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 대만 여행

실크로드(4) : 둔황 막고굴에서 흘끔거리며 극락 세계를 엿보다

by 모산재 2006. 9. 11.


<제 4일> 2000년 8월 1일 화요일


둔황 막고굴에서 흘끔거리며 극락 세계를 엿보다


 

 

유원역(둔황역) → 둔황산장 → 막고굴 → 야시장

 

 

둔황 가는 길

 

두 밤을 새워 기차는 둔황을 향해 달리고 있다. 늦게 잠자리에 들었는데도 기상은 빠르다. 새벽 승객들의 소란한 기척에 다들 잘도 일어난다.

 

6시 20분, 일어나 화장실을 가려는데, 오른쪽 통로 뒤편, 검은 고비사막의 지평선에서 장엄한 일출이 시작되다.

 


6시 55분 둔황역에 도착하다. 원래는 유원역이었는데, 올해 7월1일자로 이름표가 바뀌었다고 한다. 출구로 나오자 깐수지아유관(감숙가욕관) 국제여행사 소속의 로컬가이드가 ‘接西安靑旅’라고 쓴 깃발을 들고 마중 나오다. 이름은 ‘高함’이란다. 둔황이 고향인데, 아직 20대 중반인데 결혼을 한 한족 여성이다. 유원이 물이 귀해 세수도 못한 채 나왔다며, 바로 둔황으로 출발해 아침식사를 하잔다.

 


승합차에 짐을 실은 다음 둔황을 향해 출발하다. 뒤로 고비사막으로부터 멀어지며 타림분지의 타클라마칸사막으로 향해 달린다. 고함씨가 우리말을 못해, 중국어로 말하면 상학씨가 통역을 하여 들려 준다.

 

바위가 많은 검은 산 지대를 10분쯤 달리자 끝없는 지평선 지대. 신기루와 회오리바람이 2대 명물이라며, 나중 보게 될 것이라 한다.

 

낙타풀이 참 많이 자란다 싶었는데, 수현 형의 급한 볼일로 차가 선 다음 살펴보니 낙타풀이 아니라 홍류(紅柳)였다. 꽃이 분홍으로 가지 끝을 물들여 붙은 이름인데, 이 홍류가 많이 자란다 하여 유원(柳園)이라는 지명이 생긴 것이라 한다.

 

▲ 고비사막에서 가장 큰 식물 홍류, 가지 끝에 붉은 꽃을 피운다.

 


도로 주변 땅들에 하얀 눈 같은 것이 덮여 있는데, 이것이 다 소금이란다. 한 시간쯤 달렸을 때 물이 고이고 흐르는 지대가 나타나자 다들 신기해하며 “우와 물이다!” 탄성을 지른다. 병철 형, “야, 우리 여기 물 구경하려고 온 거야?” 한바탕 웃다.

 

수량이 점차로 많아지면서 바로 수백호의 오아시스 마을이 나타나는데 그 이름이 ‘서호(西湖)’라고 상학씨는 대답한다.(그러나 지도를 확인해보니 그런 지명은 보이지 않고, 유원과 둔황 사이엔 張家圈, 黃渠주 두 지명만 나타난다) 백양, 미루나무, 홍류들이 하늘로 솟고, 목화밭이 대단위로 형성되어 있다. 양들도 많이 기른다. 나중 지도로 확인해보니, 둔황으로 흘러가는 이 물줄기의 이름은 소륵하(疏勒河)이다.

 

 


오아시스 도시 둔황에 도착하다

 

다시 사막을 달리는가 했더니 더욱 거대한 오아시스 녹지대가 나타난다. 백양나무 숲이 하늘을 찌르고, 목화밭, 옥수수밭이 공간을 형성하며 마을이 들어섰다.

 


둔황의 옛 이름은 사주(沙州), 기원전 111년 한문제의 군(郡) 설치로 중국에 편입된 지역이다. 소월지(小月氏), 대월지 등이 살던 땅인데 흉노가 이들을 몰아내고 자신의 영토로 병합하고, 그후 한나라와 기나긴 영토 싸움을 벌였다. 지금의 둔황은 청나라 때 만들어졌다고 한다.

