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산하와 문화재

소백산 비로봉 아래에는 비로사가 있다

모산재 2012. 9. 9. 12:32

 

지난 5월 소백산 산행 때 연화봉에서 최고봉인 아름다운 비로봉(1440m)을 바라만 보고 내려온 것이 못내 아쉬워, 8월 한여름에 비로봉을 찾았다. 

 

 

영주에서 시내버스를 타고 삼가리 종점에 도착한다. 

 

삼가리 종점은 소백산 깊숙한 골짜기에 자리잡고 있다. 몇 집 보이지 않는 작은 마을...

 

 

 

 

 

한여름 소백산을 찾는 사람은 별로 없다.

 

 

 

 

 

종점을 지나 한동안 포장도로가 이어지는데, 중간에 소백산자락길 홍보관이 자리잡고 있다.

 

 

 

 

 

오늘 일정은 삼가리에서 비로사를 지나 달밭골을 거쳐 비로봉을 오르고, 국망봉까지 능선길을 걷다 초암사로 하산하는 것.

 

 

 

 

 

 

소백산 자락길 홍보관을 지나면서 단정하게 블록을 깐 등산로가 이어진다.

 

 

 

 

 

 

 

그렇게 2km쯤 걸어 올라가노라니 왼쪽 산 비탈에 비로사(毘盧寺) 일주문이 나타난다.

 

 

 

 

 

비로사는 조계종 사찰로 의성에 있는 고운사(孤雲寺)의 말사라고 한다. 아담한 일주문이나 돌계단은 조성된 지 얼마 되어보이지 않는다.

 

 

 

 

 

 

 

일주문을 지나 계단을 오르다 보면 왼쪽 언덕에 석조 당간지주가 나타난다.

 

 

 

 

 

 

마주보는 돌기둥 모양은 소박한데, 꼭대기의 바깥면을 둥글게 깎고 앞뒷면은 바깥둘레로 도드라지게 띠를 새기고 그 가운데에 세로선을 두어 단조로움에 변화를 주었다. 기둥 사이에 당간받침돌은 보이지 않고 당간지주 맨 위와 가운데에 당간을 고정시키기 위한 네모난 작은 홈이 보인다.

 

제작 기법으로 보아 비로사 창건 시기인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가파른 계단 위 숲 사이로 전각이 모습을 살짝 드러낸다.

 

 

  

 

 

 

 

가장 먼저 보이는 범종각. 범종 하나만 뎅그러니 달려 있다.

 

 

 

 

 

 

그리고 긴 마당으로 보이는 누각 하나와 마당 반대편으로 보이는 아름다운 요사채...

 

 

 

 

 

모두 지은 지 얼마 되어 보이지 않는 전각들이다. 

 

누각의 이름은 월명루(月明樓). 전각배치도에는 없는 건물이니 최근에 지어졌음이 틀림없다.

 

 

 

 

 

'월명루'라는 이름이나 누각의 형식이 스님들의 강원이라기보다는 음풍농월하는 선비들의 거소처럼 느껴진다.   

 

 

 

 

 

천왕문이 없는 작은 절에 누각 건물이 세워진 것도 특이한데, 여느 절의 누문처럼 법당 마당으로 오르는 위치와 연결되어 강당 역할을 하는 형태로 지어져 있지 않고 경승지의 정자처럼 세워져 있어 낯선 느낌이다.

 

 

 

단청이 없는 백골집으로 지어진 요사채는 비로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물이다.

 

 

 

 

 

 

 

 

다시 계단을 따라 언덕을 올라서면 법당 마당이다.

 

법당은 적광전. 큰 절에서는 '대적광전'이라 부르는 전각으로 법신불인 비로자나불을 모시는 전각이다.

 

 

 

 

 

 

 

법당 안을 들여다보니 삼존불이 아니라 두 분의 부처님만 앉아 있다.

 

 

적광전에는 대개 비로자나불과 석가모니불 그리고 노사나불을 모시는데, 노사나불과 석가모니불은 어디로 가셨는지 그 자리에 다른 부처 한 분이 나란히 앉았다.

 

 

 

 

 

바라볼 때 오른쪽 지권인을 한 부처님이 비로자나불, 왼쪽에 아미타 구품인을 한 부처님은 당연히 아미타부처님일 것이다.

