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여행

이재수의 난 촬영지, 제주도 아부오름(앞오름)

모산재 2010. 3. 1. 19:52

 

 

엊저녁 술을 자제하느라 일찍 잠자리에 든 덕택에 가뿐하다. 게다가 몇 분들이 수고를 아끼지 않고 밥을 짓고 시원한 매운탕까지 끓여서 대령해 놓으니 잘 차려 놓은 밥상 숟가락만 든다. 미안스럽고 황송한 마음으로 맛나게 먹는다.

 

 

2박3일의 짧은 여행 마지막날, 우리 여행의 컨덕터 김 선생님이 챙겨주는 대로 오름 트레킹에 나선다. 제주도에는 몇 번 와 보지 못한지라 이름도 낯선 아부오름과 용눈이오름을 행해 다시 성산 방향으로 길을 잡는다. 구름이 없지 않지만 어제와 달리 날씨가 많이 환해졌다.  

 

제주도에는 360여 개의 오름이 있다고 하는데, 오름의 기원에 대한 재미있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탐라섬을 창조한 설문대할망은 제주 앞 바다가 무릎에서 찰랑거릴 만큼 큰 신이었다고 한다. 설문대할망이 제주바다에 와서 치마로 흙을 날라 한라산을 만들 때, 입은 치마가 구멍난 헌 치마인지라 여기저기 흙이 떨어져 쌓였는데 그것이 360여 개의 오름이 되었다는 것이다.

 

 

 

 

 

아부오름은 제주시의 동쪽 구좌읍 송당리의 한적한 길가에 자리잡고 있다. 1112번 도로를 따라 송당에서 남쪽으로 2㎞ 떨어진 건영목장 안으로 들어서면 오름의 동쪽으로 오르는 길이 나타난다.

 

 

 

 

 

 

아부오름이라는 이름으로 알고 찾았더니 '앞오름'이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다. 원래는 '송당마을과 당오름 앞에 있는 오름'이라는 뜻의 '압오름'이었는데 소리가 바뀌어 아보롬·아부름·아보오름·아부오름 등으로 불렸다고 한다. 제주 방언으로 '아버지처럼 존경하는 사람'을 뜻하는 '아부'로 부리면서는 '아비오름'으로 이해하는 사람도 있는 모양이다. 한자 이름으로는 아부악(阿父岳·亞父岳), 전악(前岳)으로 표기하기도 했다고... 

 

 

▼ 앞오름 오르는 입구. 목장 철조망 밑으로 허리를 구부리고 지나야 한다.

 

 

 

 

 

▼ 오름 동쪽 분화구 언덕에 올라서 내려다본 풍경

 

 

 

 

 

아부오름은 원형 분화구의 대표적인 오름으로 형태가 완만하고 단순하다. 산 모양이 둥글고 한가운데가 타원형 굼부리를 이루었다. 해발 301.4m, 높이 51m, 둘레 2,012m, 면적 31만 4926㎡이다. 원형 분화구는 바깥둘레 1,400m, 바닥둘레 500m이다.

 

 

특이한 것은 굼부리(분화구)의 깊이가 84m 정도로 오름 자체 높이 51m보다 지면에서 33m나 더 깊이 들어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름의 바깥 사면보다 안쪽 분화구의 사면이 훨씬 가파르고 높다.

 

분화구 안은 마치 고대 그리스 로마시대의 원형극장을 보는 듯한데, 바닥은 울타리를 친 듯 삼나무숲이 띠를 두르고 있다.

 

 

 

 

 

 

별로 높지도 않은 아부오름, 역설적이게도 낮은 오름 덕분에 4.3때 마을 사람들의 생명을 지켜주었다고 한다. 설마 이곳에 사람들이 숨었을까 생각한 토벌대가 이 곳을 그냥 지나쳐 사람들은 모두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한다.

 

 

 

 

 

 

삼나무로 보이는 어린 나무 수꽃

 

 

 

 

 

 

오름의 사면은 대부분 풀밭이고 키작은 소나무들이 숲을 이룬 곳도 많다.