 

이곳은 실크로드의 중심지다. 텐산 남로와 서역남로 등 오아시스 루트는 반드시 이곳을 통과해야 한다. 둔황의 남쪽 길로 서진하면 로프호와 누란국의 유허지가 나온다. 현재 인구는 15만 여명. 70년대는 주로 농업을 하는 도시였으며, 지금은 경공업 발전도 꽤 이루어졌다고 한다.

 


시가지가 나타나고 네거리를 지나며 상학 씨는 가운데 서 있는 조각상을 가리키며, 둔황석굴의 유명한 그림을 본떠 세운 것이라 한다. 이름하여 ‘반탄비파(返彈琵琶)’상.

 

남쪽 방향으로 들어서자 많이 본 그림이 시야를 채운다. 송편의 곡선처럼 아름다운 명사산(鳴砂山)! 바람에 모래가 구르며 우는 소리가 아름답게 들린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명사산 바로 앞에 가까운 ‘둔황산장’이라는 호텔이 숙소로 들어섰다. 외관이 꼭 중국의 고대 궁궐처럼 운치가 있다. 가이드는 “시안에서 보던 호텔과는 달리 전통식이라 황제와 같은 기분이 될 것”이라는데, 어쨌든 대단히 화려해 보인다.

 


아침 식사는 호텔내 ‘豊國祠’라 이름 붙인 식당에서 수박 주스와 빵, 계란 프라이, 소시지 등으로 간단히 먹는다. 호텔 외관과 다른 양식 메뉴에 말들이 있자, "황제는 양식을 했나 봐." 그래서 한바탕 웃다.(식사 내내 수현 형이 볼일 보러 간 일로 내내 그 이야기로 화제가 이어지다.)

 

식사 후 방을 정하고(나의 룸메이트는 강명진씨), 점심 시간까지 샤워를 한 후 2박 2일 간의 기차 여행으로 피곤해진 심신을 다스렸다. 

 


둔황 이야기


중국 역사의 시작인 하대 이전에도 둔황 지역엔 사람들이 살았었다. 이땐 둔황이라는 이름이 없었고, 三危라고 불리었는데, 이는 삼위산이라는 산이 있어 유래된 것이다. 사람들은 이 삼위산 위에 서왕모가 산다고 믿었는데…. 


주대에 이르러 주목왕이 서왕모를 찾아 뵈었는데, 그때 주목왕은 서왕모의 환대를 받고, 서로 마음이 통하여 시도 읊고, 노래도 부르며, 연정을 나누었다고 한다. 진짠지 아닌지 알 수 없는 전설이다. 역사상으로 기록된 둔황의 기록은 순임금 시대로 올라간다. 순임금은 본래 황하유역 부락의 우두머리였고, 그때 순임금을 괴롭히던 '三苗'라는 부락과 끊임없는 힘겨루기를 하고 있었다. 한판 싸움에서 순임금은 삼묘부락을 박살내어버리고 삼묘는 떠돌다가 결국 둔황지역에 이르러 정착을 하게 되었다. 후에 삼묘는 '羌戎'이라 불리우며, 당지의 月氏, 烏孫등과 함께 수렵과 유목생활을 하며 원시문화를 창조해 나갔다. 


이후에 월지족이 점점 강대해지자 강융은 월지에 합병되고, 오손은 저 신강의 이리지역까지 몰려간다. 월지족이 가장 강대했던 시기에는 모든 하서지역을 다 차지하고, 흉노까지 억눌렀으나, 후에 산서지역에서 강성한 흉노세력에 눌러 대부분 중앙아시아로 물러나, 대월지로 불리게 된다. 한편 이때 도망치지 못하고 남은 잔류세력들은 이 지역에 머무르며 소월지로 불리게 된다.

 

 

 



 

막고굴(천불동)

 

점심을 먹은 후 막고굴로 향한다.

 

시 외곽지대는 온통 목화와 옥수수밭이다. 시내를 벗어나자, 이글거리는 태양 아래 황금빛 모래사막이 한없이 펼쳐진다. 그리고 바로 보이는 것은 무덤들이다. 어제 보았던 무덤과는 달리, 형태는 정확히 삿갓모양을 이루었는데, 부자들을 반듯한 벽돌을 입혀 단정히 잘 꾸며 놓았다. 물론 비석까지 반듯이 세워서.

