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산하와 문화재

정조의 효심이 깃든 용주사

모산재 2006. 2. 20. 15:25

 

정조의 효심이 깃든 사도세자 현륭원의 재궁(齋宮), 용주사


2006. 02. 14

 

 

 

오전에 봄비가 내리고 하루 내내 안개 낀 흐린 날씨.

 

수원화성을 한바퀴 돌아보고 급히 택시를 타고 오후 다섯 시 무렵에야 용주사에 도착하다. 잔뜩 흐린 날씨에다 어둠까지 깃든다. 김홍도가 그렸다는 병풍과 사천왕상을 보려고 왔건만 박물관의 문이 이미 닫혀서 우리를 잠시 허탈하게 한다.

 

 

용주사 개관

 

용주사는 신라 문성왕 16년(854년)에 창건된 갈양사로써 청정하고 이름 높은 도량이었으나 병자호란 때 소실된 후 폐사되었다가 조선 제22대 임금인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화산으로 옮기면서 절을 다시 일으켜 원찰로 삼았다. 

 

28세의 젊은 나이에 부왕에 의해 뒤주에 갇혀 8일만에 숨을 거둔 사도세자의 영혼이 구천을 맴도는 것 같아 괴로워 하던 정조는 보경스님으로부터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 설법을 듣게 되고 이에 크게 감동, 부친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절을 세울 것을 결심한다.

 

경기도 양주 배봉산에 있던 부친의 묘를 이곳으로 옮겨와 현릉원(뒤에 융릉으로 승격)이라 하고, 보경스님을 팔도도화주로 삼아 이곳에 절을 지어 현릉원의 능사(陵寺)로서 비명에 숨진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수호하고 그의 명복을 빌게 하였다. 당시 이 사찰을 세우기 위하여 전국에서 시주 8만 7천 냥을 거두어 보경()으로 하여금 4년간의 공사 끝에 완공하게 하였는데, 낙성식 전날 밤 용이 여의주를 물고 승천하는 꿈을 꾸고 용주사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창사와 동시에 팔로도승원()을 두어 전국의 사찰을 통제하였으며, 보경에게는 도총섭의 칭호를 주어 이 절을 주재하게 하였다.

 

일찍이 31본산의 하나였으며, 현재는 안성, 남양 등 경기도 동남부 지역에 분포하고 있는 60여개의 크고 작은 말사, 암자를 거느리고 있다.

 

 

 

어둠이 깃드는 용주사 입구 전경


 

 

천왕문

 

예전에 없던 건물로 새로 조성되었다. 아직 4천왕을 모시지 않은 상태로 사천왕상 조성 불사를 하고 있는 모양이다.

 

 

효행박물관은 이미 닫혔고...

 

 

 

 

삼문(三門)

 

좌우에 줄행랑을 지닌 맞배지붕 양식이 양반집 대가를 연상시킨다. 가운데 문은 임금이 행차할 때 드나드는 문이고, 일반인은 양쪽 문을 이용해야 한다. 처음 사찰이 세워졌을 때는 절의 가장 바깥 문이었다.

 

 

 

삼문의 초석이 유난히 높은데, 네 기둥에는 '龍珠寺佛'의 네 자를 각각 첫 글자로 한 시구가 주련으로 걸려 있는데 일제시대 활동한 죽농(竹濃) 안순환(安淳煥)의 글씨라고 한다. 풀어 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용이 꽃구름속에 서리었다가

여의주를 얻어 조화를 부리더니

 절문에 이르러 선을 본받아

부처님 아래에서 중생을 제도한다.

 

이 내용은 정조가 낙성식 전날 밤 용이 여의주를 물고 승천하는 꿈을 꾼 후 절 이름을 용주사라고 하였다는 이야기와 상통한다. 삼문 앞에는 화마(火魔)를 물리친다는 석조 해태상 두 마리가 버티고 서 있는데, 간결하고 굵은 선으로 표현된 모습이 대단히 해학적이어서 보는 이의 웃음을 절로 자아낸다.

