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여행

4.3의 비극을 지켜본 다랑쉬오름, 아끈다랑쉬오름, 다랑쉬동굴

모산재 2010. 3. 29. 10:03

 

2월 중순에 찾았던 제주도를 3월에 다시 찾았다. 그 때처럼 제주도로 학교를 옮긴 이 선생님 격려 방문이라는 명목인데, 일행은 15년 전 학교에서 인연을 맺은 7명의 사내들이다.

 

금요일 저녁 제주항공으로 제주도에 도착하니 어둠이 깃들고 있다. 이 선생님 커플이 마중나와 있다. 지난번에 먹었던 노형사거리에 있는 횟집 '우리집'에서 저녁식사를 하고, 두 분이 보금자리를 마련한 하귀로 향한다. 아름다운 해안선과 멋진 전망을 자랑하는 펜션이다. 느지막한 나이에 인연을 맺은 이분들이 서로 "자기야~!" 하고 부르는 소리에 몸서리를 치면서도, 행복해 하는 모습에 모두들 즐거워한다.   

 

 

격려 방문이라 했지만, 모처럼 내려온 제주도에서 '격려'보다는 '여행'이 더 큰 목적이 될 수밖에 없잖은가. 이튿날 아침, 이 선생님은 준비해 놓았다는 듯이 오름의 여왕은 다랑쉬라며 그곳부터 가자고 제안한다. 지난 2월 용눈이오름에서 건너다보기만 하고 그냥 발길을 돌려야 했던 오름, 내심 꼭 가 봐야할 곳이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얼마나 다행인가!

 

오름도 오름이지만 말로만 듣던 다랑쉬동굴 주변 4.3의 흔적을 꼭 더듬어보고 싶기도 했다.

 

▲ 아끈다랑쉬오름을 오르며 돌아본 다랑쉬오름 전경

 

 

 

노형동 전주 남부시장의 콩나물해장국 맛을 내는 어느 식당에서 해장국으로 아침식사를 하고 출발하기로 한다. 잠시 기다리는 사이 부근에서 산보를 나갔는데, 하천변에는 벌써 샛노란 개나리꽃이 피었다.앙상한 겨울 회초리에 꽃등을 달고 제주에 봄이 왔다.

 

 

 

 

 

4.3으로 불타고 폐허로 남은 다랑쉬마을

 

다랑쉬오름이 있는 구좌읍 세화리 쪽을 향해 차는 달린다, 성산 방향으로 한참 달리다 보면 남쪽으로 용눈이오름과 손지오름이 건너다보이는 곳에 자리잡고 있다. 용눈이오름이나 손지오름 등 주변 오름에 비해 훨씬 크고 높아서 멀리에서도 단연 눈에 띄는 오름이다.

 

바로 앞 용눈이오름을 오른편으로 두고 다랑쉬오름을 향해 북쪽길로 들어선다. 좁은 길로 들어서 얼마간 가자 사라진 다랑쉬마을 표석이 나타난다. 곁에는 사진으로만 보았던 앙상한 팽나무(제주말로 폭낭)가 우두커니 지키고 서 있다.

 

 

▼ 멀리 다랑쉬오름이 배경으로 보인다.

 

 

 

 

4.3 당시 다랑쉬 마을에는 10여 가구 40여 명의 주민들이 산디(밭벼), 피, 메밀, 조 등을 일구거나 소와 말을 키우며 평화롭게 살고 있었다. 그러나 1948년 11월, 제주도 전역 중산간 마을에 소새령이 내려지면서 다랑쉬마을도 토벌대에 의해 불타버리고 마을사람들은 살길을 찾아 해안마을로 떠났다고 한다.

그로부터 6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원주민들은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팽나무와 돌담과 무성한 대나무숲만이 그 옛날 사람들이 살았던 집터임을 말없이 일러주고 있을 뿐이다. 

 

 

 

▼ 팽나무를 타고 오른 덩굴나무들이 엉켜 머리를 풀어헤친 듯한 모습이 을씨년스럽다. 마을이 불타고 양민들이 학살되었던 그날을 잊지 못하고 통곡하며 그 아픔을 증언하는 듯하다.

 

 

 

다랑쉬마을이 당했던 비극 한 장면만 인용하기로 하자. 

 

4·3 당시 다랑쉬 마을에 살았다는 문은철씨는 "바로 이 자리야, 이 나무 밑에서 군인들에게 난장이 아저씨가 맞아 죽었다고… 무자비하게 패죽였어. 난장이 아저씨는 이 동네에서 우마를 키우는 테우리였는데, 일자 모르는 무식한 사람이라. 그날 우마에 물을 먹이려고 여기에 왔다가 나무에 삐라가 붙어있는 것을 보고 담배 말아 피우려고 그걸 주머니에 넣었던 모양이라. 그게 군인들에게 발각되어 일을 당한거지. 그 난장이 아저씨가 무슨 죄라. 그저 글 모른 게 죄지"라고 말하며 눈물을 글썽였다. 

