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대만 여행

실크로드(2) : 양귀비, 진시황을 만나고 둔황행 밤기차를 타다

모산재 2006. 9. 11. 21:11

 

<제 2일> 2000년 7월 30일 일요일

 


양귀비, 진시황을 만나고 둔황행 밤기차를 타다


 반파유적지 → 화청지 → 진시황릉 진시황병마용박물관 시안역

 

 

 


8시에 호텔을 나서 반파유적지로 향하다. 

 

시내를 빠져나가는데 고가도로 밑에 공터에서 화면으로만 보던 기공체조를 하고 있는 중국 인민들의 모습이 이채롭다. 거리에는 인력거들이 많이 다닌다. 주로 단거리 이동에 이용되는데, 요금은 택시비와 비슷하고 외국인은 5원 내국인은 5원의 이용료를 받는다고 이상학씨는 말한다. 그러면서 북경에는 택시 기사석과 승객석 사이에 칸막이가 되어 강도를 예방한다고 덧붙인다.

 

 

선사 문명, 반파유적지(半坡博物館)

 

입구에는 ‘시안 여행 10경의 하나(西安旅游十代景之一)'라고 적혀 있다. 1994년 김대중 현 대통령이 방문 모습을 담은 사진이 보인다. 

 

이곳은 선사시대, 기원전 4000~2599년 신석기시대 앙소문화의 촌락 유적지로서 중국문명의 발상과 기원을 엿볼 수 있는 곳이다. 1953년에 발견되었다. 주거 유적 외에 묘지와 질그릇 제조 가마터, 가축 외양간터, 장식품이나 생활 용구등도 출토되었으며, 그것들이 커다란 돔으로 가려 잘 보호되고 있다. 

 

박물관을 먼저 돌아본 후 유허지로 향한다. 박물관에는 주로 돌도끼, 골각기, 항아리, 농사 기구 등이 전시되어 단시의 생활 기술과 지혜, 문화를 이해할 수 있다. 사슴무늬 도편, 사람 얼굴과 물고기 문양 항아리(人面魚紋盆), 현대적 기하 감각이 느껴지는 물고기 문양 항아리(單魚紋盆), 손톱무늬 호리병 등이 인상적이다. 

 

거주지 내에 아이주검을 넣은 옹관 무덤이 자리 잡고 있고, 발굴된 인골들이 잘 보존된 형태로 전시되어 있다. 유허지의 넓이는 약1만m인데, 불과 5분의 1만 발굴된 상태이다. 유허지 옆, 놀이공원을 유허지 유물 모형을 소재로 상상력을 발휘하여 만들었는데, 조잡한 탓인지 사람들이 별로 찾지 않는다 한다. 

 

박물관 맞은 쪽으로 ‘세계 원시부족 풍정 실록(世界原始部族風情實錄)’이라는 전시관이 있는데, 태평양, 인도지나, 남미 등지의 원시부족들의 생활과 풍속을 대형 사진으로 담아 전시하고 있는데, 그런대로 볼 만하다. 

 

다시 입구쪽으로 나오면 ‘인체오비전(人體奧秘展)'이라 간판을 단 전시실이 있는데, 남녀 노소의 인체 실물을 통째로, 또는 두부, 장기, 근육, 생식기, 순환계 등 신체 각 기관별로 절단, 혹은 해부하여 전시하고 있는데, 너무도 적나라하고 끔찍해 전율을 느끼게 한다. 심지어 임신 1개월부터 9개월까지의 태아의 모습까지도 알코올 처리하여 보여주고 있다. 

 

칼질되어 부위별로 전시된, 한때의 아름다웠던 생명들이 심하게 모욕당하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유물론에 입각한 냉담한 시선 탓일까? 모든 생명들이 등가로 존엄하다는 ‘평등'이 지상 가치라면 인민의 지도자들도 사후 저 모습으로 있기를 선택할 수 있는 걸까?