 

 

 

천보루(天保樓)

 

대웅보전으로 들어가는 문루로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집이다.

 

앞쪽에서는 양옆의 요사채 기단과 천보루의 누 하부가 자연스럽게 연결되고, 대웅보전에서 보면 천보루가 단층 건물로 보이도록 하여 양옆의 요사채와 함께 마당의 윤곽을 단정하게 정리하였다.



 

세존사리탑

 

 

 

 

천보루 아래에서 올려다 대웅전

 

 

 

대웅전

 

1790년 사도세자의 명복을 빌기 위해 고려시대에 소실된 갈양사 터에 세웠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계 팔작지붕 집으로 18세기 전형적인 특징을 보이고 있다. 처마 네 귀에는 활주를 세웠다.


 

 

내외부 장식이 매우 화려하면서도 왕실의 엄정한 법도를 느끼게 하는 기품이 배어 있다. 전면 어칸 좌우 기둥 위에는 용을 얹어 바깥으로 용머리를, 안쪽으로는 용꼬리를  나오게 배치했다.

 

기단과 초석은 장대석 기단에 방형과 원형이 이중초석으로 되어있어, 당시 일반 사찰이 잡석 기단에 자연석 주초를 쓰고 있는 점과 크게 대조된다. 기단 윗면을 전돌로 깔았고, 지붕의 취두와 용두, 학과 용을 새긴 막새기와 등에서 관 건축의 특성을 강하게 나타내고 있다. 수미단의 화려한 장식, 본존불 상부의 용두 조각, 닫집 주변의 비천상 조각 등은 세련미와 장엄함을 보여주고 있다.

 

 

 

대웅전 외부의 화려한 장식

 

 

 

 

 

 

삼존불 

 

 

 

 

후불탱화

 

대웅보전의 삼존불상 뒤에 있는 커다란 불화로 김홍도가 그렸다고 전해진다. 용주사 창건 당시에 그려진 석가모니불, 아미타불, 약사불의 삼존불화이다.

 


 

그런데 최근 대웅보전 닫집에서 발견된 원문에는 민관() 등 25인이 그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에 대해 미술사가 최완수 선생은, 탱화에 표현된 불보살 및 그 권속들의 얼굴 표현이 바로 단원풍의 얼굴 모습들이며 유연하고 날렵하게 젖혀지는 손목의 표현이나 그에 비해 무미하다고 할 만큼 아무 변화없이 미끈하게 처리하는 팔뚝 표현도 단원만이 가지는 인체 표현의 특징이며, 세장한 손가락과 고운 말 맵시 역시 단원 인물화에서 보이는 품위있는 표현법이고, 산들바람을 맞은 옷자락인 듯 유려하게 휘날리는 당풍세(當風勢)의 옷자락 표현이 또한 단원 인물화임을 증명해준다고 하여 김홍도의 작품이라고 말한다.

 

결국 후불탱의 규모가 거대하여 김홍도 혼자서 제작하기에는 무리가 따르거나 더욱이 그가 당시 최고의 화가이기는 했지만 불화를 그리는데는 경험이 부족했을 것이기 때문에, 정조의 명을 받은 김홍도가 밑그림(草本)과 기본적인 구도를 맡고 기타 채색이나 장식 등은 원문에서 밝힌 25인이 담당하였을 것이라고 추측해 볼 수 있겠다.

 

그림의 상단 양옆 가장자리에는 비사문천천왕과 광목천왕이 불법을 수호하고 있고, 중앙의 석가모니불 두광 양옆에는 화불이 보이며, 곳곳에 여러 제자상과 천녀상이 화면을 가득 메우고 있다. 불화에 여백이 적은 것은 불법의 세계가 법과 지혜로 충만된 완전의 공간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각 존상()들의 얼굴은 모두 중앙의 삼존불을 향하여 시선을 집중시키고 있어 원형 구도를 이룬다. 삼존불의 법의와 석가의 광배에 붉은색을 칠하고 대좌는 청연화로 표현해 청홍의 대비를 보인다. 붓의 선은 비교적 딱딱하나 모든 존상의 얼굴과 손에 서양화의 음영법을 사용하였다. 조선 후기 불화로서 독특한 음영법은 주로 이 시기에 경기 지역에서 활동한 화파의 작품에서 보이는 표현 수법이라고 한다.

