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산하와 문화재

울진 금강소나무 숲길 (1) 보부상의 길을 따라 십이령을 넘다

모산재 2012. 10. 11. 07:49

 

9시에 출발하는 금강소나무숲길.

 

두천리 깨끗한 민박집 숙박비 만 원에 자연 건강식 1끼 6천 원의 저렴한 숙식비를 지불하고 집을 나서니 벌써 숲길 신청자들이 개울 건너 출발지에 다 모여 있다. 

 

 

 

 

'두천'이라는 이름을 처음 들을 적에는 당연히 '두메에 숨은 내'라는 뜻의 '杜川'일 거라 생각했는데, 뜻밖에 '斗川'이라 표기되어 있지 않는가...?

 

알고보니 이곳 사람들은 마을을 '말래'라 불렀다 한다. 그럼 '말내'에서 온 말이겠구나 싶은데 그게 아니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옛날 고을 원이 임지로 가는 도중 이곳에 머물게 되었다. 다음 날 타고 온 말이 보이지 않아 하루 종일 찾다가 다래덩굴 밑에서 말을 찾은 데서 마을 이름이 말래[馬來]가 되었다. 두천(斗川)이란 이름은 말래의 ‘말’을 말 두(斗)자로 표현하고 ‘래’를 내 천(川)자로 표현하여 두천이 되었다.

 

이곳 울진 두천에서 봉화 소천까지 12고개(嶺) 십이령을 넘는 데는 3일 걸렸다고 한다. 십이령길의 첫 고개인 바릿재를 오르기 위해서 두천리에서 머물 수밖에 없어서 말래(두천) 주막 거리는 보부상이나 선질꾼들이 흥청거렸다고 한다.

 

 

 

'금강소나무숲길'은 생태 관광을 내걸고 민관이 협력하여 만든 길. 환경단체인 녹색연합과 산림청, 그리고 지역단체와 주민이 함께 협의체를 만들어 개발하고 운영하게 된 길이다.

 

2010년부터 예약 탐방 가이드제를 도입하여 지역 주민이 참여하며 생태계를 보전하는 한편 지역의 문화와 역사를 복원하고 마을 사람들의 소득도 증대하는 착한 사업으로 정착되고 있다.

 

외지에서 온 사람들은 생태관광을 즐기는 일이지만 주민들에겐 소득을 올리며 지역 경제를 살리는 한편 지역에 대한 자긍심을 높이는 일이다. 그래서 자연과 인간이 공존하는 지속가능한 생태 관광으로 주목받고 있는 듯하다.

 

 

 

금강소나무숲길은 원래 보부상의 길이었던 '십이령길' 60여 ㎞ 중 울진군 일부 구간을 되살린 길이다.

 

보부상은 댕기, 비녀, 얼레빗, 분통 등을 고리짝에 담아 멜빵에 맨 봇짐장수와 어물, 소금, 옹기, 목기 등을 지게에 진 등짐장수를 가리킨다. 이들의 숨결이 서리서리 쌓인 길이 '십이령길'이다. 울진 흥부에서 봉화 소천 사이 십이령길에는 쇠치재 - 세고개재 - 바릿재 - 샛재 - 느삼밭재 - 저진터재 - 새넓재(,적은넓재, 한나무재) - 큰넓재 - 고채비재 - 맷재 - 배나들재 - 노룻재 가 있었다. 수많은 고개로 이어지는 이 십이령길은 동서로 거의 일직선으로 나 있는데, 이 길을 지역민들은 '십이령 바지게길'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예전 울진을 잇는 길은 역()은 삼척의 옥원역에서 흥부역을 지나 평해의 달효역에 이르기까지 남북 방향으로 연결되어 있었고, 원(院)의 연결망은 두천원에서 광비원을 지나 봉화의 장불원까지 동서 방향으로 연결되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십이령 길이었다고 한다.

 

암행어사들이 십이령을 지나며 묵었던 장소가 두천원·소조원·광비원이며, 과거를 보거나 관리들이 한양으로 오가는 길도 바로 십이령길이었으니, 이 길은 과히 조선시대의 울진행 고속도로였다고 할 것이다. 울진의 흥부장·읍내장·봉화의 내성장 등 장시가 열리면서 이들 장시가 십이령 길을 통해 연결되었다.