 

 

 

 

4.3의 비극을 지켜보며 통곡했을 오름의 여왕, 다랑쉬오름을 오르다

 

다랑쉬마을 표석을 지나자마자 금방 다랑쉬오름이 모습을 나타낸다. 산발치는 삼나무 숲이 둘러 싸고 오름을 가리고 섰다. 주차장엔 오름을 찾는 차량들이 몇 대 서 있다. 오름의 바로 앞 동쪽에는 말로만 듣던 나지막한 아끈다랑쉬오름이 작은 들판을 사이에 두고 이어져 있다.

 

 

 

 

 

비자림과 용눈이오름 사이에 우뚝 솟아 있는 다랑쉬오름(382m)은 이 일대에서는 높은오름(405m) 다음으로 높은 오름이라 한다. 높이는 382.4m, 비고 227m, 둘레는 3,391m, 면적은 800,463㎡, 폭은 1,013m이며, 모양은 원형으로 되어 있다. 

 

 

어째서 이름이 다랑쉬일까?

 

바위에 새긴 안내문은 이에 대해 '다랑쉬'의 뜻이 확실하지 않다고 한다. 흔히는 굼부리가 달처럼 둥글다고 해서 다랑쉬라고 부른지만 이는 민간어원일 뿐 믿을 만한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자료를 찾다보니 어느 학자는 '달'이 '높다'는 뜻의 고구려어 '달(達)'에서, '쉬'는 '봉우리'를 뜻하는 '수리'에서 온 말이라고 풀이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달'이란 뜻과 '랑'의 소리를 빌린 향찰식 표기 이름인 월랑봉(月郞峰)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음을 빌린 한자 표기인 다랑시악(多郞時岳)으로 쓰기도 한다.

 

 

 

오름의 입구 낮은 언덕 여기저기엔 벌써 왜제비꽃들이 피었다.

 

 

 

그리고 얼마쯤 올라가다 길가 언덕에 꽃을 피운 까치무릇을 만난다. 양지바른 언덕 짧은 꽃대에 여섯 갈래의 커다란 꽃을 단 모습이 대견스럽고 사랑스럽다.

 

 

 

 

원래 직선으로 되어 있던 오름 오르는 길을 갈짓자로 바꿔 놓았다. 사람들이 원낙 많이 찾으면서 표토 유실이 많이 일어나고 있다. 생태 환경을 보전하기 위한 조치가 갸륵해 보인다.

 

 

 

이게 뭘까, 자난초일까... 하고 갸웃거리는데, 난초에 일가견이 있는 강 선생님이 새우란일 듯하다는 말에, 과연!

 

 

 

동쪽 아끈다랑쉬오름 너머로 멀리 성산 일출봉이 보이고, 지미봉 앞바다에 왼쪽으로 길게 누운 우도가 눈에 든다.

 

 

 

 

언덕을 올라서자 커다란 굼부리, 화구가 나타난다. 화구 능선의 모양이 북쪽이 높고 남쪽이 낮으며 동서는 완만한 비탈을 이루고 있다.

 

멀리 왼편으로 높은오름이 아스라이, 오른쪽으로는 우뚝 솟은 높은오름이 또렷이 보인다.

 

 

 

북쪽 정상의 볕바른 사면은 까치무릇(산자고)의 군락지이다. 더러는 꽃잎을 열었지만 대개는 아직 꽃봉오리인 모습들이다.

 

 

 

 

정상에서 내려본 화구. 110m나 되는 굼부리의 깊이가 대단한데 백록담과 비슷하다고 한다. 화구가 가장 깊은 산굼부리(200∼380m)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화구의 둘레는 1,500m라고 하니 한 바퀴 돌며 둘러 보는 것이 크게 부담스럽지 않은 좋은 산책로이다.

 

 

멀리 용눈이오름과 손지오름, 동거문오름이 나란히 보인다.

 

 

 

서북쪽엔 돋오름(돗오름)이 솟아 있다. 돼지(돗)를 닮아 붙은 이름이란다.

동쪽 사면에는 비자림이 자리하고 있다.

 

 

 

서쪽 화구 너머로 보이는 높은오름과 동검은오름

 

 

 

서쪽 화구 능선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 가는 길, 용눈이오른과 손지오름이 보인다.

 

 

 

남서방향으로 손지오름, 동검은오름, 높은오름이 나란히 서 있다.