 


10여분 동쪽으로 차가 시내에서 멀어지자, 둔황이 있는 오아시스 지대가 마치 지평선 끝에 바다처럼 푸르게 보인다.

 

막고굴 바로 앞에는 강줄기를 따라 작은 오아시스지대가 되어 백양나무, 느릅나무가 한껏 자라고 있다. 막고굴 난간에서 바라보는 백양나무 줄기와 잎사귀가 너무도 희어 눈이 부신다. 맞은 편에는 삼위산(三危山)이 솟아 있다.

 

 

 


 

둔황 남쪽 25km 지점에 있는 막고굴은 명사산 줄기가 강을 만나 형성된 1.6km에 걸친 절벽에 조성되었다.

 


처음은 낙준(樂樽)이란 스님이 산의 빛을 감지하여 굴을 파기 시작했다고 한다. 4세기부터 1000여 년에 걸쳐 조성된 굴은 1000여 개에 달한다. 당나라 때 가장 많이 만들어졌으며(202개), 현재 발굴된 굴은 모두 492개이고, 출입 가능한 굴은 십 수 개라 한다.

 

16번 굴에서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이 발견되었고, 측천무후에 의해 만들어진 55번 굴의 불상은 세계 4번째, 중국에서 두 번째로 큰 불상이라 한다. 220호굴에는 호선무를 추는 여인과 우리 나라 왕자를 포함한 각국 왕자상이 있으며, 428호굴에는 백제관음상과 거의 같은 벽화가 있다는데, 우리는 구경할 수 없었다.

 

☞ 돈황 벽화의 내용


벽화의 내용은 시대에 따라 바뀌고 있다. 초기에는 민간신화가 많은데, 이는 후한시대에 전해진 불교가 중국 고래의 신불사상과 결합한 것으로 여겨진다. 또 석가의 선행을 주제로 한 이른바 본생담은 인도의 쿠샨, 카니슈카왕조 시대에 서역으로 전해진 불교예술의 영향이 강하다. 수대에 구마라섭이 산스크리트어 불전을 다수 한역한 다음의 벽화에는 유마독경변이나 법화경변 등 불교 고사가 등장한다. 당대는 벽화의 황금시대로 그 내용도 서방정토의 극락세계를 구하는 것으로 바뀐다.


벽화의 소재를 통해 그 시대의 불교사상을 엿볼 수 있으며, 묘사된 풍속으로부터 그 시대의 문화를 알 수 있다. 지배민족이 바뀌면 벽화나 불상의 모습은 완전히 바뀌어버리고, 기술이 예술로서 꽃을 피우다 결국 쇠퇴해가는 모습도 역력히 볼 수 있다. 1000여 년에 걸친 시간의 흐름을 느끼게 되는 곳이다.



들어서는 입구에는 천불동을 발굴하는 데 돈을 낸 4명의 일본인 사진이 걸려 있다.

 


매표소에서 플래시를 하나씩 받아 들고, 한국말을 그런 대로 잘 구사하는 한족 안내인의 설명을 들으며 15개에 이르는 굴들을 돌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사전 지식도 별 없는 데다 너무 바쁘게 도는 바람에 제대로 이해하기에 역부족이었다.

 


<427굴> 전실에는 송나라 때의 사천왕상이 모셔져 있다. 안쪽 주실은 수나라 때 조성되었고, 과거, 현재, 미래를 상징하는 연등불, 석가모니불, 미륵불 등 삼존불이 모셔져 있다. 그러나 러시아 군들이 불상에 입힌 금을 깎아내 가는 등 훼손하였다. 벽과 천장은 천불화로 꾸며졌다.

 

<418굴> 북조시대(1400여 년 전) 1200명 스님의 시주로 조성되었다. 벽면엔 시주자 초상과 주소지를 함께 그려 놓았다. 석가모니와 아난과 가섭존자 협시. 천장에는 나체 비천상

 

<259굴> 북위시대. 개방 동굴로 가장 오래됨. 석가모니불과 다보불이 모셔져 있는데, 옷 주름이 서역풍이고, 취로는 아라비아 건축양식을 보이고 있다. 오른쪽 입구 첫 번째에 유럽인들이 ‘돈황의 모나리자’라고 부르는, 미소가 아름다운, 비로자나불의 법신불인 선정불이 있다.