 

 

확인해 보니 이 두 부처님은 각각 비로사 석조아미타여래좌상, 석조비로자나불좌상으로 보물 제996호로 지정되어 있다.

 

 

 

 

 

금박으로 입혀져 있어 금동불로 보기 쉽지만 원래 광배와 대좌를 모두 갖춘 석조 불상으로 광배는 깨진 채 경내에 방치되어 있다고 한다. </span

 

석조아미타여래좌상은 높이 1.13m로 원만한 얼굴과 당당한 어깨가 사실적으로 표현되었고, 가볍게 주먹을 쥔 상태에서 손바닥을 위로 하고 양 손의 엄지 손가락을 맞대고 있는 아미타구품인을 결하고 있다.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은 높이 1.17m로 아미타여래좌상과 양식이 비슷하다. 비로자나불의 수인인, 왼손 검지를 오른손으로 감싼 지권인을 결하고 있다.

 

 

 

 

 

두 불상은 9세기 후반 석불의 특징을 보여주고 아미타불과 비로자나불이 함께 있는 점으로 9세기 통일신라 화엄불교의 특징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적광전 한 쪽 벽에는 신중탱(神衆幀)이 걸려 있다.

 

 

 

 

 

신중탱은 불법을 수호하는 여러 선신(善神)을 도상화한 그림. 감색(紺色) 바탕에 금니로 선묘하여 얼굴 부분만 채색하였는데, 제석과 위태천(사천왕 가운데 남방 증장천 팔장군의 하나, 불법을 수호하는 신)을 중심으로 주위에는 무장을 한 신중들을 배치하였다.

 

 

 

법당 마당의 석탑은 이 절집의 파란만장한 역사를 온 몸으로 증언하는 듯하다. 석탑의 기단석이라기보다는 승탑이나 석등의 기단석으로 보이는데, 위에 올려진 탑신 부재는 제각각이다.

 

 

 

 

 

비로사는 임진왜란 당시 승군의 주둔지로 왜병과 격전을 벌이던 1천여 명의 승군이 전멸하고 비로사는 왜병의 방화로 불탔다고 한다. 그 이후에도 여러 차례의 화재를 겪으며 석조물들이 파손되었고, 그나마 형체를 간직하고 있는 부재들을 다 모아서 쌓아올린 모습일 것이다.

 

 

적광전 바로 옆에는 나한전이 있고 마당 끝에는 반야당이 자리잡고 있다. 나한전은 불제자들을 모신 전각이겠지만 반야당은 어떤 공간일까...  '반야'는 '진실한 생명을 깨달았을 때 나타나는 근원적인 지혜'를 이르는 말... 스님들의 요사로 쓰는지 모르겠다.

 

 

 

 

 

나한전은 최근에 조성했다고 한다.

 

 

 

 

 

나한전의 중앙에는 석가모니불과 두 협시보살을 모셨고 양쪽으로는 16나한이 자리잡고 있다. 

 

 

 

 

 

 

석가삼존상 양쪽, 16 나한상은 모두 제각각인 모습으로 앉았는데, 양쪽 앞에는 험상궂은 인왕이 지키고 서서 잡귀의 접근을 막고 있다.

 

 

 

 

 

 

나한들의 자세와 표정이 다양하고 재미있다. 한 무릎을 세우고 비스듬히 앉아 있기도 하고, 머리를 긁적이기도 하고, 근엄하게 앉아 있기도 하고, 묵상에 잠겨 있기도 하고, 뭔가를 가리키기도 하고, 등을 긁기도 한다. 나한들의 지물(持物)로는 염주, 그릇, 동물, 경(經), 금강저, 과일 등이 있는데, 나한들의 무릎 주변에는 여러 동물들이 함께 표현되고 있어 흥미롭다.

 

 

반야당 처마 아래에서 바라보는 적광전과 나한전

 

 

 

 

 

적광전의 관음보살 벽화가 아름다워 담아본다.

 

 

 

 

 

 

월명루 너머로 보이는 소백산 연봉, 오른쪽 높은 봉우리는 원적봉(961m)쯤일까...

 

 

 

 

 

비로사에서 발굴된 석조 부재들이 마당 안쪽과 마당 끝에 쌓여져 있다

 

 

 

 

 

 

 

 

그런데, 나중에야 진공대사보법탑비(眞空大師普法塔碑)가 비로사에 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리게 되었는데, 범종각 옆 절마당에 있었다는 그 탑비를 본 적이 없으니 어찌된 일일까. 다만 그 자리에 천막이 쳐져 있었던 걸로 보아 복원 수리를 하고 있었던 걸로 보인다.