 

그런데 활주로처럼 길게 벋어 있는 이 흔적은 무엇일까, 예전 비행장이라도 있기나 했던 걸까. 몹시 궁금해 하며 걷고 있는데, 마침 바위 위에서 쉬고 있는 제주도인 부부를 만난다. 그 분의 말씀을 들으니 활주로도 비행장도 아니고 온천으로 개발하려던 흔적이라고 한다.

 

 

 

확인해 보니, 1994년 이곳 세화곶자왈이 세화·송당 온천지구로 고시되면서 평탄화 작업 등 대규모 개발이 진행되었는데 2001년 공사가 중단되고 사업 자체가 백지화되면서 이렇게 방치되고 있다고 한다.

 

 

 

 

주변의 오름 이름을 이분들에게 확인하고서 다랑쉬굴의 위치를 물어보니, 어디서 왔느냐고 묻는다. 서울이라고 하니 뜸을 들이다 사람 많이 죽은 곳이라고 하며, 아끈다랑쉬오름 너머를 가리키며 위치를 정확히 말하지 않고 말꼬리를 흐린다.

 

 

남쪽 화구 언덕에서 바라본 다랑쉬오름 정상

 

 

 

용눈이오름, 손지오름

 

 

 

왼쪽 가운데 숲이 우거진 부분이 4.3때 불타고 사라진 다랑쉬마을 자리이다. 오른쪽 아래 이 낯선 건물들은 뭔지... 외지인이 지은 방갈로 비슷한 건물이라는데, 우주선도 아니고 참 생뚱맞기 짝이 없다. 왜 하필 4.3의 비극이 쓸고 간 그 아픈 상처의 자리에 저런 발상이 들어섰을까!

 

 

 

다랑쉬오름 정상

 

 

 

용눈이오름

 

 

 

 

자연에 묻히며 생각에 잠길 수 있는 호젓하고 편안한 산책길, 아끈다랑쉬오름

 

 

다시 동쪽으로 돌아와 '작은 다랑쉬오름'이라는 뜻의 아끈다랑쉬오름을 바라보며 다랑쉬오름을 내려선다.

 

 

 

 

다랑쉬오름입구에서 본 아끈다랑쉬오름의 모습이다.오름이라기엔 그냥 편안하게 느껴지는 작은 언덕이다. 해발 높이 198m, 비고 58m이니 다랑쉬오름의 절반 정도, 남녀노소가 산책하기엔 이보다 좋은 길도 없을 것이다. 

 

다랑쉬오름을 올랐던 이들은 대개 작은 들판을 건너 작고 귀여운 이 오름을 둘러보고 간다.

 

 

 

주변 들판에는 유채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이 작은 언덕에 무슨 화구(굼부리)가 있을까 했는데, 그리 깊지는 않은 대야 모양의 분화구는 엄연히 있다. 키를 가리는 억새 무성한 분화구 능선의 산책로를 걸으면서 제법 호젓한 정취를 느낄 수 있다. 인공이라곤 없는 자연, 찾는 이도 그리 많지 않으니 쉼없이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며 맘껏 생각에 잠길 수 있는 공간이다.

 

 

 

 

다랑쉬동굴, 이정표 앞에서 길을 잃고 돌아서다

 

 

아끈다랑쉬오름을 되내려온 다음 다랑쉬동굴을 찾기로 한다. 이곳을 찾기 전에는 다랑쉬동굴이 다랑쉬오름 산발치나 기슭 어디쯤에 있을 것으로 막연히 상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아까 다랑쉬오름에서 만났던 제주도분이 아끈다랑쉬오름 너머라고 하길래, 그렇다면 용눈이오름과의 사이인데 거긴 허허벌판 아닌가.

 

 

어쨌거나...

 

다랑쉬마을 표석이 있던 곳을 지나 몇 십 미터쯤 나갔을까, 그곳에 다랑쉬동굴임을 가리키는 이정표가 나타난다. 화살표가 가리키는 대로 왼쪽 들길을 들어서 몇 백미터 들어가니 다시 이정표가 나타나 오른쪽 들길로 들어서라고 한다. 300m만 가면 된단다.

 

 

 

그런데 이정표가 가리키는 대로 들어서 50m쯤 들어서니, 그곳은 무밭이거나 빈 밭들만 휑하니 펼쳐져 있을 뿐이다. 좀더 먼 곳으로는 여기저기 무덤 같은 신이대숲들과 억새밭들이 늘어서 있다. 그 유명한 다랑쉬동굴이라면 사람들이 다닌 발길만으로도 뚜렷한 흔적을 보일 것이라 기대했는데 길은 실종되었다.

 

저런 평지에 동굴이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터여서, 밭을 지나 언덕이 될 만한 주변의 지형들을 여기저기 헤집고 돌아다녀보았지만 도무지 찾을 수 없다. 오늘 이곳을 찾는 사람이라도 있어 주었으면 좋으련만 우리 네 사람 외에는 아무도 없다. 20~30분을 허비하고도 찾지 못하고 결국 발길을 돌리고 말았다. 