 

<237굴> 당나라 중기. 관세음, 문수, 보현보살. 천장은 달리는 토끼 세 마리가 원형으로 그려져 있는데 ‘3토천정화’라 부른다. 막고굴 안내자는 토끼가 상징하는 것은 알 수 없다고 말하며 원형은 영원함을 상징하는 것이라 대답한다. 그리고 왼편 벽면에 막고굴과 돈황의 상징이 되어 버린 유명한 ‘반탄비파(返彈琵琶)’상이 자리잡고 있다. 비파를 머리 뒤로 들고 연주하는 여인의 맵시가 스냅 사진처럼 자연스럽고 경쾌하게 느껴진다.

 

<96굴> 당나라 초기. 막고굴의 바깥 정중앙에 우람하게 솟아 있는 현재의 ‘대불전’, 혹은 ‘9층루’로 불리는 누각 안쪽 동굴에 모셔진 초대형 미륵불(북대상)이다. 하단에는 통풍 채광구가 뚫려 있다.

 

<130굴> 굴 앞마당에서 지하로 들어간다. 당나라 전성기 29년에 걸쳐 조성된 대형 미륵불이다. 흙을 붙여 만든 석대미술. 오른쪽 벽에는 15m의 비천상이 있고, 천정은 용그림. 바닥벽돌은 서하시대의 것.

 

<148굴> 당나라 전성기. 입구에는 인왕상. 주실에는 16m 길이의 와불상(열반상), 뒤에는 72명의 제자(보살, 나한, 천왕)들이 석가모니의 죽음을 맞아 혹은 울부짖고, 혹은 자해하며 슬퍼하며 서 있다. 천장은 천불화인데 채색 보존 상태가 아주 양호하다. 빛으로부터 보호가 잘 된 탓이라 한다.

 

<152굴> 송나라. 위구르인 화가에 의해 그려진 천장의 천불화. 천장 귀퉁이에 4천왕상이 있다.

 

<173굴> 당나라 전성기. 불상과 6인의 협시보살. 각각 다른 화가에 의해 동일한 장면을, 왼쪽 벽면엔 산점투시도, 오른쪽 벽면엔 교점투시도가 그려져 있어 묘한 대비를 이룬다. 막고굴에서 가장 작고 아름다운 비천상이 그려져 있다. 오른쪽 입구 윗면에 독특한 청록산수화가 차지하고 있다.

 

<103-5굴> 당나라 전성기 벽화와 청나라 때의 기형 보살상. 벽면 입구 쪽에 문수보살과유마힐 변상도가 그려져 있다. 천정은 사다리꼴 천불화가 적록 채색으로 그려져 있다.

 

<420굴> 미공개굴. 수나라. 과거, 현재, 미래의 3존불. 좌대벽에는 서하시대의 보살 그림. 위로는 문수보살과 유마힐 변상도가 있다.

 

<419굴> 수나라. 가섭과 아난존자상. 양쪽에는 턱을 괴고 있는 용의 조각상이 해학적이다. 벽면의 천불상의 얼굴에는 도금.

 

<16-7굴> 당나라 말. 석가모니불이 모셔져 있고 천장은 봉황과 용, 벽은 천불도. 벽화는 돋을새김되어 있다. 1900여 년 동안 밀봉되어 왔던 굴. 17굴은 혜초의 ‘왕오천축국전’등 5000여권의 책이 발견된 ‘장경굴’이다. ‘황정한’이라는 이름의 한글 낙서가 발견되어, 인터넷에 꼭 올려야 한다고 모두 비분강개하다.

 

 

☞ 혜초(慧超 700?-780?) 

 

혜초는 700년경 신라에서 태어나 20세가 못되어 중국의 長安으로 가서 수행하다가 이에 만족치 않고 불교의 본고장인 天竺國(인도)으로 여행을 떠났다. 그는 우선 광저우로 가서 배를 타고 말레이반도를 거쳐 인도에 도착하여 얼마 동안 머무른 뒤, 인도의 서북부에서 大夏(이미 아랍인이 통치함)의 북부를 통해 타쉬코르칸을 넘어 카슈카르를 통과하고 쿠쳐, 엔치, 高昌을 거쳐 西安으로 돌아와 신라로 귀국하였다.

