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 대만 여행

실크로드(3) : 허시후이랑을 밤새워 달리며 왕소군을 생각하다

by 모산재 2006. 9. 11.
 

<제 3일> 2000년 7월 31일 월요일

 


허시후이랑을 밤새워 달리며 비련의 왕소군을 생각하다


유원행 기차 안(시안-란저우-우웨이-진창-산단-장예-주취안-유원)


 

 

오전 기차안 - 란저우에 이르기까지


늦게까지 바둑을 두다 부산한 소리에 깨어 일어난 아침, 여전히 기차는 달리고 있다. 창밖을 보니, 풍경이라곤 풀포기가 거의 보이지 않는 민둥산과 들판뿐이다. 도로변과 민가에는 회화나무, 포플러가 서 있는 모습이 보인다.


식당 칸에서 먹은 아침 식사는 우리의 개떡 같은 만두, 삶은 계란, 계란 프라이, 배추 등. 맛이 정말 개떡이다. 남은 여행을 위해 억지로 먹어 두다.


처음 맛보는 사막 풍경이 이국적 정취를 실감하게 한다. 민둥산과 그 위에 엎혀 있는 메마른 밭들이 손에 잡힐 듯 지나쳐 가면, 어느 샌가 개울로 보이는 낮은 지대엔 황토빛 마을들이 띄엄띄엄 나타나고, 동시에 포플러 숲들이 보인다. 집들은 흙으로 지어 작은 기와로 지붕을 얹었다. 간혹 벽돌을 쓴 좋은 집들도 눈에 띈다. 녹색지대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어쩌다 메마른 골짜기로 당나귀 오줌줄기 같이 가늘게 흐르는 물줄기도 보인다. 당나귀로 밭을 가는 장면도 보인다.

 

푸른 하늘과 누런 땅이 끝없이 펼쳐지고, 누런 땅 위엔 간혹 녹색의 생명지대가 보일 뿐이다. 천상계와 지상계가 선명히 나뉘고, 다시 지상계는 생명의 땅과 죽음의 땅으로 선명히 나뉜다. 그런데, 천상계는 죽음의 땅에서부터 이어져 있다! 


다시 병철 형과 바둑을 두는데, 맞은 편 위층 중국인 남자가 내려와 바둑에 관심을 보인다. 그러다 병철 형, 이 사나이와 서투른 영어와 한자 필담으로 뭔가 애를 써 본다. 그 모습이 꽤 재미있다.


 

기차 안의 오후 - 허시후이랑을 달린다


도시락 점심을 먹다. 향채가 없다. 그러니 먹을 만할 밖에! 길쭉하고 가느다란 콩꼬투리채로 조리한 ‘뚜치’로 비벼 먹는 밥이 썩 입에 맞는다.


점심을 먹고 나자 허시후이랑(河西回廊)이 시작된다는 깐수성의 성도 란저우(蘭州)를 지난다. 기차 안에서 바라보이는 란저우는 가난해 보인다. 집 담장 밖 비탈언덕들은 온통 쓰레기로 더미를 이루고 있다.


이제 허시후이랑으로 접어든다. 허시후이랑은 북으로 고비사막, 남으로 치렌산맥 사이 구릉에 난 길이다. 이곳에 진입하면 동쪽으로 흐르던 황하의 지류는 사라지고 모든 하천은 서쪽으로 흐른다. 해발 3천m의 오초령(烏稍嶺)을 넘어서면 신장성이다. 회랑의 폭은 약 100km에 이르고, 회랑의 해발고도도 1000m가 넘는다고 한다.


란저우를 지나자 산은 붉은 빛으로 바뀌었다. 잠시, 벌거벗은 산에 나무를 심어 스프링쿨러가 군데군데 물줄기를 내뿜고 있는 장면이 보이는가 했는데, 다시 민둥산이다. 멀리 산 능선과 정상엔 사원이 보이고, 마을 주변에는 감나무로 보이는 과수원들이 차창 곁을 한동안 스쳐 지나간다. 철로변을 따라 이어진 강변 낮은 지대에는 제법 짙은 녹지가 펼쳐져 있다. 버드나무(미루나무) 숲은 녹지의 높이를 이루고, 옥수수, 대마밭이 녹지의 넓이를 만들어낸다. 밀밭도 연두빛으로 빈 자리를 적잖게 메꾸고 있다.


란저우를 떠난 지 2-3시간 지나면서 밀밭의 넓이는 점차로 커진다.