 

풀밭에는 솜양지꽃, 술패랭이꽃, 향유, 쥐손이풀 등이 자라고 제주도에서만 볼 수 있는 피뿌리풀도 자생하고 있다고 한다. 2월 중순을 지나고 있지만 여전히 싸늘한 바람에 눈발 비치는 날씨니 풀꽃들의 자취는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꽃 피는 계절에 찾는다면 얼마나 환상적일까...

 

 

 

 

▼ 남쪽 양지바른 비탈엔 양지꽃 몇 송이가 피었을 뿐이다

 

 

 

 

 

 

분화구 바닥에는 어떤 식물들이 살고 있을까 궁금하여 덤불을 헤치고 삼나무 숲을 지나 들어간다. 눈에 띄는 것은 군데군데 덤불을 이루고 있는 찔레나무들이다. 상수리나무, 보리수나무, 청미래덩굴 등도 보인다.

 

거대한 분화구가 빠져나갈 물길이 없음에도 물이 고인 곳은 없다. 가장 낮은 곳이 살짝 습한 기운이 느껴질 뿐. 연간 강수량이 엄청난 제주도에서 이 분화구를 통해서 스며드는 지하수의 양은 그 얼마일까 싶다. 오름이 제주 생태계에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높을지 실감된다.

 

 

 

 

 

 

 

 

아부오름의 남동쪽에는 백약이오름(개역이오름), 동쪽에는 문석이오름, 북동쪽에는 높은오름이 있다. 그리고 서쪽에는 세미오름과 칠오름, 북쪽에는 송당리와 당오름이 각각 있다고 하는데 바쁘게 찾은 초행길에서 어느 오름이 그 오름인지 확인하기가 쉽지 않다.

 

 

 

 

 

아부오름은 20세기가 시작되는 1901년에 일어난 제주 민란을 소재로 한 영화  <이재수의 난>(1999)을 촬영한 곳으로 알려지면서 유명세를 타고 있다. 우리가 이곳을 찾은 것도 그런 이유가 크게 작용하였다.

 

인류 범죄사의 첫머리를 장식하고도 남음이 있는 천주교 권력과 조정이 파견한 세리가 결탁하여 자행한 무자비한 횡포와 수탈... 그에 저항하여 일어선 제주 민중 봉기를 이끌었던 이재수, 그는 지금도 제주 사람들의 영혼 속에 '아기장수 우투리'로 살아 있는지도 모른다.

 

 

 

 

 
※ 제주 성교란에 피어난 '누이꽃'
   - 이규태 역사 에세이를 인용한 글입니다.

30여 년 전 제주도에 가서 이순옥이라는 할머니를 찾아 이 고을 저 마을을 헤맨 적이 있다. 일제 때 나온 소책자 <야월 한나산>의 저자 라는 것만을 알고 있을 따름이요 생사도 모르지만 제주도에 살아있 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에서 찾아 헤맸던 것이다. 이 책은 1901년 제주도에서 일어난 성교란의 견문을 모은 것으로, 할머니는 바로 성교란의 주모자 이재수의 누이동생이다. 이 동회 저 면사무소를 찾아 다니다가 바다가 내다보이는 서귀포 665번지에서 구멍가게를 하는 할머니를 찾아낼 수 있었다. 당시 나이 73세로 아명인 '오돌또기 할매'로 일컬어지고 있었다. '오돌또기'는 할미꽃의 제주 방언이다.

천주교도 700명을 죽음에 이르게 한 성교란이 진압되고 주모자 이재수가 서울에 붙들려가 처형되자 오돌또기는 하루아침에 거지가 되어 문전 걸식을해야 했다. 대역죄인의 피붙이인지라 밥을 주면 후환이 있을까 싶어 내쫓거나 달래 보내는 바람에 무척 굶기도 했다. 그는 오빠의 누명을 벗기는 일이 자기가 살 길이라고 작심하고 직접 보고들은 성교란 이야기를 꼬박꼬박 글로 적어 모았다. 그리고 15세 되던 해 도둑 기차-공배를 타고 현해탄을 건너갔다. 당시 소문 난 작가들을 찾아다니며 책자로 내고자 도움을 청했는데, 그 정성에 감동한 작가 12명이 추렴하여 낸 책자가 <야월 한나산>이다. 그리고 돌아온 오돌또기는 결혼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교에 귀의했다. "정녕 오빠는 하나님의 사자이십니다. 하나님을 팔아 하나님을 모독하는 이들을 꾸중하러 보내신 겁니다. 오빠는 하나님 편입니다"고 하던 말이 생각난다.