 

그는 인도의 중부에서부터 焉耆에 이르는 여행을 기행문으로 《往五天竺國傳》을 기록하였는데, 이 책은 자신이 방문한 곳의 불교상황, 국가의 통치관계, 풍속습관 및 경제생활을 기록하여서 매우 가치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 책은 우연하게도 1908년 둔황에서 프랑스의 동양학자 펠리오에 의해 발견되었다.

 

 

▲ 막고굴을 배경으로


 

<328굴> 당 초기. 석가모니와 가섭, 아난존자 모심. 왼쪽 맨 앞쪽의 보살상이 미국인에게 약탈되었다는데, 자리의 흔적이 선명히 남아 있다. 약탈된 보살상은 안내인에 의하면 하버드대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는데, 나중 필자가 확인한 바로는 하버드대가 아니라 (보스턴)대이다. 입구쪽 벽면엔 서하시대 공양 보살의 채색과 선이 완벽한 모습으로 보존되어 있다. 역시 빛과 인간의 간섭을 덜 받은 탓이다.

 

<329굴> 당 초기의 벽화. 뇌신(雷神), 풍신(風神)이 협시하고 있는 독특한 동굴. 천장에는 천불화, 천정에는 변형 연화문, 중심에는 비천상. 우측 벽면 안쪽에 4절 크기의 벽면화가 미국인에 의해 도려져 나가, 흔적만 남았다. 접착테이프를 이용하여 훔쳐갔다 한다.


 

 


오후 2시부터 시작해 4시간에 걸쳐 돌아보았는데, 안내인이 계속 한국 사람을 친척처럼 생각한다며 호의를 보이고, 그래서인지 미공개 동굴도 꽤 많이 보여 주었다.

 


안내인의 설명에 따르면 천장 양식이 차이가 있었는데. 북위시대는 정방형이 대각선 방향으로 겹쳐 올라간 형태이고, 수, 당시대는 정방형이 평행 이동 작아지며 올라간 형태이다.

 

 

 


비개방인 굴은 돈을 따로 내고 구경을 해야 한다. 몇몇은 돈을 더 내고 보다.

 

안내인이 안내해 준 막고굴 앞 서점에서 책과 엽서 등의 기념품을 사다. 나중에 시내 노점 등에서 비교 확인한 바로는 바가지를 좀 썼다는 느낌이다.

 

 


 

저녁 시간

 

숙소로 돌아오는 길, 시내 ‘비천(飛天)호텔’ 식당에서 저녁 식사를 하다.

 

상학씨, 농담도 하고 쾌활해지다. 원래 일정이 오늘 명사산과 월아천을 가기로 되어 있었는데, 이곳 안내를 맡은 고함씨로부터 내일 일정인 양관과 워와츠 가는 길이 공사중이라 갈 수 없다고 통보 받고 의기소침해 있었는데, 일정을 바꿔 내일은 오아시스 마을을 돌아보기로 합의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식사 후 시장 구경을 하다. 각지로 흩어져 있던 기념품 판매인들이 시내로 다 몰려들어 진열하다. 딱히 살 만한 물건들은 없어 보이는데, 서쪽 끝 그림을 파는 가게에서 ‘반탄비파(返彈琵琶)’를 그린 그림을 80원을 주고 사다. 말이 안 통해 손짓을 하며. 나중 확인해 보니 김홍식 씨는 엇비슷한 그림을 200원에 샀단다. 어쨌든 바가지는 극심하다. 부르는 값의 1/3 정도가 제값이라 생각된다.

 


저녁에는 어김없이 술자리. 사과배라는 독특한 과일과 포도 등을 안주로 맥주를 마시며 이야기꽃을 피우다.

 


둔황 막고굴 두번째 답사기 => http://blog.daum.net/kheenn/15856532


 



더보기
석굴암 극찬 이유 알려면, 실크로드에 가라

 

오마이뉴스|입력2012.12.08 15:43|수정2012.12.08 17

 

general_image

막고굴의 전경이다. 이렇게 사암절벽에 500여 개의 인공굴이 파여져 있다.
위키피디아


7월 20일 아침 일찍 일행은 막고굴로 향했다. 안내는 그곳 돈황연구원의 전문 해설사 영가화씨가 맡았다. 북경외국어대학을 나온 재원으로 한국어가 유창하였다. 한국어를 전공한 것도 아니고 대학 시절 한국 친구를 만나 2년 정도 한국말을 배운 뒤 스스로 독학을 하였다고 하는데 놀랍기만 하다. 나는 그녀를 2시간 동안 졸졸 쫓아다니며 질문 공세를 펼쳐 나갔다.