 

 

화청지(華淸池), 오간청(五間廳)

 

바로 여산 아래에 있다. 시안에서 입동이라는 마을로 향하는 길로 달리다 나타난다. 도로 주변은 온통 석류밭이다. 산씨성을 상징하는 꽃이 석류란다. 상학씨, 멀리 산이나 다름없는 불모의 구릉지를 가리키며 저 곳에도 농사를 짓는다고 한다. 바람이 세어서 파종 후 종자를 고정시키기 위해 자갈로 눌러 놓고 싹을 틔운단다. 그러다 보니 자갈이 귀한 재산이라고 한다. 

 

화청지로 들어서는 도로 입구에는 진시황 출전 석조상이 거대하게 서 있고, 가로변은 자귀나무와 회화나무가 시원한 그늘을 이루고 있다. 입구에는 ‘화청지에 오신 것을 환엽합니다(和淸池歡迎你)’라는 간판이 높이 걸려 있다. 최성수 선생은 이곳이 온천지로 양귀비가 당현종에게 처음 몸을 바친 곳이란다. 

 

들어서면 앞쪽인 왼편으로 ‘양옥환봉소온천궁벽화’가 거대하게 그려져 있다. 양옥환은 양귀비의 본명. 당나라 당시에 있었는데 파괴되어 다시 복원한 것이라 한다.

 


 

연못에는 반라의 양귀비상이 세워져 있다. 최성수 선생은 양귀비는 생각보다 뚱뚱해서 말을 탈 때 시녀 두 명이 받쳐 주어야 했다고 하는데, 조각상은 제법 요염해 보인다. 연못가에 핀 솜처럼 새하얀  배롱나무꽃들이 더욱 그런 분위기를 자아내게 한다.


다들 "별로 뚱뚱해 보이지 않는데."라고 말한다.

 

오정훈 선생은, "저 정도면 좋~지!",

 

나는, "풍만하다는 이야기겠지 뭐." 라며 다시 한번 몸매를 감상하고 붙어서서 사진 한 장씩 찰칵!

 


 

화청지를 돌아서 가면 오간청(五間廳)이 나온다. 1936년 ‘시안사변’이 일어났던 역사적 장소이기도하다. 12월 12일 장개석이 뒤편 여산으로 도망간 것을 장학량이 잡아와 오간청에 감금하여 국공합작을 이루게 한 곳이다. ‘시안사변구지비’가 1982년에 건립되었다.


뒤편, 장개석 집무처였던 오간청 벽면엔 혁명가가 새겨져 있다.


     痛政治之腐敗兮(통정치지부패혜)

     執曹而敗吳(집조이패오)

     恐帝制之復活兮(공제제지부활혜)

     決將溥儀驅(결장부의구)

 

▲ 아래가 오간청, 위의 건물 뒤쪽에 장개석이 피신하려했던 여산이 있다.

 

 

오간청, 삼간청에는 당시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제법 아늑하고 소쇄한 기운마저 드는, 휴양소로서 손색이 없는 곳이다. 

 

다시 돌아나와 온천탕을 돌아보다. 온천탕은 모두 4곳. 양귀비가 해당화 꽃잎을 띄워 목욕했다는 아담한 해당탕, 그리고 규모가 큰 황제의 연화탕, 하늘의 별을 보며 이용했던 노천의 성진탕, 바닥을 울퉁불퉁하게 하여 대신과 궁녀들의 발바닥 지압을 도왔다는 상식탕(尙食湯)이 그것이다.

 양귀비의 전용 욕탕인 해당탕

 

 

돌아나오는데 갑자기 당악(?) 소리와 함께 등장하는 현종과 양귀비의 행렬! 관광객이 돈을 내고 양귀비와 현종의 역할을 하며 궁인들을 거느리고 행진하는 관광 상품이란다. 

 

현종과 양귀비가 어설퍼 맛을 떨어뜨리긴 했지만, 화창한 날씨에 갑자기 시간이 멈춰버리고 천 년 전의 시간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역사적 상상력을 맛보게 하기엔 충분했다.


 

 

진시황릉


여산을 오른쪽으로 끼고 달린다. 도로변에는 과연 해당화가 만발해 있다. 석류가 주렁주렁 달린 밭들이 옥수수밭과 함께 끝없이 펼쳐진다.


달리는 합승 속 가이드 상학씨는 앉지 않고 서 있다.