 

 

돌아서는 발길이 무겁기 짝이 없다. 생각해보니 다랑쉬동굴의 비극은 현재형인 듯하다. 4.3이 진정 명예회복이 되었을진대 저 엄청난 비극의 현장을 찾는 사람들을 이렇게 헤매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마지못해 무성의한 이정표만 세웠을 뿐 현장으로 접근하는 길은 모호하게 방치해 둔 관청의 의도를 충분히 읽을 수 있는 것이다. 민간 차원에서도 할 수 있는 일이지만 그조차도 금기시되는 것이 제주도의 현실임을 느낄 수 있다. 

 

다랑쉬의 비극에 대해서는 다른 분들의 노고를 빌리는 것으로 대신하기로 한다.  

 

 

 


※ 제주 4·3 대량학살을 이끈 '초토화작전', 다랑쉬동굴 집단 학살

<이 글은 굴렁쇠님의 4.3의 비극을 다룬 '4.3의 슬픈 증언' 연재글 중에서 여섯 번째 글을 인용한 것입니다. 지금은 원글이 사라진 상태이므로 주소를 밝히지 못함을 알려드립니다.>


1948년 11월부터 1949년 2월까지 약 4개월 동안 벌어진 '초토화 작전' 때 대부분의 중산간마을이 불에 타 사라졌다. 제주섬은 그야말로 불바다가 됐다. 불의 섬이 화산폭발 때 말고도 또 있었을까. 초토화 작전은 반인륜적 범죄로 국제법으로도 엄격히 금지되어 있는 법이었다. 11월 중순 이전에는 주로 젊은 남자들이 희생됐지만 이 때부터는 남녀노소가 따로 없었다. 토벌대는 무고한 양민을 향해 '빨갱이 사냥'을 했다. 제주 4·3사건 희생자 대부분이 이 때에 희생됐다. 제주도에 불법 계엄령이 선포된 것도 이 시기다.

강경진압작전은 중산간마을에 대한 방화와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총살하는 형태로 벌어졌다. 이 시기에 토벌대와 무장대 사이의 교전은 흔치 않았다. 저항할 힘조차 없이 두려움에 떠는 제주 섬주민들이 주로 희생됐다. 이 작전의 총대는 9연대 송요찬 연대장이 맡았다. 그는 무장대의 근거지를 없앤다는 구실 아래 거처 가능한 곳을 없애고 모두 불태워 버릴 것을 지시했다. 다른 지방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사례다. 무자비하게 양민을 학살하는데 눈부신 활약을 한 송요찬 연대장은 일본군 출신이다.

당초 진압군의 작전 개념은 중산간마을 주민들을 해변마을로 소개(疎開)시키고, 해변마을에서는 주민감시체계를 구축함으로써 무장대의 근거지를 없애는 것이었다. 이 소개령은 다수의 제주도민들이 '폭도의 정신적 가담자'라는 전제 아래, 주민들을 집단 이주시킨 후 '보갑제'라는 연대책임식 주민감시체계를 구축해 일반 주민과 무장대를 차단시키는 것이었다. 이때 산간 벽지에 있는 사람이 해안지대로 내려오지 못했거나 숨어 지내게 되면 모두 빨갱이 신세가 됐다.

그러나 진압군은 이것마저 지키지 않았다. 곳곳의 중산간마을에서 소개령이 채 전해지기도 전에 마을을 덮쳐 집을 불태우고 주민들을 총살해 버렸다. 또 소개령이 전달돼 해변마을로 내려온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가족 중 한 명이라도 사라졌다면 '입산자 가족', '도피자가족'이라 하여 총살했다.

1948년 12월 중순께 이르러서는 작전이 바뀌기 시작했다. 미군 G-2보고서에 의하면, 대전의 2연대와 교대키로 된 9연대가 제주를 떠나기 앞서 '훌륭한 토벌업적을 세우려는 욕망'에 의해 과잉진압 성격의 군사작전을 전개한 사실이 드러났다. 이른바 '대살(代殺)' '자수사건' '함정토벌', 그리고 산중에 은신한 주민들을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총살하는 등 '전과'에 열을 올리면서 제주도민의 희생은 더욱 컸다.

미국무성 관리인 존 메릴의 논문 <제주도 반란>에서도 "학살극이 절정에 달했던 12월 중순께는 무고한 양민 630명이 단 1주일 동안에 살해됐다"고 기록하고 있다.