 

선질꾼(바지게꾼) 출처 : 디지털 울진문화대전

 

십이령을 넘나들며 울진과 봉화 지역의 장시를 장악하였던 보부상이 일제강점기에 접어들면서 퇴조하자 그 역할을 대신한 행상단이 선질꾼(바지게꾼)이다. '선질꾼'은 조선 말기 가지가 없는 다리가 짧은 지게를 지고 선 채로 쉬었던 지게꾼 행상을 가리키는 말이다. '바지게꾼'이라 부르기도 했다. 이들은 새끼로 짠 그물에 단지를 넣고 지게 목발에 달고 다니며 냇가에서 단지밥을 지어 된장 고추장에 산나물을 뜯어서 배를 채웠다고 한다.

선질꾼은 해방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점점 없어졌다. 선질꾼이 사라지면서 도부꾼이 등장하게 된다. 전쟁 뒤 많은 미망인들이 생계를 위해 십이령을 넘어 장사를 하였는데 이들을 도부꾼이라 한다.  

 

그리고 1960년대 울진 삼척 무장 공비 출현으로 산간 지역 주민들이 소개되고 불영계곡을 지나는 국도가 개설되면서 선질꾼과 도부꾼은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게 된다.

 

 

 

금강소나무 숲길은 모두 5구간으로 현재 운영되는 것은 1구간과 3구간. 이 중 1구간(두천리~소광2리)은 보부상의 옛길 13.5㎞를 복원한  것이고, 3구간은 금강송 군락지를 탐방하는 왕복 16.3㎞ 구간이다.

 

따라서 오늘 체험할 1구간은 엄격히 말해 '금강소나무 숲길' 체험이라기보다는 '보부상의 길' 체험이라고 하는 게 옳다.

 

 

금강소나무슾길 안내도(출처 : 금강소나무숲길 홈페이지)

 

 

 

 

↓ 금강소나무숲길 로고

 

 

 

모인 사람들을 대상으로 해설하는 숲해설가. 해설가는 모두 이곳 주민들인데, 대개 연세가 지긋하신 분들이다. 격의 없는 주민의 해설이니 친근감이 절로 든다. 

 

 

 

80여 명의 참가자들이 두 팀으로 나뉘어 출발한다.

 

 

콘크리트 봇길을 따라 개울을 건너고...

 

 

 

 

다시 징검다리를 건너니 비각이 나타난다. 

 

 

 

비각 안에는 '내성행상불망비(乃城行商不忘碑)' 두 기가 보호되고 있다.

 

 

 

 

조선 말기 울진과 봉화를 오가며 어류·소금·해조류 등을 쪽지게(바지게)에 지고 가서 곡식·의류·약품·잡화 등과 물물 교환하던 상인들이 도움을 준 봉화 사람 접장 정한조와 안동 사람 반수 권재만의 은공을 기리고자 세운 비다.

 

특이하게도 비는 석재가 아니라 철로 주조되었는데 글씨도 양각으로 주조되어 있다. 당시 울진 북면 하당리에 철광산과 용광로가 있어 제작이 쉬웠던 것으로 추정된다.

 

두천리 주민들은 이 비석을 '선질꾼비'라 부른다고 한다.

 

 

 

조선 말기 보부상과 일제 시기의 선질꾼들은 2·7일장인 울진장과 3·8일장인 흥부장에서 주로 해산물인 소금·건어물·미역 등을 구매하여 바지게에 지고 십이령을 넘어 봉화로 가서 잡화와 약품 및 양곡·포목 등을 물물 교환하여 되돌아왔다.

 

이들은 밥을 지을 도기 솥과 여벌 짚신을 꼭 달고 다녔고, 소 장수들은 소의 발굽을 보호하기 위해 수 십 켤레의 소 짚신을 만들어 신겼다고 한다.

 

 

비각을 지나 가파른 언덕을 올라서니 또 하나의 비각이 나타난다. 효자 효부 정려각이다.

 

 

 

심천범과 부인 강릉 최씨 부부의 정려각.

 

 

 

정려각의 주인공인 부부는 1854년 울진의 유림에서 효행을 상신하여 조정으로부터 포 100필을 포상으로 받았고, 1890년에 부부가 쌍효(雙孝)로 정려를 받고, 남편 심천범은 동몽교관에 증직(贈職)되었다고 하는데, 다음과 같은 효행이 전하고 있다.

 

심천범(沈天範)은 일찍이 어머니를 잃고 슬퍼하더니 3년 동안 술과 고기를 먹지 않았으며, 집이 가난하여 고기잡이와 나무하는 일로 아버지 공양을 지성으로 하였다. 아버지가 두 어깨에 신경통을 앓아 수저를 들지 못하고 누워 있으므로 부축하여 일으키고 음식을 대접하는 등 정성으로 간호하였다. 또한 아버지가 잠들기 전에는 물러가지 아니하기를 50여 년을 한결같았다. 아버지가 별세하자 3년간 여막을 짓고 묘를 지켰다.

