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산하와 문화재

소백산 국망봉 남쪽 초암사, 죽계구곡과 죽계별곡

모산재 2012. 9. 26. 15:23

 

국망봉 아래 골짜기를 거의 벗어날 무렵 개활지가 열리고 거기에서 지은 지 얼마되지 않은 아담하면서도 기품 있는 절을 만난다. 초암사(草庵寺)다.

 

영주에는 소백산 품에 안긴 절이 셋 있다. 비로봉(1,440m)과 국망봉(1,421m), 연화봉(1,394m)을 소백삼봉이라 하는데, 

비로봉 아래에는 비로사, 

연화봉 아래에는 희방사, 국망봉 아래에는 초암사가 있다. 

 

초암사는 소백산에서 가장 아름다운 남쪽 골짜기, 국망봉에서 흘러내리는 죽계천에 자리잡고 있는 아담한 절이다. 의상대사는 호국사찰 자리를 찾기 위하여 이곳에 초막을 짓고 기거하였는데, 멀지 않은 곳에 터를 잡고 창건한 것이 부석사이다. 부석사를 창건한 뒤에 이곳 초막 자리에 절을 지어 초암사라 하였다. 

 

 

초암사 앞 죽계1교. 국망봉에서 내린 물이 이곳을 지나 순흥 소수서원으로 흐흐는데, 이를 죽계천이라 한다. 

 

 

 

 

차례로 보이는 범종각과 대웅전, 대적광전.

 

크지 않은 절이지만 현세불인 삭가모니를 주존으로 모신 대웅전과 법신불인 비로자나불을 모신 대적광전 등 2개의 법당을 갖추고 있다.

 

 

 

 

물론 주법당은 맨 뒤에 있는 전각인 대적광전(大寂光殿). 잘 다듬은 기단석 위에 올려진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집이 미려하고도 웅장한데, 비로자나불을 주존으로 모시고 있다. 

 

 

 

대적광전은 화엄종의 법맥을 잇는 사찰의 본전으로 법신불인 비로자나불이 고요와 빛으로 충만한 상적광토(常寂光土)에서 설법한다고 한 화엄경에 근거한다고 하여 화엄전(華嚴殿)이라고 부르며, 비로자나불을 봉안하므로 비로전(毘盧殿)이라고도 한다.

 

 

 

 

법신불인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보신불(報身佛)인 아미타불과 화신불(化身佛)인 석가모니불의 삼신불을 봉안함으로써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를 상징한다.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되었던 초암사는 1970년대 60대 중반에 출가한 비구니 보원 스님의 신심과 원력으로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고 한다. 스님은 작년 향년 100세로 입적하셨다고 한다.

 

 

※ 보원 스님

 

1911년 경상북도 군위군에서 출행해 61세가 되던 1972년 출가 다음해 보원(寶元)이란 법명을 받았다. 수원 청련암에서 8년간 영선스님을 시봉하다가 1981년 바랑 하나를 짊어지고 초암사를 찾았다. 당시 초암사는 쓰러져가는 요사채 한 칸에 풀잎으로 지붕을 이은 법당에는 불상이 비바람을 맞을 정도였다고 한다. 

 

보원 스님은 공부를 하려는 마음은 내생으로 미루고 중창불사를 하기로 다짐하고 불사를 시작하여 8년을 하루같이 시주를 걷으며 20여리 길을 지척으로 생각하고 왕래하여 오늘날의 초암사를 있게 하였다. 이리하여 요사채와 법당 그리고 종각 등 여러 가지 전각과 시설물들이 건립되어 대사찰로 중창될 수 있었다.

 

 

초암사는 소백산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절임에도 역사의 향기를 찾기 쉽지 않은 절이다. 상당한 규모에도 섬세한 손길이 느껴지는 절집이 이름답지만, 옛 모습을 찾을 길 없는 풍경이 허전하기만하다.  

 

옛것이라고는 경북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 삼층석탑과 부도 둘이 남아 있을 뿐이다.

 

 

높이 3.5m의 초암사 삼층석탑은 비교적 온전한 모습으로 남아 있어 다행스럽다.  

 

 

↑ 사진 출처 : 문화재청 

 

탑은 통일신라 하대에 조성한 것으로, 사각형 지대석 위 이중기단의 각 면석에 우주가 있고 일주씩 탱주를 모각했다. 각 층 옥신에도 우주가 있고, 옥개석 아래 4단의 받침이 있다.

 

 

두 개의 부도는 동부도와 서부도로 불리는데, 특히 서부도가 눈길을 끈다.