  

 

화려하면서도 격조 있는, 대웅전 내부의 장식

 

 

 

 

 

활주와 풍경

 

 

 

 

용주사 범종(국보 120호)

 

신라 종 양식을 보이는 고려시대 초기에 만들어진 거대한 범종으로, 높이1.44m, 입지름 0.87m, 무게 1.5톤이다. 종 맨 위에는 소리의 울림을 도와 주는 용통이 있고, 고리 역할을 하는 용뉴는 용이 여의주를 물고 두 발로 힘차게 몸을 들어 올리는 형상을 하고 있다.

 

 

 

어깨는 구슬무늬로 테두리를 하고 있는데, 아래 위 서로 어긋나게 반원을 그리고 그 안에 꽃과 구슬무늬을 새긴 넓은 띠를 두르고 있다. 이 띠는 사각형 모양의 유곽과 한 면이 붙어 있다. 종 입구 부분의 넓은 띠는 구슬무늬로 테두리를 하고  있는 어깨띠와는 다르게 덩굴무늬를 두고 있어 이 종의 특징이 되고 있다. 4곳의 유곽 안에는 9개의 돌출된 연꽃 모양의 유두가 있는데, 남아 있는 것은 1곳 뿐이다.

종의 몸체 앞뒤에는 비천상을, 좌우에는 삼존상(三尊像)을 두었고, 4곳에는 종을 치는 부분인 당좌를 두었다. 비천상과 삼존상은 모두 구름을 타고 하늘을 나는 모습으로 옷자락이 가볍게 날리고 있다.


고려 전기의 종으로 추정하고 있다.

 

 

천불전(千佛典)

 

원래 향로전이었던 자리를 1993년에 천불전으로 고쳐 지었다고 한다. 석가모니불, 아미타불, 비로자나불을 삼존불로 모시고 있다.

 

 

 

 

향로전은 언젠가 소실된 후 12칸이던 건물 규모를 6칸으로 축소하여 봉향각으로 세웠다가 다시 천불전으로 바뀌었다. 향로전은 노전(爐殿)이라고도 하는 불전의 부속 건물로 불전의 일상 예불과 주요 불교 신앙 행사의 준비를 하는 곳이며, 이러한 일상 예불은 노전승이 담당한다고 한다.

 

 

천불전에 모신 석가모니불, 비로자나불, 아미타여래

 

 

 

 

효성전과 부모은중경탑

 

부모은중경을 새긴 탑이다. 부모은중경은 <불설대보부모은중경(佛說大報父母恩重經)>이라고도 하는데, 1796년 목판으로 제작한 것을 1802년 석판과 동판으로 제작하였다고 한다.

 

 

 

 

부모의 은혜가 얼마나 크고 깊은가를 어머니 품에 품고 지켜준 은혜, 해산 때 고통을 이기시는 은혜, 자식을 낳고 근심을 잊는 은혜, 쓴것을 삼키고 단것을 뱉아 먹이는 은혜, 진자리 마른자리 가려 누이는 은혜, 젖을 먹여 기르는 은혜, 손발이 닳도록 깨끗이 씻어주시는 은혜, 먼 길을 떠났을 때 걱정해 주시는 은혜, 자식을 위하여 나쁜 일까지 감당하는 은혜, 끝까지 불쌍히 여기고 사랑해 주시는 은혜의 10대은혜로 나누어 설명하였다.