우선 막고굴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약간의 예비지식이 필요하다. 돈황과 막고굴은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막고굴 없는 현재의 돈황은 존재할 수 없다. 돈황이 현재와 같은 명성을 누릴 수 있는 것은 전적으로 막고굴이 있기 때문이다.

막고굴은 벽화예술의 정점이자 실크로드 석굴예술의 집합소이다. 중국 내 석굴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클 뿐만 아니라 그 보존 상태도 상대적으로 좋다. 492개의 석굴이 현존하며 채색된 조소상이 2400점, 벽화의 면적은 4500평방미터(㎡)가 넘는다. 막고굴은 198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었다.

막고굴의 상태가 현재와 같이 그래도 잘 보존된 것은 돈황 사람들이 대부분 불교 신자이기 때문이기에 가능했다. 그들은 많은 전란 속에서도 이곳을 지켜냈고 특히 현대 중국의 아픔인 문화혁명기에도 이곳을 파괴하지 않았다. 다만 꼭 알아야 할 것은 돈황 예술의 약탈사다. 20세기 초 중국이 열강에 의해 반식민지 상태에 있을 때 서구열강의 문화재 약탈자들에 의해 돈황의 보물들 상당수가 국외로 반출된 것이다.

천하의 매국노 왕원록? 이런 사정 있었네



general_image

막고굴 17호굴에서 고문서를 정리하고 있는 펠리오

ⓒ 위키피디아


이 약탈사와 관련하여 특별히 주목되는 석굴이 17호굴인데, 이 굴은 1900년 당시 돈황석굴을 관리하고 있었던 왕원록이라는 도사에 의해 발견되고 거기에서 불교 경전과 각종 회화류가 쏟아져 나왔다. 이 소식을 들은 영국의 고고학자 마크 스타인은 왕원록을 찾아와 헐값에 수많은 경서류를 낙타에 싣고 가버린다. 이것들은 지금 런던의 대영(영국)박물관에서 볼 수 있다.


이어 당시 베트남에 있던 프랑스 동방학자 펠리오가 찾아와 또다시 왕원록을 꼬여 헐값에 남은 경서류를 낙타에 싣고 간다. 여기에는 우리가 잘 아는 혜초의 < 왕오천축국전 > 도 포함되어 있다. 이 보물들은 지금 프랑스의 루브르 박물관 등에서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일본의 오타니 백작도 행운의 막차를 탄다. 그는 이곳을 찾아와 남은 보물을 쓸어 갔다. 이것들은 지금 동경국립박물관 등에서 볼 수 있는데 일부는 한국의 중앙박물관에서도 볼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왕원록이라는 자는 천하의 매국노인 셈이다. 그런데 현지 해설사의 설명은 그게 아니었다. 왕원록은 그 당시 막고굴을 관리하기 위해 무척이나 애를 썼다는 것이다. 서방의 동방학자들에게 돈을 주고 보물을 판 것도 관리비를 대기 위한 고육지책이었고, 17호굴에서 나온 보물을 지키기 위해서도 힘을 쏟았다는 것이다.



general_image

왕원록 도사가 돈황 사람들 사이에서는 매우 긍정적 인물로 평가됨을 알 수 있는 그의 부도탑.

ⓒ 박찬운


그런 연유로 그의 사후 공덕비가 막고굴 입구에 세워지게 되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국내의 어떤 관광안내서는 왕원록이 문화재를 팔아버린 혐의로 처형되었다고 설명하고 있으니, 제대로 사실관계를 알고 썼는지 매우 의심스럽다.


general_image

최영도 지음, <앙코르 티베트 돈황>

ⓒ 창작과 비평사


막고굴의 예술적 성격과 그 내용을 적절히 설명하고 싶지만 그것은 내 능력을 넘는 것이다. 전문적 경지의 해설은, 이미 많은 서적들이 나와 있는 상태니 그것들을 참고할 일이다.
아마추어 여행가들 중에도 이곳 석굴을 면밀히 답사하여 자세한 기록을 남긴 분들이 있다. 최영도 변호사가 대표적이다.