  “앉아요.” 하니

  “괜찮아요.” 라고 한다

  “지켜보는 내가 안 괜찮아요.” 하자

  “나중에 기차 탈 때도 계속 서야 해요.”라고 대답한다.


폭소가 터졌다. 긴장해 있던 가이드, 농을 할 정도로 여유를 조금 찾은 모양이다.


능 입구에는 과일, 옥수수, 음료수, 기념품을 파는 노점들이 어지럽다. 능 앞 들판도 모두 석류밭인데, 거대한 능도 모두 석류나무 숲으로 덮여 있다.

 

거대한 산으로 된 진시황의 무덤!

 

 

 

삽질로 이렇게 거대한 능을 만들어? “미친 놈이야.” “끔찍하구나.” 등의 표현들이 나온다. 불과 15년 동안 그는 이 외에도 만리장성이란 거대한 토목공사도 해냈다. 얼마나 많은 백성들이 죽어갔을까?

 

무덤 형태는 장방형 피라미드형 토총. 동서 480m, 남북 380m나 되는 무덤 둘레는 거의 2km, 높이는 80여m란다. 70만의 죄수를 동원해 조성하고, 진귀한 보물을 수장해 침입자를 막기 위해 수은으로 강을 두르고, 자손 없는 비빈을 모두 순장했단다. 그리고 무덤 조성에 참여하여 비밀을 알고 있는 사람들을 죽여 따로 묻어 버렸단다.(무덤의 서쪽에는 실지로 형도묘지刑徒墓地가 있다.)

 

무덤에서 병마용 출토지까지 1.5km, 그 사이엔 엄청난 지하세계가 펼쳐져 있을 거라고 한다. 무덤 앞에는 ‘통일 도량형, 통일 문자, 통일 화폐, 거동궤(車同軌)’라고 쓴 진시황의 4대 업적이 석조 벽면에 새겨져 있다. ‘중국 통일’은 빠져 있다. 이유는 현대적인 걸까?

 

☞ 진시황

기원 전 221년 중국대륙을 최초로 통일한 사람이다. 이름은 정(政). 그의 출생에 얽힌 비화, 조나라에 인질로 잡혀와 있던 진나라 왕자 자초(子楚)를 대상인 여불위(呂不韋)가 사재를 털어 도와주었다. 그리고 자신이 총애하던 여자까지 주었는데, 그녀의 뱃속에는 여불위의 아이가 자라고 있었다. 이 아이가 왕위에 올라, 나중에 진시황이 되었다.


그는 주나라 이래 봉건제를 폐지하고 중앙관리를 파견하는 군현제를 실시하며, 화폐․문자․도량형․수레바퀴 폭 등을 통일하여 강력한 중앙집권 국가를 꿈꾸었다. 제자백가 사상 중에 한비자․이사의 법가만 받아들이고 분서갱유를 단행한다. 그리고 전국시대 때 흉노족을 막기 위해 쌓았던 성을 보수․연결해 만리장성을 완성한다.


그러나, 시황제의 혁신정책은 백성들에게 너무 가혹하여 농민반란이 일어나고, 결국 기원 전 206년 초나라 귀족 항우에게 멸망당하고 만다.


 

 

 

 

진시황 병마 박물관 주차장으로 앞으로 이동하여 점심식사를 하다. 식당은 진주관주루(珍珠館酒樓).

 

 

진시황 병마용 박물관

 

진입로 왼편으로 ‘진왕문물복제청’이 보인다. 아마도 병마용 모형 등 관광상품을 만드는 곳인가 보다. 엄청난 규모로 형성된 관광상품 판매 상가를 통과하여 초현대적으로 단장한 박물관이 나타난다. 이곳은 진시황릉 동쪽 1.5km 지점에 자리잡고 있다. 

 

먼저 원형 영상관에서 진시황릉 조성에서부터 항우에 의한 파괴, 그리고 우물을 파던 사람에 의해 발견되기(1974)까지의 과정을 담은 20 여분짜리 영화를 보았다. 4면8방 동시 촬영한 대형 3차원 영상이 ‘과연 중국이구나!’ 하는 탄성을 자아내기에 충분할 정도로 스케일이 웅대하였다. 관람석이 거대한 차량 내부인 듯 전투 현장을 차창 밖으로 내다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링산맥이 내다보이는 관람석 밖 창가에서 아이스크림 하나씩 먹고, 병마용이 출토된 갱으로 향했다. 이미 영상으로 많이 본 탓인지 새로운 느낌은 없었는데, 노혜경 선생은 안 그런가 보다. 연신 셔터를 눌러댄다. 