 

생리학적 측면에서 보아 매우 과학적으로 서술하고 있으며, 특히 아버지보다는 어머니의 은혜를 더욱 강조하고 있다. 그 밖에 <효경>이 효를 강조한 데 비하여, 이 경전은 은혜를 강조하고 있다. 중국을 비롯하여 한국 ·일본 등 여러 나라에 널리 보급되었고, 나라마다 여러 가지 유통본을 남겼다. 한국에서는 조선 전기부터 삽화를 곁들인 판본이 많이 간행되었고, 중기 이후에는 언해본도 간행되었다. 현존 최고의 판본은 1381년(우왕 7)에 간행된 고려본이며, 삽화본 중에는 정조가 부모의 은혜를 기리는 뜻에서 김홍도로 하여금 삽화를 그리게 하여 개판한 용주사본이 있다.

  

 

지장전

 

저승 세계를 상징하는 건물로 명부전 혹은 시왕전이라 불린다.지장보살을 중심으로 좌우협시에 도명존자(道明尊者)와 무독귀왕(無毒鬼王)을 모시고 그 좌우에 명부시왕을 모시며 각 시왕 앞에는 동자상을 안치한다.

 

 

지장보살과 협시한 도명존자와 무독귀왕

 

 

 

지장보살은 석가여래 이후 미륵불이 출현할 때까지 일체중생을 교화하는  보살인데, 중생들이 모두 성불하기까지 그 스스로가 성불하지 않을 것을 맹세하여 대원본존(大願本尊)이라 이르기도 한다. 지장보살은 원래 천관을 쓰고 가사를 입으려, 왼손에는 연꽃을 쥐고 오른손에는 보주(寶珠)를 든 모습으로 묘사되기도 하지만, 우리나라의 경우는 삭발한 머리에 석장(錫杖)을 짚고 여의주를 들고 있는 모습이 많다.

도명존자와 무독귀왕의 좌우에는 명부시왕 10구와 판관 4구, 사자(使者) 2구, 그리고 인왕상 2구가 있는데 이들은 1894년 만의사(萬儀寺)의 지장전이 퇴락하여 이곳 용주사에 모셔온 것이라고 한다.

 

시왕은 저승의 모두 관을 쓰고 홀(忽)을 들고 있는 왕의 모습으로 표현되는데 시왕의 명칭은 각각 다음과 같다. 제1 진광대왕(秦廣大王), 제2 초강대왕(初江大王), 제3 송제대왕(宋帝大王), 제4왕 오관대왕(五官大王), 제5 염라대왕(閻羅大王), 제6 변성대왕(變成大王), 제7 태산대왕(泰山大王), 제8 평등대왕(平等大王), 제9 도시대왕(都市大王), 제10 오도전륜대왕(五都轉輪大王)

 

사람이 죽으면 7일마다 49일까지 일곱 번의 심판을 받고, 백일(白日)·소상(小祥)·대상(大祥)때가지 각각 한차례씩 모두 합쳐 10번을 10명의 대왕에게 생전의 죄업을 고백한다고 한다. 이러한 과정은 살아생전 비록 죄업을 지었다고 하더라도 열 번의 기회를 통해 가능한 한 구제 받도록 하는 자비사상을 바탕으로 깔고 있다. 모든 중생을 하나도 남김없이 구제한 후에야 깨우침을 이루겠다는 지장보살의 대원력은 결국 저승의 세계가 아닌 이승의 세계에서 선근공덕을 쌓아야 한다는 가르침을 주는 것이다.

  

시왕과 인왕

  

 

 

 

 

전강대종사사리탑

 

 

 

 

천연기념물 264호 회양목

 

정조가 장조(:사도세자)의 능을 이 근처에 두고, 능사()로 용주사를 중창할 때 손수 심은 기념수라고 전한다. 1979년 말에 천연기념물 제264호로 지정되었다는데, 300년에 가까운 나이에 너무 늙은 탓인지 붕대를 감고 줄기가 마르며 잎사귀도 푸른 빛을 잃고 거의 고사 상태로, 보기에도 안쓰럽다.


 

 

대웅전 옆 또 한 그루의 회양목

 


 




용주사 찾아가는 길 


 

※ 용주사 가람 안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