 

심천범의 처는 평소 시부모에 대한 효성이 극진하였고 남편을 존경하였다. 시아버지가 중풍에 걸려 스스로 머리를 빗지 못하므로 매일 세수를 시키고 머리를 빗어 주었다. 또 시아버지가 꿩고기를 먹고 싶다고 하자, 최씨는 집에서 기르는 개에게 부탁하기를 “내가 너를 기르니 내가 원하는 꿩 한 마리를 구하여 오라” 하니 며칠 후에 개가 꿩을 물어 왔고, 그 후에도 여러 번 꿩을 잡아 와서 봉양하였다. 시아버지가 죽자 남편이 여막을 짓고 묘를 지켰으며, 최씨는 시아버지가 생시에 좋아하던 음식을 아침저녁으로 상에 올렸다.

 

'출입통제구역'으로 지정된 금강소나무 숲길. 

 

 

 

금강소나무숲길은 출입과 통행이 철저히 통제돼 있다. 금강송 군락지를 국가 산림유전자원 보호구역으로 정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길은 인터넷 예약을 받은 사람에게만 개방하고 있는데, 1구간은 하루 80명, 3구간은 하루 100명만 입장할 수 있다. 그것도 반드시 숲해설사와 동행해야 하고 탐방로 이탈하는 등 개인 행동이 금지되어 있다.

 

 

절대로 앞서지도 말고 쳐지지도 말라고 신신당부하는 해설사.

 

 

 

껍질이 벗겨진 참나무. 너와집을 지었던 시대의 흔적이다. 

 

 

 

다시 길로 접어들자 하늘을 향해 곧게 벋은 붉은소나무들이 늘씬한 자태를 자랑하는 붉은 소나무 숲길이 펼쳐진다.  

 

 

 

 

백제금동향로를 연상시키는 소나무 옹이

 

 

 

금강송 솔잎이 떨어진 자리에는 다발방패버섯이 탐스럽게 자라났다.

 

 

 

금강송 숲길이 잠시 더 이어진다.

 

 

 

처음으로 넘는 그리 높지 않은 고개가 나타나고...

 

 

 

바로 이 고개가 바릿재다. 바릿재란 소에다 물건을 바리바리 싣고 다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보부상들은 흥부장(현 부구리)이나 죽변장, 울진장에서 미역 등 갯것들을 사 봉화 춘양장 등에 내다 판 뒤 다시 내륙에서 비단, 곡물 등을 가져와 해안 장터에 팔았다. 두천리 주막거리에서 하루를 묵고 이튿날 아침 짐을 바리바리 싣고 이곳 바릿재를 올랐으리라.

 

 

이 장면에서 십이령길을 걷던 바지게꾼의 노래를 잠시 감상하자.

 

미역 소금 어물 지고 춘양장을 언제가노
-가노 가노 언제가노 열두고개 언제가노
시그라기 우는 고개 이내 고개를 언제가노

한평생을 넘던 고개 이 고개를 넘는구나
-가노 가노 언제가노 열두고개 언제가노
시그라기 우는 고개 이내 고개를 언제가노

 

서울 가는 선비들도 이 고개를 쉬어 넘고
-가노 가노 언제가노 열두고개 언제가노
시그라기 우는 고개 이내 고개를 언제가노

 

꼬불꼬불 열두고개 조물주도 야속하다
-가노 가노 언제가노 열두고개 언제가노
시그라기 우는 고개 이내 고개를 언제가노

대마 담배 콩을 지고 울진장(흥부장)을 언제가노
-가노 가노 언제가노 열두고개 언제가노
시그라기 우는 고개 이내 고개를 언제가노

 

오나가나 바지게는 한평생에 내 지겐가
-가노 가노 언제가노 열두고개 언제가노
시그라기 우는 고개 이내 고개를 언제가노

오고가는 원님들도 이 고개를 쉬어 넘고
-가노 가노 언제가노 열두고개 언제가노
시그라기 우는 고개 이내 고개를 언제가노

 

꼬불꼬불 열두고개 언제 넘어 고향가노

-가노 가노 언제가노 열두고개 언제가노
시그라기 우는 고개 이내 고개를 언제가노

 

 

 

바릿재를 넘자 길은 신작로 같은 임도와 이어진다.

 

숲을 벗어나 시야가 탁 트이는 길, 임도 주변에는 크지 않은 들이 있다. 이곳은 지금은 사람이 살지 않지만 예전엔 장평이란 마을이 있었다고 한다. 

 

 

 

살짝 오르막길인 임도의 끝에는 얕은 고개다.