다랑쉬굴 양민집단학살 사례

이번에 다루는 사례는 바로 이 '초토화 작전' 시기에 발생한 '다랑쉬굴 집단학살사건'이다. 이 학살 사례만큼 제주4·3민중항쟁의 총체적 모순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도 드물다. 학살의 광풍을 피해 오직 실날같은 생존에 운명을 건 섬주민들의 입산과 참혹한 죽음, 44년 동안 방치된 시신, 국가와 지방정부에 의해 불태워져 바다에 뿌려진 수장, 학살현장 봉쇄로 이어진 일련의 역사에서 다랑쉬굴의 슬픈 노래는 끝나지 않았고, 제주 4·3도 계속되고 있음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다랑쉬굴은 제주도 구좌읍 중산간지대에 있는 동굴이다. 아름다운 능선이 하늘로 이어지다가 정상에는 세상을 삼킬 듯이 입을 벌린 굼부리를 간직한 다랑쉬오름 아래 속칭 '선수머세'라 불리는 곳에 있다. 4·3민중항쟁 이전까지는 이 오름 자락에는 마을이 있었다. 10여 가구의 주민들이 목축과 농사를 지으며 평화롭게 살던 산촌이었다. 1948년 겨울 어느날, 소개령이 내려지면서 군경토벌대에 의해 마을이 불타버리고, 지금은 수백년을 지켜온 팽나무와 집터마다 대나무숲만이 무성하게 잃어버린 마을 '다랑쉬'를 지키고 있다.

1948년 12월 18일(음력 11월 18일) 다랑쉬굴에 대한 토벌작전은 함덕 주둔의 제9연대 제2대대의 지휘아래 군·경·민 합동으로 이루어졌다. 초토화 작전이 진행되면서 비무장민간인에 대한 집단학살이 이루어져 마을의 젊은 남자들의 신변은 누구도 보장할 수 없게 됐다. 특히 소개민과 마을의 젊은 사람들에 대한 심사가 이루어지면서 수많은 억울한 희생이 나타났다. 이제 마을의 젊은 사람들은 들과 산으로 임시 피신하거나 아니면 마을에 남아 있다가 요행히 경찰의 눈을 피해 살아남는 방법 밖에 없었다.

또한 이 시기부터는 개인감정에 의한 거짓 밀고로 죽어간 사람들도 대다수 나타나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마을에 무장대가 습격하면 그 책임을 민보단이나 가족, 친척에게 전가해 '대살'하는 행위도 빈번하게 이루어졌다.

종달리 청년들이 피신하던 날은 48년 11월 18일이었다. 이날 종달리에서는 이 마을 김호준과 채정옥이 무장대에 의해 납치됐다. 이 납치사건이 발생하면서 이러한 책임이 자신들에게 덮어 씌워지지나 않을까 하는 우려에서 결국 이들은 자진해서 피신하게 된 것이다. 항쟁 발발초기에 입산하지 않고 이 시기에 산으로 피신한 것은 적어도 생존을 위한 피신의 경우다. 피신한 후 납치됐던 채정옥과 이들 청년들은 다랑쉬굴에서 함께 생활하기도 했다. 당시 채정옥씨는 납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부인은 도피자 가족으로 몰려 희생됐고, 만약 마을에 있으면 자신도 도피자로 몰려 처형될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종달리 및 하도리 주민 20여명이 숨어 지내는 다랑쉬굴에 군경토벌대가 들이닥친 날은 1948년 12월 18일. 당시 민보단 간부로 토벌작전에 따라 나섰던 오지봉씨(증언 당시 75세·구좌읍 종달리)는 이렇게 증언했다.

"군·경·민 합동 토벌대가 빗질하듯 다랑쉬오름을 포위하며 수색하였다가 굴을 발견했지. 굴밖에 있던 사람들은 바로 사살됐어. 굴 입구가 양쪽에 두 개였는데, 나오라! 나오라! 소리쳤는데 나오지도 않고 그래서, 토벌대가 처음에는 입구에 수류탄을 던졌어. 그래도 사람들이 나오지 않자, '검불'로 불을 피운 후 구멍을 막아 질식사시켰어."(1992년 4월 3일 제민일보 증언 보도)

이날 10평 남짓한 좁은 굴 속에 있다가 11명이 질식해 숨졌다. 희생자 가운데는 아홉살난 어린이도 있었다. 사망자 11명의 신원은 구좌읍 종달리 출신의 강태룡(34) 박봉관(27) 고순환(27) 고순경(25) 고태원(25) 고두만(21) 함명입(21)과 하도리 출신인 김진생(51) 부성만(24) 이성란(24) 이성란의 아들 이재수(9) 등 남자 8명, 여자 3명이었다.

다랑쉬 굴에 있다가 다른 굴로 피신하는 바람에 참변을 모면했던 채정옥씨(증언 당시 67세·구좌읍 종달리)는 당시 학살을 이렇게 증언했다.