 

관람 순서(동선의 차례)대로,

 

<1호갱> 동쪽을 향해 병마용들이 서 있다. 항우군들에 의해 파괴되었던 것을 보수해서 다시 세웠다 한다. 입구 쪽에 병마용을 발견하게 된 우물터가 보이고, 군데군데 지하구조물로 썼던 목재의 불탄 흔적들이 검게 남아 있다.

 

<3호갱> 지휘부 자리라고 한다. 1호갱과는 달리 병마용들이 회랑에서 서로 마주 보고 보초를 서고 있는 모습이다.

 

 

<2호갱> 기술상의 문제로 원형을 다치지 않기 위해 아직 미발굴 상태로 있다. 대신 동선을 따라 몇몇 대표적인 병마용들이 전시되어 있다. 장군, 무관, 문관, 기병들의 다양한 전술 모습과 상황이 연출되어 있다고 한다. 4칸으로 공간이 분할되어 있다.

 

<진시황제능 문물진열청> 발굴된 대표적 유물인 동거(銅車) 1,2호차가 전시되어 있다. 무덤 서쪽에서 발굴되었다 한다. 출구 바깥에는 작년 무덤 남동쪽에서 발굴했다는 청석(靑石)갑옷이 전시되어 있다. 청석편을 얇게 다듬고 이를 구리실(銅絲)로 이어 무게는 무려 18kg나 나간다고 소개되어 있다.

 

 

늦은 오후

 

의무방어전으로 ‘문보재(文寶齋)’라는 옥공예품 전시 상점을 둘러보고, 百盛(PARKSON)백화점에 들러 2박3일 기차여행에 필요한 쇼핑을 하다. 시안 최고의 백화점이라는데, 물가가 2-3배 정도는 싸다는 인상을 받았다.

 

백화점에서 가장 많이 한 쇼핑은 어쩌면 ‘아이쇼핑’일지도 모른다. 모두들 ‘시안 여성들 정말 죽인다’는 반응들. 오아무개 선생은 아예 필자를 끌고 가 한 아름다운 판매원 여성을 구경시키기도. 짧은 원피스형 미니스커트가 특히나 날씬한 이곳 여성들의 각선미를 더욱 돋보이게 한다.

 

비화!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2층으로 내려오다 마주친 한 여성의 옷차림은 필자를 아찔하게 만들다. 바닷빛 원피스를 입었는데, 속옷보다 맨살이 먼저 보이지 않는가! 곁을 지나쳐 나도 모르게 돌아다보는데, 앞에서는 보였던 아래 속옷이 안보이고 엉덩이 맨살만 보이는 것이었다. 거리를 걷는 남녀들의 팔짱낀 모습도 자유롭고 분방해 보인다.

 

 

저녁 식사, 그리고 시안역

 

‘화평취중찬청(和平聚中餐廳)’이라는 식당에서 저녁을 먹다.

 

마침 자리가 전통 현악기를 연주하고 있는 무대쪽이었는데, 한 곡이 끝나고 박수를 보내자 연주하던 아가씨, 아리랑을 연주한다. 애국심이 발동한 우리 일행이 다시 우뢰와 같은 박수를 보내자, 이제 곡은 도라지타령으로 이어졌다. 다시 박수, 또 박수…. 누군가 팁까지 몇 달러 건넸던가. 나중 수담으로 물어본 악기의 이름은 구쯩(古箏).

 

저녁을 먹고 둔황으로 가기 위해 시안역(西安站)으로 향하다. 상학씨, 역 주변은 질서가 문란하고 불량한 사람들이 많단다. 큰 도시에는 역 주변 파출소가 수십개 있는 곳도 있단다. 역 대합실에서 1시간 정도 기다리다.