 

원래 진공대사의 승탑은 원주 흥법사지에 있고 비로사에도 있다고 하는데, 흥법사지의  탑과 석관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 앞뜰에 자리잡고 있다.(참고 : http://blog.daum.net/kheenn/15855072)

 

>진공대사보법탑비는 939년(태조 22)에 세워진 것인데, 비의 뒷면에 입적할 때의 유계(遺誡)를 새긴 것이 특징이다. 진공대사는 고려 태조가 극진히 예우했던 고승. 대사는 가을 단풍이 맑은 시내에 떨어지는 것처럼 자신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알리고, 윗사람을 공경하고 아랫사람을 사랑할 것을 부탁한다. 비문에 적힌 내용의 일부를 인용해 본다.

 

 

분(分)에 따라 정진하여 때를 쫓고 세상을 순리대로 살되 특별한 궤칙(軌則)은 두지 말고, 평범한 진리를 따르도록 하라. 또 방탕하거나 안일하지 말 것이며, 동량(棟梁)이 되려는 원력 또한 잊지 마라. 옳지 않은 일은 불구덩이를 피하듯 처음부터 행하지 말라. 작은 일이든 큰일이든 간에 항상 조심하여 여법(如法)하게 수행토록 하라.

 

 

 

 

 

 

※ 소백산 비로사 개관

 

통일신라시대 진정(眞定)이 창건한 화엄종 절로서 신라 말에는 소백산사(小白山寺)라고도 불리었다.

가난으로 인하여 장가도 들지 못한 채 홀어머니를 봉양하던 진정은 의상이 태백산에서 많은 사람들을 교화한다는 소문을 듣고 출가하여 의상의 문하에서 화엄학을 공부하였다. 3년 뒤 어머니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7일 동안 선정(禪定)에 들었다가 그 소식을 의상에게 전하였다. 진정의 지극한 효성에 감동한 의상은 그의 어머니를 위하여 문도를 거느리고 소백산 추동(錐洞)으로 가서 초가를 짓고 제자 3,000명을 모아 90일 동안 <화엄경>을 강의하였다. 강의가 끝나자 그 어머니가 꿈에 나타나, "나는 벌써 하늘에 환생(還生)했다."고 하였다 한다.

학계에서는 이때의 소백산 추동이 비로사였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비로사사적기>에는 의상이 683년(신문왕 3)에 이 절을 개창하고 비로사라고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신라 말에는 한 승려가 중창하고 진공(眞空)을 청하여 이곳에서 살게 하였는데, 그 때 고려 태조가 방문하여 법문을 듣고 대사를 매우 존중하였다. 그가 937년(태조 20)에 이 절에서 입적하자 태조는 진공대사라는 시호와 함께 보법(普法)이라는 탑호(塔號)를 내려주었다.

1126년(인종 4)에는 왕이 김부식으로 하여금 불아(佛牙)를 이 절에 봉안하도록 하였고, 1385년(우왕 11)에는 환암(幻庵)이 중창하였다. 세조 때에는 복전(福田) 5명을 두어 <화엄경>을 강의하게 하였고 1469년(예종 1)에는 김수온)이 왕실의 복을 비는 도량으로 삼았다.

임진왜란의 병화로 인해 석불상 2구만이 남고 모두 불타버렸으며, 1684년에 40여 칸을 중창하였으나 1907년 법당을 제외한 모든 건물과 사지(寺誌)가 화재로 소실되어 이후 중건하였다.

이 절에서 1572년(선조 5)에 <월인석보>, 1573년에는 <수륙무차평등재의촬요(水陸無遮平等齋義撮要)>, 1574년에 <묘법연화경>이 각각 판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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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정 스님의 효심

 

법사 진정은 신라 사람이다. 출가하기 전 그는 군졸에 적을 두고 있었으며 집이 가난하여 장가도 들지 못하고 지냈다. 공역의 여가에 그는 품팔이로 곡식을 얻어 그의 홀어머니를 봉양해 왔다. 집안의 재산이라곤 오직 다리 부러진 솥이 하나 있을 뿐이었다.