"사건이 나던 날은 12월 18일로 생생히 기억이 납니다. 나도 다랑쉬굴에 같이 살았어요. 토벌 당시에 나는 굴 안에서 나와 있었는데, 구좌면 면당부에서 토벌대에 의해 다랑쉬굴이 습격 당했다며 면포를 주면서 시신을 잘 정돈하고 오라고 했습니다.

하도리 출신 오치악과 고완규 등과 함께 갔는데, 밤에 와서 보니 우리 마을 강태용이 죽어 있고, 나머지는 질식해 죽어 있었어요. 입구에는 불을 피웠던 흔적들이 쌓여 있었고, 굴 안은 그때까지 연기로 가득했는데 속에 들어가보니까 돌 구석, 땅 속에 코를 파묻고 죽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눈·코·귀에서 피가 나서 형편없었지. 하도사람 한 분은 손톱이 없을 정도로 땅을 파다 죽어 있었고...

우리는 시체를 수습했는데, 남쪽에는 하도 사람들을 일렬로 눕히고, 우리 종달리 사람들은 북쪽에 차례로 눕혔습니다. 10∼13명은 됐어요. 그때 눕힌 순서대로 1번 누구, 2번 누구, 기록을 했었는데 그 수첩은 피신다니다 보니 잊어버렸습니다."(1992년 3월 29일 증언)

그때 채정옥씨는 입구 쪽의 굴만 살폈고 북쪽 굴 안으로는 들어가지 못했다. 그래서 굴 안쪽에 있던 시신 한 구는 확인하지 못해 발견했을 때는 고통스럽게 사망한 당시 모습 그대로 누워있었다.

이날 다랑쉬굴에서는 최소 19명 이상이 학살됐다. 동굴 주변에서 추가로 희생된 8명은 구좌읍 종달리 출신의 박순녀(29) 박순녀아들(7) 이경수(51) 강희선(50) 부정순(28) 이덕일(9) 이홍규(31)과 구좌읍 하도리 출신의 윤재만(25)이다. 10세 이하의 어린이 3명, 50세 이상이 3명, 20∼30대 부녀자 4명, 이외 성인 남자 9명 등 가족단위 피난민들이었다. 희생자들은 김진생씨 일가, 고순경씨 형제, 박순녀씨 가족, 이홍규씨 가족 등 대부분 부부와 어린아이가 딸린 가족이었으며, 세가족은 50세 이상의 부모를 모시고 있었다. 특히 고순경씨 가족의 경우, 부모와 부인, 형 부부, 10세 이하의 조카 2명 등 가족 8명이 피신했다가 고순경씨 형제는 다랑쉬굴에서, 부모와 형수는 다른 곳에서 학살됐고, 어린 조카 2명만 살아 남았다.

이들은 비무장 민간인들이었다. 동굴 속에 널려 있는 유물들만 보더라도 이들이 단순 피난민이었음을 말해준다. 대부분의 유물들은 허벅, 그릇, 솥, 항아리 등 취사도구와 쇠스랑과 톱, 곡괭이와 같은 농기구였다. 다랑쉬 굴 속에서는 플라스틱 안경, 흰색 단추, 혁대, 버클, 옷감, 고무신, 질그릇, 놋그릇, 놋수저, 가마솥, 항아리, 물허벅, 접시, 놋쇠로 만든 제기용 잔받침, 물통, 프라이팬, 가위, 요강, 석쇠, 화로, 구덕, 주전자, 나무주걱 등의 생활용품과 낫, 도끼, 톱, 나대, 자귀, 곡괭이, 숫돌 등 연장류가 발견됐다. 그리고 외따로 떨어져 있던 유골 1구 옆에는 그가 사용했던 것으로 보이는 철모, 군화, 철창, 대검이 남아 있었다.

이것이 제주4·3 학살의 실상이다. 마을사람들이 아무런 죄도 없이 미군정과 이승만 친미독재정권이 휘두른 살육작전으로 끔찍이 희생됐다. 다랑쉬굴에 피신해 있던 주민들은 군경합동토벌대가 굴 입구에 지핀 불의 연기에 숨이 막혀 참변을 당했다. 희생자들은 학살의 광풍을 피해, 오직 생존을 위해 어지러운 시국만 지나면 다시 농사를 지으며 소박하게 살아보겠다고 호미와 쇠스랑, 곡괭이를 들고 깜깜한 굴로 숨어들었던 종달리·하도리 주민들이었다.