그분은 < 앙코르 티베트 돈황 > (창작과 비평사 펴냄)이라는 책에서 막고굴의 여러 석굴을 주요 전문서적을 참고하며 자세히 묘사하고 고미술사적 관점에서 설명한 바 있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막고굴의 여러 석굴을 전문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주제넘는 일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여행 중에 알게 된 몇 가지 사항만 기록하려고 한다.

17호굴, 돈황 약탈사의 대명사이자 세계적 명소로 만든 주인공

우선 17호굴에 대한 이야기를 좀 더 해야겠다. 17호굴은 위에서 본대로 돈황 약탈사의 대명사가 된 석굴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돈황을 세계적 명소로 만든 주인공이기도 하다. 서구인들은 만일 20세기 초반에 스타인 등 동방학자들이 막고굴 17호굴에서 발견된 불교경전 등을 서구로 가지고 가 그것을 세계에 알리지 않았다면 혼미 속에 있던 중국이 과연 그들 보물을 지켜낼 수 있었겠느냐고 반문한다. 아주 틀리지는 않는 말이다.

지금 막고굴에 가보면 많은 석굴이 연기에 그을려 훼손된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1920년대 러시아 혁명 직후 백러시아인들이 이곳에 몰려 왔을 때 돈황의 책임자가 이들을 막고굴에 연금시켰기 때문에 생긴 것이라 한다. 러시아인들이 막고굴에 갇혀 있을 때 그곳에서 밥을 해먹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20세기 초 중국 정부의 문화재 관리는 지금 기준으로 보면 전무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람들이 석굴에 들어가 불을 때도 이를 막기는커녕 방치한 실정이었으니 말이다.

여하튼 17호굴은 왕원록 도사가 16호굴 입구에 쌓인 모래를 치우는 과정에서 우연히 발견한 굴이다. 16호굴을 들어가 오른쪽을 보면 마치 16호굴의 쪽방처럼 파인 조그만 굴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이 17호굴이다.



general_image

막고굴 17호굴 홍변스님상과 그 뒷면의 벽화, 핸드백이 나무에 걸려 있다.

ⓒ 중국둔황연구소


굴 중앙에는 당나라 고승 홍변의 소상이 있는데, 해설사는 홍변스님이 바로 16호굴의 공양주이기 때문에 그를 추모하기 위해 17호굴을 조성한 것이라는 설명을 하였다. 재미있는 것은 홍변스님 뒷벽에 있는 벽화이다. 거기에는 매우 세련된 현대식 핸드백이 나무에 걸려 있다. 천 수백 년 전의 가방 디자인이 현대 여성의 핸드백과 비교하여 조금도 뒤지지 않는다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바로 이곳 17호굴에서 수만 점의 고문서가 발견된 것이다. 불교경전을 물론이요 황제의 칙령, 마니교의 기도문집, 고대 기독교의 일파인 네스토리우스 경전 등등 온갖 것이 나왔다. 그래서 이곳을 장경동이라고 한다(우리나라 해인사의 고려대장경이 있는 장경각을 기억하라). 17호굴의 이런 특별한 역사를 기리기 위해 굴 앞에는 장경동진열관이 따로 설치되어 위에서 본 약탈의 역사와 그곳에서 발견된 주요 보물의 사진을 전시하고 있다.

막고굴의 주요 관람 포인트는? 벽화미술의 백미



general_image

혜초의 < 왕오천축국전 > 첫 부분.

ⓒ 한국학중앙연구원


다음으로 막고굴의 주요 관람 포인트에 대해서 말해보자. 이곳은 석굴 중 벽화미술의 백미라고 할 수 있으니 여기에 특별히 관심을 갖는 것이 필요하다. 물론 2400여 점의 채색 소조상도 놓칠 일은 아니지만 말이다. 벽화는 크게 세 가지 내용을 나타내고 있다. 제일 많은 것이 소위 경변벽화라는 것으로 불교 경전의 내용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인데, 현재 97폭의 경변벽화가 보존되어 있다.
다음은 불교역사벽화로 이것은 불교 역사인물, 민간전설 혹은 불교이야기를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다. 40여 곳에서 그런 그림을 볼 수 있다. 나아가 다양한 생활사를 볼 수 있는 벽화도 있는데 고대건축, 결혼, 제사, 사회풍속을 알 수 있는 그림들이 도처에 깔려 있다.

