 아들 축(軸)·보(輔)·집(輯)을 일컫는 말이다. 안축은 경기체가인 '관동별곡'과 '죽계별곡'을 쓴 인물이다. 안석은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향리에 묻혀 실며 세 아들을 길러내었는데, 이 네 부자가 마시던 우물이라 하여 사현정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 사진 출처 : 문화재청

 

 

 

조선조 인종 때 풍기군수 주세붕이 이 우물의 내력을 알고 '사현정'이라는 비를 세우고 네 사람의 덕을 기리게 하였다. 그 후 인조 때 중건하였고 순조 때 다시 비각을 세웠다. 우물은 화강암을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3단 조립한 형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