다시, 바다에 수장된 슬픈 영혼들

이들은 죽어서도 오랜 세월 버림받는 운명에 처해졌다. 유족들은 몰랐었는가. 그렇지 않다. 학살직후 유족들은 토벌작전에 동행했던 민보단으로부터 사망소식을 들었다. 그렇지만 해안에서 4km 이상 중산간지대에 다니는 것은 '적'으로 간주되어 이유 불문하고 사살되기 때문에 다랑쉬굴까지 접근할 수가 없었다. 폭도로 몰리는 것은 곧 죽음의 덫에 걸려드는 것이었다. 다랑쉬굴의 희생자는 군경토벌대에 의해 희생됐기 때문에 어린아이까지도 모두 '폭도=빨갱이'로 규정돼 있었다. 다랑쉬굴을 지척에 두고도 두려움과 피해의식에 갇혀 시신을 수습하지 못하는 유가족들은 한세월 죄책감으로 피눈물을 흘려야 했다. 직계유족마저 4·3으로 희생된 경우가 많았다. 남아있던 유족들마저 폭도가족이라는 세상의 냉대와 질시 속에서 고향을 떠나 버렸다.

그리고 44년이 흘렀다. 1992년 4월 2일, 제주4·3연구소에 의해 그 참혹한 모습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다랑쉬굴의 유골이 최초 발견된 시기는 1991년 12월 22일 제주4·3연구소 조사팀에 의해서다.)

하지만 정부와 행정당국은 이데올로기로 덧칠하여 다시 한번 44년이 지나도록 구천의 혼백이 되어 칠흑 같은 어둠 속을 헤매던 이들을 두 번 죽이는 슬픈 일이 발생했다. 다랑쉬굴 4·3희생자 유골 발견 이후 희생자들이 단순 피난민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와 장례식 문제에 역사적 진실이 가려져 버린 것이다. 그 과정에서 검찰과 경찰, 행정기관에서는 발견 초기부터 다랑쉬굴 희생자들을 '불순한 세력'으로 몰아갔고, 진실을 왜곡하기에 급급했다. 지금과는 사뭇 다른 판도였다.

그들은 다랑쉬굴 집단학살사건이 세상에 알려지자 당일 현장으로 달려가 서둘러 바로 공식 입장을 발표했다. "다랑쉬굴 희생자들은 토벌대에 발각되자 집단 자살한 것으로 추정된다"는 내용이었다. 허위주장이었다. 현장 목격자들이 나타나면서 진실이 아니었음이 판명나자 경찰은 다시 "다랑쉬굴은 남로당 유격대의 비밀 아지트였다"며 색깔논쟁으로 이어갔다.

이 사건에 대한 경찰의 왜곡된 주장은 장례식으로까지 영향을 미쳤다. 무장대들에게 피해를 본 마을 주민과 유족간에 심각한 갈등이 빚어진 것도 이들 기관의 책임이 컸다. 경찰과 행정당국에서는 '폭도들의 무덤을 만들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여론을 앞세워 당초 유족회의에서 '합동묘역을 조성해 안장'하기로 결정했던 사항을 '매장'이 아닌 '화장'으로 번복 결정하는데 앞장섰다. 다랑쉬굴 4·3희생자의 장례식을 '제주도민장'으로 치르고 4·3의 한과 상처를 치유하는 디딤돌을 놓아 화합의 징표로 보존하고자 하는 노력도 결국 무산되고 말았다.

1992년 5월 15일, 그 억울한 영혼들은 구좌읍 김녕리 앞바다에 한 줌의 재가 되어 뿌려졌다.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말 한마디 못하고 저 음습한 동굴 속에서 44년을 기다려온 조상의 유골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4·3의 소용돌이 속에서 처참하게 희생된 혼백들에 대한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은 별로 중요하지가 않았다. 뼛가루를 바다에 뿌리던 후손들은 속죄하는 마음으로 이 안타까운 상황에 대해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시신들이 누워 있던 동굴 역시 포크레인을 동원하여 동굴 입구를 커다란 돌로 틀어막고 흙으로 덮어 버렸다. 억울한 영혼을 달래지도 못하고, 진상규명도 덮어둔 채 '다랑쉬굴 집단학살사건'을 역사의 벌판에 그대로 내던져 버렸다. 아직도 동굴 속에는 수습하다 남은 유골들의 뼛조각과 그들이 사용했을 유물들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어쩌면 두 번 죽임을 당해야 했던 영혼들의 원한이 고스란히 담겨있는지도 모른다.

다랑쉬굴은 이제 진실의 역사에 되돌려 주어야 한다. 유물이 있는 그대로 보존하여 역사의 증거물로 남겨두어야 할 것이다. 다랑쉬굴이 있는 일대를 성역화 하여 억울한 영혼을 추모하고, 생생한 제주 4·3의 역사를 전달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다랑쉬굴 집단학살사건에 대한 철저한 진상규명과 희생자에 대한 명예회복이 당연히 뒤따라야 한다. 14년전 우리 제주도민들은 다랑쉬굴 희생자들에게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지고 말았다. 머리 숙여 비명에 간 제주 4·3 영령들과 다랑쉬굴 희생자들의 명복을 빈다.