또 하나의 포인트는 우리 한반도와 관련된 작품을 살펴보는 것이다. 한반도와 관련 있는 석굴은 위에서 이야기한 혜초 스님의 < 왕오천축국전 > 이 발견된 17호굴이 대표적이지만 가장 흥미로운 석굴은 아무래도 61호굴이라 할 수 있다. 그 유명한 오대산도가 바로 이곳에 있기 때문이다.



general_image

막고굴 61굴 내의 오대산도.

ⓒ 위키피디아


오대산도는 북위 때부터 불교의 성지가 된 산서성의 오대산을 그린 폭 13.45미터, 높이 3.42미터의 큰 벽화이다. 이 벽화 속에 신라승탑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부분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혜초 스님의 입적 장소를 알 수 있는 자료로 이야기되고 있다. 우리 일행은 이러한 굴의 내력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해설사에게 특별히 이 굴을 보여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불발로 그쳤다. 해설사도 노력하여 그 굴을 보여주겠다고 하였으나 마침 그 굴에서 벽화 복원을 위한 모사작업이 이루어지고 있어 도저히 일반 공개를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한반도와 관계가 있는 또 다른 굴로는 237굴의 '유마힐경변'이라는 벽화인데 이곳에는 조우관을 쓴 신라왕자가 있다. 이번 관람에서는 61굴과 마찬가지로 이 굴 또한 볼 수 없어 아쉬웠다. 물론 더 아쉬운 것은 해설을 들어가며 찬찬히 본 석굴마저도 엄격한 통제 때문에 사진을 찍을 수 없었던 점이다.

실크로드에 서서 석굴암을 감격스럽게 극찬하다



general_image

막고굴의 상징인 35미터의 대불이 있는 96굴.

ⓒ 박찬운


이외에도 석굴의 여러 곳에서 볼 수 있는 비천상(248호굴, 320굴, 329굴)이나 수렵도(249굴)는 고구려 벽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과 매우 유사하다. 나아가 석굴을 개괄적으로 관찰하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석굴암이 바로 중국의 석굴문화에서 온 것임을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다는 점이다. 비록 우리의 지질학적 구조가 중국과 달라 대규모의 석굴을 조성할 수 없는 한계가 있었지만 신라인들이 그 단단한 화강암을 다듬어 석굴암을 조성한 것은 중국에서 유행하고 있는 석굴사원을 한반도에 옮겨 보려는 강한 의지가 있었기에 가능하였으리라.



general_image

우리 국보 24호 경주 석굴암의 본존불, 단단한 화강암을 저렇게 자유자재로 조각할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가 아닌가. 그 자태에서 우러나오는 포스는 불교미술을 잘 모르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느낄 수 있다.

ⓒ 임윤수


석굴암은 비록 규모에 있어서는 막고굴과 같이 실크로드상의 석굴과는 비교될 수 없지만 그 예술적 가치는 결코 뒤지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훨씬 능가한다. 석굴암의 예술성을 놓고 불교예술의 정점이라고 말하는 전문가들의 견해가 단지 국수주의적 민족주의의 표현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전문가가 아니라도 석굴암을 그저 한 번 보는 것만으로도 느낄 수 있는 일이다.

토함산은 사암이 아닌 토산이다. 이런 곳에 어떻게 석굴을 만들 수 있었을까. 신라인들은 토함산 한 면에 화강암을 이용하여 인공석실을 만든 다음 그 위에 돌과 흙을 쌓아 올려 마치 토산에 석굴이 있는 것처럼 만들었다. 그 공력은 돈황 막고굴에서 만나는 어떤 석굴과도 비교가 안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안에 실크로드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압도적인 조각 작품을 넣었다. 본존불을 보라! 그 뒤의 십일면관음상을 보라! 이것이 불국사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 된 것은 그냥 우연이 아니다. 이 말은 그냥 립서비스가 아니다. 이 말에 의심을 품는 사람이 있다면 언젠가 실크로드를 꼭 여행하시라. 그리고 곧바로 석굴암으로 직행하시라. 그러면 내가 왜 이리도 감격스럽게 석굴암을 극찬하는지 단번에 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