당시 제주도의 세금은 궁중 살림을 도맡은 내장원이 직접 관장하여 제주 목사도 간여할 수 없었기로 권세를 남용, 횡포와 수탈이 극에 다다랐다. 그 봉세관인 강봉헌은 어민이 잡아 제 밥상에 올리는 고기나 전복에까지 어세를 물리고 집안에 큰 나무가 있으면 수세라는 명목으로 돈을 뜯어갔다. 이 강봉헌의 세금 수탈에 사이비 천주교도들이 편승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조정에서 프랑스 신부들을 극진히 대하라는 지시도 있곤 해서 제주 아전들이 천주교에 들어 보신하는 풍조까지 있었으니 관-교가 유착했고 더욱이 제주에 유배당한 죄인들이 천주교에 들어가 신앙과는 아랑곳없는 분풀이를 일삼았으니 민원이 상승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이 성교란에 대해 특집을 했던 영문 잡지 '코리아 리뷰'에 당시 주민들이 천주교에 입신한 신앙 외적 동기를 조사, 이렇게 적고 있다. ▶약과 설탕을 얻을 수 있다 ▶관리와 동등한 권한을 행사 할 수 있다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된다 ▶죄를 짓더라도 성당에 들어가면 못 잡아간다 등등. 신앙과 아랑곳없는 이 사이비 교도들의 월권행위가 서민들과 갈등을 심화시켰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섬사람들이 전통적으로 의지해온 당산목이나 신당을 파괴하고 다니는가 하면 성당 분소마다 형틀을 마련, 동조하지 않으면 잡아다 고문을 가하기까지 했다 한다.

신평리에 사는 송희수라는 사람은 그 월권행위를 비난했다 하여 10여명이 와 잡아다가 상투머리를 풀어 성당의 분소장이 타고 다니는 말꼬리에 붙들어 매고 5리길이 되는 대정읍내까지 끌고 간 것으로 조사되기도 했다. 천주교를 반대한다 하여 사이비 교도 오달현 등 다수가 유생 현유순의 집을 습격, 세간을 부수고 현을 성당으로 끌고 가 상비해 둔 형구로 고문을 하다 치사케 한 사건이 벌어졌다. 제주 관가에서 나와 치사를 확인하고 검시까지 했으나 살인범을 구금하기는커녕 수사도 하지 않고 돌아갔다. 이때 검시관이 대정현감인 채구석이요 그 검시를 위해 하수인으로 수행한 것이 대정현의 관노이던 25세 청년 이재수였다.

잇따른 불법에서 자구하려는 움직임이 싹트고 좌수인 오대현이 주동해 상민회라는 조직을 만들어 성토대회를 열었으며 그 여세를 몰아 제주목사에게 등장가기로 하고 출발했다. 등장이란 백성 여럿이 연서명하여 요로에 호소하는 민원통달 방식이다. 그 일행 가운데는 이재수도 끼어 있었다. 이를 사전에 탐지한 교도 쪽에서는 양총 조총으로 무장 출동, 제주와 대정의 중간 지점인 명월진에서 마주쳤다. 이 충돌로 등장꾼 한 사람이 총상을 입었고 오기현 등 6명이 제주 주성에 납치되어 감금당했다.