 

 

 

↑ 사진 출처 : 문화재청

 

팔각원당형의 서부도는 통일신라시대 양식으로 복원이 잘못된 모습이 안쓰럽다. 기단의 윗받침돌이 뒤집혀 있고 탑신과 기단의 가운데받침돌도 뒤바뀌어져 있다. 8각인 하대석에는 복련이 조각되어 있다. 그리고 가장 아래층의 8각 지대석에는 안상이 음각되어 있다.

 

 

초암사 아래 계곡은 퇴계 이황이 '죽계구곡'이라 명한 계곡이 이어진다.

 

고려말에는 순흥이 고향인 안축이 '죽계별곡'이라는 이름의 경기체가로  흥을 노래하였던 계곡이고 풍기군수를 지낸 주세붕과 그로부터 얼마 뒤 역시 풍기군수로 부임한 이황이 즐겨 찾은 계곡이기도 하다.

 

 

 

 

 

백운동서원을 세운 풍기군수 주세붕(1495~1554)은 문집 <무릉잡고> 중 '소백산 초암사에서 자고(宿小白山草菴寺)'라는 글을 남기고 있는데, 그는 1543년(癸卯) 6월29일 초암사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석륜암으로 올랐다.

 

山立佛身淸淨色     산이 부처님처럼 서서 청정한 빛을 띠고 있는데
溪翻僧偈廣長聲     계곡물 소리 스님의 게송을 뒤집으며 넓고 길게 울려 퍼진다.
臥隣河漢星疑動     은하수 이웃하고 누워 별의 움직임 살피니
心洗塵埃語自淸     마음은 속세의 때를 씻어 말조차 맑아지네.
莫說相酬是求益     말로써 서로 수작하지 않으니 이게 바로 넉넉함일세.
浮生隨處有人情     떠도는 삶, 이르는 곳마다 사람의 정 가득하구나.

 

 

이렇게 옛글 속의 죽계천은 운치 넘치는 아름다운 계곡이지만, 유감스럽게도 날은 벌써 저물어가 그런 운치를 찾을 분위기가 아니다. 계곡을 따라 죽계구곡에 대한 안내라도 되어 있으면 좋으련만 그도 부족하려니와 계곡 주변은 사과농장 등 과수원이 차지하고 있어 접근이 편하지도 않다.

 

 

 

 

 

그저 잘 보이지도 않는 계곡과 거리를 두고 큰길을 따라 내려오며 안축의 '죽계별곡'만 떠올려 볼 뿐이다.

 

안축(安軸: 1287~1348)이 이곳 죽계를 찾았을 때는 온갖 꽃들이 만발하는 계절이었다. 그의 문집

<근재집(謹齋集)>에 실린 '죽계별곡'은 5연으로 되어 있다. 그 중 제2연에 초암사를 찾는 이야기가 나온다.

 

 

宿水樓 福田臺 僧林亭子               숙수사의 누각과 복전사의 누대 그리고 승림사의 정자,

草菴洞 郁錦溪 聚遠樓上               소백산 안 초암동의 초암사와 욱금계의 비로전 그리고 부석사의 취원루에 올라

半醉半醒 紅白花開 山雨裏良         반쯤은 취하고 반쯤은 깨었는데, 붉고 흰 꽃이 피고 산에는 비가 내리는 속에

爲 遊寺 景幾何如                         아! 절에서 노니는 광경, 그것이야 말로 어떠합니까?

高陽酒徒 珠履三千                       진나라 습욱의 고양지에 노는 술꾼들처럼 춘신군의 구슬 신발을 신은 삼천객처럼,

爲 携手相從 景幾何如                  아! 손잡고 서로 친하게 지내는 광경, 그것이야 말로 어떠합니까?

 

 

 

 

 

'죽계별곡'은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1연 : 죽령의 남쪽, 영가(永嘉)의 북쪽, 그리고 소백산 앞에 위치한 천년 고장으로서의 죽계

     2연 : 숙수루(宿水樓)·복전대(福田臺)·승림정자(僧林亭子) 등이 있는 죽계에서 취해 노는 모습

     3연 : 향교에서 육경(六經)에 심취해 있는 문도(門徒)의 정경

     4연 : 가절(佳節)이 돌아와 꽃도 임금을 위해 만개하니 왕을 그리는 천리상사(天里想思)의 정

     5연 : 꽃·방초·녹수(綠樹) 등이 어우러진 운월교광(雲月交光)의 경치를 읊었다.

 

 

최초의 경기체가인 '한림별곡'처럼 '죽계별곡'도 무신정권 아래 성장한 고려말 신흥사대부의 자신감 넘치는 생활정서를 담고 있다. 지식을 열거하듯 노래하며 으스대는 젊은 문신들의 모습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