 

이 고개가 발재인가 싶은데, 언덕 위에는 방치된 듯한 서낭당이 보인다. 아마도 이 고갯마루에 임도가 뚫리기 전에는 길이 서낭당과 거의 같은 높이로 존재했을 성싶다.

 

 

 

그런데  이 당집은 마을의 안녕을 비는 곳이기보다는 선질꾼들이 십이령 고갯길을 넘으면서 안전을 빌었던 곳이라고 한다. 

 

 

그런데 당집 곁에는 서낭목으로 소나무와 참나무가 서 있는데, 제일 높이 자란 나무는 잎이 자라지 못한 것으로 보아 고사한 듯하다. 작년까지 살아 있었던 이 나무는 수령 350여 년의 음나무라 한다.

 

 

가시가 있어 귀신을 쫒는 벽사(僻邪)의 의미를 가진 음나무는 이곳에 두 그루 있었다는데, 한 그루는 누군가가 약용으로 베어갔다고 하며, 남아 있던 다른 한 그루는 지난 겨울의 극심한 한파와 봄 여름의 가뭄 탓인지, 끝내 싹을 틔우지 못한 것 같다.

 

선질꾼들이 사라지고 당집이 폐허가 되면서 서낭목도 기운을 잃고 죽어가는 것같아 안타깝기만 하다.

 

 

고개를 넘어서자 오후에 넘어야 할 샛재가 멀리 보인다.

 

 

고개를 넘으며 굽이굽이 내리막길이 시작된다.

 

내리막길을 한 굽이 도는 곳에 '99 국유림 숲가꾸기 공공근로 사업장'이라 새긴 말뚝을 만난다.

 

 

 

이 골짜기의 이름이 '시시골'인지, '시시골 공공 근로자 나무 말뚝'이라 부른단다. 이곳은 IMF때 노숙자들을 강제로 불러 모아서 나무심기와 베기등 공공 근로사업을 시켰다고 한다. 이 때 동원된 사람들 중 일부는 청정한 숲의 정기를 받아 원상 회복되었다고 한다. 

 

 

이 맑고 아름다운 계곡에 볼썽사나운 댐으로 물을 가두어 놓았다. 흘러야 맑고 개끗한 물이 될텐데, 이미 가두어진 물은 폐수처럼 검은 빛에 잠겨 있다.

 

 

 

해설사님이 댐을 가리키며 저런 것 좀 많이 사진 찍어 올려서 비판해야 된다고 혼잣말한다.

 

홍수방지용 댐인지 모르겠지만, 흉물임에는 틀림없다. 무슨 용기로 수천 년의 비바람이 만든 계곡을 어째서 인간이 마음대로 변형하고 훼손하는 걸까.

 

 

오랜만에 만나는 누린내풀이 꽃을 피웠다. 고약한 냄새를 피우는 앙증맞은 꽃!

 

 

내리막길로 이어지던 서들골이라는 골짜기, 반대 빙향에서 흘러내리는 계곡을 만나 물이 합쳐지는 곳에 이른다.

 

 

이 합수 지점에서 쉬어가기로 한다. 

 

 

 

서들골은 멸종위기종이자 천연기념물인 산양의 서식지. 산양을 자극하지 않도록 조용히 하라는 안내판이 서 있다. 겨울철이면 산양을 볼 수 있다고 한다.

 

 

 

모두들 계곡 주변에 자리를 잡고 흐르는 땀을 씻기도 하고 간식을 먹기도 하면서 휴식을 취한다.

 

 

 

 

갈겨닌지.. 작은 물고기들이 떼지어 헤엄치며 노는 맑은 물.

 

 

 

위에서 내려다본 아름다운 계곡 풍경

 

 

 

 

합수 지점엔 빼어난 계곡이 보이지 않게 이어져 있다고 한다. 계곡 아래쪽에는 물살에 암벽이 패어 형성된  '선녀탕' 또는 '선녀 엉덩이탕'이라 불리는 두 개의 둥그런 소가 있고, 그 아래에는 길게 뻗은 바위와 소가 어우러져 '남근탕'이라 불리는 소가 있다는데 미처 살펴보지 못해 아쉽다.  

 

 

한동안 휴식을 취한 뒤 찬물내기쉼터에서 흘러내리는 계곡의 임도길을 따라 걷는다.

 

갑자기 자동차 소리가 들려 보니 점심심사를 배달해오는 자동차가 오지 않는가.

 

 

 

아직 1/3 정도의 거리만 왔을 뿐인데, 벌써 점심시간이 가까워졌다. 찬물내기 쉼터까진 아직 한참 가야한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