하루는 문전에 중이 와서 전을 지을 철물을 시주하라고 했다. 진정의 어머니는 유일한 재산인 그 다리 부러진 솥을 시주했다. 조금 뒤 진정이 밖에서 돌아오자 어머니는 그 사실을 얘기했다. 그리고 아들의 뜻이 어떤가를 궁금히 살펴보았다. 진정은 기쁜 표정이 되어 말했다.

"불사에 시주한다는 건 얼마나 좋은 일인가요? 비록 솥이 없은들 그까짓 것 뭐 걱정이겠습니까?"

그러고는 질항아리로 솥을 삼아 음식을 익혀 봉양했다. 진정은 그가 군졸로 종사하고 있을 때에 의상스님이 태백산에 있으면서 설법을 하여 사람들을 이롭게 한다는 사람들의 얘기를 듣고서 그 즉시로 향보하는 마음이 생겨났다. 진정은 그의 어머니에게 고했다.

"어머님 모시기를 끝마친 뒤에는 의상스님에게 투신하여 머리를 깎고 불도를 공부해야겠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말했다.

"불법은 만나기 어렵고 인생은 빠른 것, 나에게 봉양을 끝마친 뒤라면 늦지 않겠는가? 내가 죽기 전에 네가 가서 도를 깨쳤다는 소식을 듣은 것만 못할 것이니 이모저모 생각하지 말고 빨리 가는 것이 좋겠구나."
"어머님의 만년에 오직 제가 곁에 있을 뿐인데 어찌 차마 어머님을 버리고 출가 할 수 있겠습니까?"
"나를 위해서 출가를 못하겠다면 그것은 나로 하여금 곧 지옥에 떨어지게 하는 것이다. 그런대서야 비록 생전에 진수성찬으로 봉양한대도 그것이 어찌 효도가 될 수 있겠는가? 나야 의식을 남의 문전에서 얻어서라도 타고난 수명은 누릴 것이니 나에게 효도를 행하려거든 그런 말 아예 말아라"

>진정은 오랫동안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의 어머니는 곧장 일어나서 쌀자루를 깡그리 털어냈다. 일곱되의 쌀, 그것이 전부였다. 그것으로 밥을 지어 놓고 진정에게 말했다.

"밥을 지어먹은 뒤에 가자면 더딜까 해서다. 내보는 앞에서 그 한 됫박은 먹고 나머지 여석 됫박은 싸라. 그리고 빨리 부디 빨리 떠나도록 해라."

진정은 울음을 삼키며 굳이 사양했다.

"어머니를 버리고 출가하는 그것만도 인자(人子)의 차마 하지 못할 짓인데 더구나 많찮은 간장, 수일간의 식량 남은 것마저를 남김없이 싸가지고 간다면 땅은 나를 무엇이라 하겠습니까?"

세 번을 사양하매 세 번을 권하여 왔다. 진정은 어머니의 뜻을 어기기 어려워 그 밤으로 태백산을 향해 발정했다. 사흘만에 태백산에 당도하여 의상스님에게 출가해, 머리를 깎고 마침내 그의 제자가 되었다. 법명을 <진정>이라고 했다. 입산한지 3년, 어머니의 부음이 전해왔다. 진정은 가부좌를 하고 선정에 들어가 7일 만에야 일어섰다. 이 진정의 선정을 두고 설자(說者)는 말하기를 진정이 그의 어머니에 대한 추모와 애통의 정이 너무나 벅차서 거의 감당할 수가 없었기에 그것을 선정으로 세척해 낸 것 이라고 했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선정으로 그의 어머니의 환생한 곳을 관찰한 것이라고 했다. 또 어떤 이는 그렇게 하는 것 이야말로 틀림없이 명복을 비는 일이라고 말했다. 진정은 7일간의 선정에서 나와 그 어머니의 천도에 관한 일을 의상스님에게 여쭈었다.

의상스님은 문도들을 데리고 소백산의 추동으로 가서 초목을 얽어 집을 삼고 도중 3천을 모아 90일간의 화엄경을 강했다. 제자 지통이 그 강석에 수행하여 강설의 요지를 뽑아 모아 두 권을 만들어 <추동기>라 이름하여 세상에 유통하게 했다. 90일간의 그의 법회가 끝나자 진정의 어머니는 꿈에 나타나 알렸다.

"나는 이미 하늘에 태어났다."

 

-출처 : http://www.koreatemple.net/korea_temple/traditional_temple/story/view.asp?temple_seq=1606&category_id=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