 

21:40 발 343차 ‘西安-奎屯’행 직쾌(直快)를 타다. 목적지는 유원(柳園). 기차에서만 밤을 두 번 새어야 갈 수 있단다. 소요시간은 약 34시간. 요금은 473위안.

 

침대실(연와:軟臥) 11호차 15번 침대가 내 자리. 맞은편은 오정훈 선생, 위층은 김용식 선생, 그리고 맞은 편 위층은 중국인 남자.

 

 

비단길을 따라 둔황으로

 

기차가 출발하다. 이제서야 비단길로 떠나는구나 하는 실감이 든다. 기원 전 한무제 때 장건(張騫)에 의해 개척되었다는 비단길.

 

기원 전 4세기 이래 중국은 기나긴 전쟁(한나라와 초나라의)을 끝내고 중원의 경제는 거의 바닥이 났다. 그러나, 국경을 침범하는 흉노의 침입에 대항할 힘이 없었다. 한고조 유방은 흉노 토벌에 나섰다가 대패 당해 목숨까지 잃을 뻔하고, 할수없이 금은보화와 공주를 보내 회유책을 쓴다. 기원 전 159년 즉위한 한무제는 깐수성과 중앙아시아를 손에 넣은 흉노 토벌을 위해 대월지국과 동맹을 위해 장건을 파견한다.

 

 

☞ 장건(張騫)과 실크로드


드디어 흉노에 대항할 수 있는 물질적 조건을 갖추게 된 한무제는 기원전 141년 대규모 흉노토벌을 계획하게 된다. 그는 소문으로 들은 대월지(大月氏)와 연맹을 맺기 위해 갈 사절을 공모한다.


장건이 100여명의 지원자와 함께 기원전 138년 시안을 출발하여 깐수(甘肅)를 지나 허시(河西)에 도착했을 때 흉노에 의해 붙잡히게 되었다. 장건은 연금되어 흉노의 여자와 결혼하여 자녀를 낳게 되었다. 연금된 지 10년이 지났지만 장건은 자신의 임무를 완성하기 위해 흉노로부터 도망 나와 우즈벡의 따완(大宛)을 거쳐 아무르강(阿姆河) 북쪽의 大夏(아프가니스탄의 북쪽)에서 대월지(大月氏)를 만나게 된다. 그러나, 그때 대월지는 이미 서역에서 풍요로운 생활을 누리고 있었으며, 흉노와 다시 적대관계를 맺을 생각이 없었다.


그곳에서 1년을 지내고 돌아오는 길에 다시 흉노에 의해 붙잡혔다가 구류된 지 1년이 지난 기원전 126년, 시안을 떠난 지 13년만에 천신만고 끝에 도망쳐 시안으로 돌아왔다.


대월지는 이미 좋은 토지를 찾아 정착민족이 되어 원래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지만, 한(漢)은 그의 여행을 통해 서역의 지리, 물산, 풍속 등에 대해 이해하고 연결되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수많은 서역의 국가들이 서한과 교역을 원하였고, 그로부터 본격적인 실크로드 무역이 시작되게 된다.

서한의 비단, 마직류,거울, 칠기, 살구, 복숭아, 닭, 제지법 등이 서역으로 전달되고, 서역의 농산물(포도, 석류, 호도, 오이, 호박, 수박, 참깨, 마늘)과 유리, 불교 이슬람교 등 각종 종교는 중원으로 전래되었다. 물산뿐만 아니라 음악과 춤, 격구, 그네, 윷놀이 등이 우리 나라에까지 전해지는 등, 문화 방면의 폭넓은 교류도 이루어졌다.


실크로드는 상인들로부터 먼저 시작되어 사절단과 종교인들에 의해 발전되었다. 구도를 위해 인도에 간 불교승려로 법현(法顯), 현장(玄獎), 그리고 혜초(慧超) 등이다. 이들이 남긴 기행문은 실크로드의 역사를 연구하는데 주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자리를 잡고 기차가 출발하자마자 술판이 벌어지다. 몽고왕 등 중국 독주들을 거덜내고, 맥주를 시켜 계속 마셔대다. 자정을 훌쩍 넘긴 시간에는 병철 형과 바둑을 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