계속 맥주랑 술을 마시는 자리가 이어지다 어느 순간 깜빡 잠이 들었는가 했는데, 두 시간쯤 지난 모양이다. 바깥을 보니, 옅은 빛깔의 광활한 초원지대가 펼쳐지고 있다. 멀리 산과 구릉들이 이어지고 바둑판 무늬의 연두빛 밀밭들이 펼쳐진다. 수현 형이 그 사이 눈덮인 친링산을 넘었다고 전한다. 아마 오초령을 넘었겠지. 집들도 이제는 기와가 없고 약간 비스듬한 흙지붕이 주종을 이룬다. 비가 거의 오지 않는다는 증거다. 이젠 마을 외에는 거의 나무가 보이지 않는다.


구릉 초지엔 말들과 양들이 풀을 뜯고 있는 풍경들이 띄엄띄엄 나타난다. 자연을 닮은 흙빛 주민들의 모습도 자주 눈에 띈다. 철로변 밀밭 언덕배기에 꼬마 남매가 나란히 서서 손을 흔드는 모습이 언제 나도 저런 풍경이 되어 있지 않았던가 하는, 잃어버린 시간들에 대한 아스라한 상념에 빠져들게 한다.


4시 25분, 차창밖엔 빗방울이 듣고, 탈곡하고 가래질하느라 바쁜 농민들의 모습이 내 어린 시절 농촌 풍경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


밖으로 보이는 흙더미들이 뭔가 했더니 무덤이다. 흙으로 봉분을 만들고 봉분 꼭대기로부터 아래로 앞면에 돌을 일자로 배열하여 쌓았다. 독특한 양식이다.


갑자기 끝없이 넓은 평원이 펼쳐진다. 그리고 금방 5시 30분, 우웨이난역(武威南站) 도착하다.



치렌산맥과 고비 사막 사이


6시 20분, 저녁 식사를 하다. 제일 맛있는 식사를 하다. 점심때 도시락과 같은 내용물인데, 웬일인지 더 맛있다. 깨끗이 비우다.


왼편 평원 저 멀리 치렌산맥이 철로와 나란한 방향으로 끝없이 달리고 있다. 마치 동해안을 거슬러 오르며 바라보는 태백산맥처럼 보인다. 길다랗게 누운 산맥의 갈빗대의 꿈틀거리는 양감과 질감이 너무도 흡사하다. 달리고 달려 아마도 둔황에까지 이르는 것 같다.


간간이 보이는 넓은 평원의 수로엔 힘찬 물살이 흐르고 있다. 그러나 자연 하천은 모두 말랐다.


껌 한통을 앞 칸 소녀에게 주었더니, 꼬마가 ‘小魚軍團’이라는 상품명의 작은 생선포를 보내왔다. 몇번씩이나 와서 들여다보곤 도망치듯 가는데, 외지인에 대한 호기심과 부끄러움이 가득한 표정이 곱고 예쁘다.


이제 완전히 고비사막에 들어섰다. 기차 오른 편(북쪽)으로 고비사막은 멀리 몽골로 질주해가고 있다. 풀 한포기 없는 아득한 사막. 농토로 전혀 이용할 수 없는 땅이다. 검은 흙과 자갈들만 지평선을 이루며 하늘로 닿았다. 

 


 

7시 10분, 기차는 산을 거슬러 오르는 것인가?

 

왼편으로 피부를 벗겨낸 듯 울툴불퉁 골체미를 자랑하는 산들이 나타난다. 산들은 붉다. 아마 이것이 수백미터 퇴적된 사암이 비바람에 씻겨 만들어졌다는 홍사암인가 보다. 그렇다면 그 옛날 인도로 가던 수도승들이 황하 상류를 배를 거슬러 올라 병령사(炳靈寺) 석굴을 거쳐 서역으로 들어섰다는데, 황하 상류부터 병령사 입구까지 촛대처럼 솟아 있다는 벌거숭이산이 바로 저 산들인지 모른다. 모두들 신기한 산의 형상에 눈길을 주고 있다.


7시 30분, 진창역(金昌站)에 도착하다.

 

척박한 사막 한가운데 오아시스 지대에 형성된 공업도시다. 진창을 벗어난 철로는 사막을 가르며 지평선의 끝을 찾아 달린다. 철길가 언덕에는 투척 쓰레기들이 많다. 듬성듬성 낙타풀이 나 있는 철로변 야지에서 양을 모는 할아버지가 페트병을 줍고 있는 풍경이 어두워져가는 하늘 밑에 잠기고 있다.


어두워지면서 다들 공부에 열중이다. 중국인 사나이가 내린 2층 침대로 자리를 옮긴 병철 형이 열심히 둔황을 탐색하고 있다.



산단과 왕소군


9시 40분, 산단역(山丹站)에 도착하다. 어두워졌다. 잠시 정차하는 틈에 바람을 쐬다. 바로 이 근처에 연지산이 있을 게다. 여자들의 얼굴에 바르는 연지가 곧 연지산에서 나는 연지꽃으로 만들었다는데, 그 산지가 바로 이 산단이다. 왕소군(王昭君)의 슬픈 사연이 전해 내려오는 바로 그 오랑캐의 땅!