이에 이재수는 대정으로 돌아와 사발통문을 돌려 주성에 감금된 등장의 장두 오기현과 동지들을 구출하고 제주 목사에게 봉세관과 교도의 월권을 다스려줄 것을 호소하자고 했다. 의외로 여럿이 호응, 동서 두 패로 갈라 제주섬을 한 바퀴 돌며 장정을 모아 제주성에서 합류키로 했다. 교도들은 성안으로 들어가 무기고의 무기를 꺼내 성문을 닫고 대치했으며 주민들도 산포수들을 앞세워 총격전을 벌여 사상자가 나기 시작했다.

성문 폐쇄로 식량이 떨어지고 생업이 중단되자 성안 부녀자들이 봉기, 그 여세를 몰아 하강상 부인 고오적 부인 등이 주도한 부인부대가 성문 빗장을 열었다. 이재수의 지휘로 입성하면서 포박한 교도 250 명을 관덕정 앞뜰에 모아놓고 살육하기 시작했다. 이때 천주경이나 십계명을 외우며 어느 누구도 원망하지 않고 죽어간 진실한 교도도 적지 않았다 한다. 이어 섬 구석구석에 숨어있던 교도들을 수색, 살육하여 희생자가 700여 명에 이른 것으로 조사되었다.

이 난 수습차 프랑스 군함을 타고 사건 열흘 뒤 현장에 도착한 미국인 외부 고문 샌즈는 회고록에 이렇게 적고 있다. "제주목사가 거처하는 관사 대문 앞에서는 시체 99구를 헤아릴 수 있었다. 남녀노소가 뒤엉킨 그 시체들은 하나같이 참혹하게 난도질당한 채 열흘째 버려져 있었다." 샌즈는 그 목사가 거처하는 집 정원 근처 방 하나에 기거했는데 새가 그 정원에 시신이나 해골 조각을 물어다 떨어뜨리곤 했다고 적고 있다.
민란 수습을 책임진 찰리사가 제주성에 들었을 때만 해도 동서 민군 1만 명이 성을 지키고 있었으며 민원을 사게 한 봉세관 강봉헌과 군기탈취를 선도한 유배죄인 이용호 등을 구속하여 민심을 가라앉히고 신임 제주 목사가 세 수탈과 교인들의 작폐를 다스리겠다고 공약함으로써 민군을 해산시켰고 이재수 오대현 등 주모자는 순순이 체포에 응해 서울로 압송당했다.

처형당한 주모자 이재수의 그늘에 '일적화'라는 꽃 한 송이가 피어 있었음을 오돌또기 할매로부터 들을 수 있었다. 성교란 이전에 대정 관헌에 관기로 있던 일적화는 이재수와 천한 신세를 토로하며 서로 의지하고 철부지들의 애정 표시인 새끼손가락질까지 한 사이다.

그 일적화를 우연히 만난 홀몸의 오돌또기는 퇴기가 되어 혼자 살고 있는 일적화와 같이 살기로 했다. 외딴 둔덕 아래 움막을 짓고 밭을 일궈 살아오면서 대정골에 오빠의 행적을 후세에 남기는 비석을 세우기로 하고 모금 동냥 행각에 나선 것이다. 방에서 자는 날보다 노숙하는 날이 많았고 성교란에 죽음을 당한 후손들을 만나 시궁창물 세례를 받기도 했다. 이 모진 일들을 속죄로 감수하고 2년 동안 빌고 다녔다. 들판에서 잠잘 때 베고 잤다는 베개라면서 꺼내 보이는 것은 누덕누덕 해진 성서였다.

그러던 어느날 일적화가 몸져눕더니 정방산 양지바른 곳에 표지를 해놓았다며 그곳에 묻어달라는 말을 남기고 숨졌다. 새끼손가락 사랑으로 평생 혼자 살다가 죽어서도 홀로 적적하게 피어있을 일적화는 한 가락 비가다. 오돌또기는 동냥을 계속하여 1961년 대정 네거리에 오빠 이재수의 비를 세워놓고 만다.

이재수가 처형당해 묻힌 서울 남대문 밖 청파동의 죄인 묘지는 일제 때 파헤쳐 일본인 고급주택이 들어서는 바람에 찾을 길 없어 이재수의 유일한 연고물로 지금 그곳에 서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