※ 제주도 4.3, 제주섬에선 모두가 '인간표적'이었다

불의의 공권력 그리고 그들의 불법적인 무차별 인명 살상을 위임받은 용역 깡패들이 있었고, 실제 일본인 300여명도 고용하여 함께 토벌대로 참여시켰다.

그리고 제주 주민 수만 명을 강간하고 24만 인구중 최소 3만을 학살하였고 주민의 60% 이상이 살던 집을 버리고 산속으로 도망다니게 만들었고 또 3만 명 이상을 일본으로 망명하게 만들었다.


▲ 4.3 희생자 지도. 4.3 중앙위로부터 4.3 희생자로 결정된 1만3564 명 중 본적지가 파악되지 않은 125명을 제외한 1만3439 명을 마을별로 표기해 작성했다.

4.3 당시 어느 마을 하나 피해를 당하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참혹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화해와 상생-제주4.3위원회 백서' 중에서


▲ 제주국제공항(정뜨르비행장) 내 학살터에서 유해 36구가 나왔다. 이날 사진 속의 유해 1구는 수습 뒤 운구됐다. ⓒ 제주의소리 김봉현 기자

"제주4·3사건은 광복 이후 정부수립 과정의 혼란기에 발생하여 제주도민들이 수많은 인적·물적 피해를 입은 불행한 사건이었다. 당시 미군정과 새로 출범한 정부는 체제가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았고 토벌작전을 담당한 군·경도 훈련과 경험이 부족하여 도민의 피해를 크게 하는 한 원인이 되었다.

이를 고려하여 정부는 사건 발생 50여 년만에 인권신장과 국민화합에 기여하기 위해 2000년 출범했던 제주 4.3사건 진상 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를 이명박 정권은 폐지 발표를 했었다. 이상희 국방부 장관은 제주4.3항쟁을 남로당의 사주를 받은 무장폭동이라고 했다. “비뚤어진 역사인식과 적대적인 색깔론 망령에 사로잡힌 인물”이라는 후폭풍을 맞고도 건재하다.

일본에 빌붙어 부와 명예를 얻은 그들에게 민족이란 애시당초 무슨 의미가 있었을까? 독재 시절에 빌붙어 사학과 언론계 등에서 친일의 명맥을 이어오던 그들이 요즘 뉴라이트 등을 통해 다시 규합해서 일제시대는 행복했다고, 위안부는 날조라고, 우리 민족은 일제시대에 감사해야 한다고 떠들며 일본 우익 세력과도 손을 잡으려고 한다. 그들이 어떤 인간들인지 국민들에게 진작 알 수 있게 할 수 있었다면....





야만의 역사 속에서도 나는 보지 못했다. 사냥감을 찾는 인간의 무리들도 이러지 않았다. 기르던 소나 돼지에게도 목숨을 갖고 희롱하지 않았다. 표적을 가슴에 붙이고 총부리를 겨누는 그들에게서 사람의 모습을 찾을 수 없다. 뇌가 없고, 심장이 없는 기계덩어리로 보일 뿐이다.

반공의 깃발을 들고 어떻게 이렇게 잔인할 수 있을까. 이 군인들은 국방경비대 소속이다. 이들에 대한 작전통제권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에도 미군이 쥐고 있었다. 그들은 이승만 정부를 앞세워 고립무원의 제주섬을 반공의 표적으로 삼았다.

이 사진에 달 수 있는 제목은 슬프게도 제한적이다.

인간 표적!

60년 전, 제주 섬사람들의 가슴에는 저마다 하나씩 조준점이 그려져 있었다. 길 잃고 날개 꺾인 파랑새들에게 덧씌워진 정지된 시간과 죽음의 행렬은 길었다. 그리고 우리는 아직도 알몸으로 피의 역사 한복판에 서 있고, 여전히 저 잔인한 저격수들로부터 정조준을 당하고 있다.

어렵게 찾아낸 4.3 자료 사진에서 나는 스러져 간 제주 풀잎들의 피울음 소리를 듣는다. 가위 눌린 세월에 가슴을 맞대면 아, 나는 지금도 숨을 쉴 수가 없다. Ø굴렁쇠


▶ 4.3의 비극을 증언하는 블러거, 굴렁쇠님의 블러그 → http://blog.hani.co.kr/rufdml/

 

 

 

 

 

☞ 다시 찾은 다랑쉬오름 => https://kheenn.tistory.com/15858503

 

다랑쉬굴, 4.3 비극의 현장을 찾다

다랑쉬오름을 내려와서 바로 다랑쉬굴을 찾아 나선다. 다랑쉬굴을 가려면 먼저 사라져 버린 다랑쉬 마을 입구를 지나야 한다. 다랑쉬마을 입구에 도착하니 '잃어버린 마을, 다랑쉬' 표석이 예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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