왕소군은 전한 원제 때의 궁인으로 흉노와의 화친을 위해 흉노의 單于에게 시집보내진 비운의 여인이다. 이것이 시선 이백의 마음을 아프게 건드린 모양이다. 잠시 그가 남긴 ‘왕소군’이란 시와 또 하나의 시를 감상하고 가자.

 

    昭君拂玉鞍(소군불옥안)   소군이 백옥 안장을 떨치고

    上馬啼紅顔(상마제홍안)   말 위에 앉아 복사꽃 얼굴을 적시며 울고 있네.

    今日漢宮人(금일한궁인)   오늘은 한나라 궁인인데

    明朝胡地妾(명조호지첩)   내일이면 오랑캐땅의 첩이 되겠구나.

 

    漢月還從東海出   한나라의 달은 돌아나와 동해에서 뜨는데

    明妃西嫁無來日   명비는 서역으로 시집가 내일을 기약할 수 없네.

    燕支長寒雪作花   연지산 긴 추위에 눈꽃이 피는데

    蛾眉憔悴沒胡沙   아름다운 눈썹은 초췌하게 오랑캐 모래 속에 묻혔네.

    生乏黃金枉圖畵   살아서는 황금이 없어 초상을 억울하게 그렸더니

    死留靑塚使人嗟   죽어서는 청총에 머물러 사람들을 탄식케 하는구나.

 

이 외에도 왕소군을 노래한 시가 다수 전하는데, 당나라 백거이의 '왕소군이수(王昭君二首)', 왕안석의 '명비곡(明妃曲)', 두보의 '영회고적(詠懷古蹟:明妃村)' 등이 있고, 조우(曹禺)가 쓴 극본 '왕소군(王昭君)'이 전한다고 한다.

 

※ 왕소군(王昭君) 

 

한나라 원제(元帝) 때 후궁에 양가(良家) 출신으로 이름을 장(嬙), 자를 소군(昭君)이라 함. 원제는 궁녀들의 화상(畵像)을 보고 마음에 드는 여인을 불러 총애를 하였다. 그런데 왕소군은 화공에게 뇌물을 주지 않아 화상이 잘못돼 원제의 눈에 띄지 않았다.

 

선우(單于)에게 시집을 가는 때에야 천자가 소군을 불러 보고 후궁 제일의 미인임을 알게 되었으나, 흉노와의 신의를 깨뜨릴 수 없었다. 원제는 노여움으로 화공 모연수 등을 모두 사형에 처했다고 한다. ‘명비’는 晉의 문왕의 이름이 ‘昭’라고 하여 이 글자를 못 쓰게 하고, 대신 이와 뜻이 통하는 ‘明’자로 대신하여 ‘明君’, ‘明妃’라 부름.

 

72세가 되던 해에 병을 얻어 돌무덤에 안장되었는데 그 무덤을 청총이라 불렀다. ‘청총’은 소군의 묘에 흉노의 땅에 자라는 흰 풀이 나지 않고, 중국을 못 잊어하는 소군의 마음 탓인지 중국의 푸른 풀이 났다고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왕소군의 무덤은 지금도 내몽고 후허호트시(呼和浩特市) 남쪽 9km 지점에 있다고 한다.

 

기차 출발과 함께 병철 형은 단소를 부는데…. 단소의 구슬프고 유장한 가락이 어둠에 젖어 서쪽으로 흐르는 계곡 주변 황야로 퍼져나가며 왕소군의 애닯은 사연과 어우러져 독특한 정서를 자아낸다.



술자리, 그리고 토론


10시 25분 장예역(張掖站) 도착하다. 가을 밤공기처럼 시원하다. 무료한 탓인지, 어둠이 유혹한 탓인지 다시 맥주파티가 시작되다. 승무원들의 걱정, 또 걱정하는 눈초리, 우리 음주문화로 볼 땐 별거 아닌 것 같은데…. 아, 정말! 우리들의 이야기는 끝이 없어라. 강은미 선생이 생산하는 분위기 탓도 적지 않으리.


그러다 한 순간 언어에 대한 심각한 토론이 벌어지다. ‘미안합니다’, ‘수고하십니다’로부터 시작…, 일본어, 중국어, 한국어의 표음, 표의문자적 특성…, 그리고 우리 문자언어의 탄생에 대한 언어적 견해에 이르기까지…, 많은 무리를 하며 토론을 벌였는데, 이 내용들은 각자 기억나는 대로 여기에 삽입 기록하시라!


날짜를 넘겨 02시 15분 지아유관역(가峪關站) 정차. 그리고 새벽 3시쯤 취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