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산하와 문화재

인간의 애절한 사랑과 시왕의 너털웃음이 함께하는 선운사

모산재 2006. 2. 26. 17:09

 

관매도를 다녀오는 길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고창 고인돌 떼무덤을 둘러본 후 선운사로 향한다.

 

호남의 내금강이라고 불리는 선운산도 오르고 싶었지만 일정이 부족하여 선운사만 돌아보기로 한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에도 관광객들이 줄을 있고 있다. 관광 비수기라는 겨울에도 많은 관광객을 끌어들이는 매력을 가진 절이다.

 

'도솔산'이라고도 하는 선운산에 포근히 안긴 선운사는, 조선 후기 번창할 무렵에는 89개의 암자와 189개에 이르는 요사가 산중 곳곳에 흩어져 있어 장엄한 불국토를 이루기도 하였다고 한다. 김제의 금산사(金山寺)와 함께 전라북도의 2대 본사로서 오랜 역사와 빼어난 자연 경관, 소중한 불교 문화재들을 지니고 있어 사시사철 참배와 관광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맨 처음 찾았던 1989년 겨울만 해도 선운사는 얼마나 호젓한 절이던가. 그런데 지금은 호텔이 몇 개씩 들어서고 주차장과 상가가 크게 들어서서 시장바닥처럼 돼버려 아쉬움이 크다.

 

 

 

■ 개울 건너 절벽엔 천연기념물 송악이 푸르르고

 

주차장을 지나 선운사 쪽으로 조금 가다보면, 개울 건너편 바위 절벽에 천연기념물 367호로 지정된 송악이 푸르름을 한껏 뽐내며 거대한 풍채를 드러내고 있다.

 

송악은 남부의 바닷가나 섬들에 주로 사는 두릅나무과의 늘푸른 덩굴나무인데, 원예종인 아이비와 같은 속으로 아주 닮았다. 10-11월에 황록색꽃이 피며 소가 잘 먹어 소밥이라고도 하고 돌담을 타고 자라 담장나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나무 아래에 있으면 머리가 좋아진다는 속설도 있다고 한다.

 

인천 앞바다의 섬이나 울릉도까지도 자생하고 있지만 내륙에서는 선운사가 절로 자라는 북한계 지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륙에서 절로 자라는 송악 중 가장 큰 나무이다. 줄기 둘레 80cm, 높이 15m 정도로 나무 나이가 약 600년으로 추정되고 있다.

 

 

 

 

 

오후 시간인데 아직은 겨울이라 산바람이 제법 싸늘하다. 4월달을 넘길 무렵에야 피는 선운사 동백이지만 혼자 속으로 송창식의 '선운사'라는 노래를 가만히 부르면서 일주문을 향한다. 눈속에 붉은 꽃이 숯불처럼 달린 모습을 상상하며...

 

 

선운사에 가신 적이 있나요.
바람불어 설운 날에 말이예요.
동백꽃을 보신 적이 있나요.
눈물처럼 후두둑 지는 꽃 말이예요.
나를 두고 떠나가는 님아
선운사 동백꽃 숲으로 가요
떨어지는 꽃 송이가
내 맘처럼 하도 슬퍼서
당신은 그만 당신은 그만
못 떠나실 거예요.
선운사에 가신 적이 있나요.
눈물처럼 동백꽃 지는 그곳 말이예요.

 

 

연말 학급 여행으로 선운사를 찾을 때마다 이 노래의 테입을 가져갔고, 이동하는 버스에서 이 노래를 들려주면 아이들은 참으로 좋아했다. 몇번씩이나 들려주어도 또 듣고 싶어할 정도로...

 

노래를 두어번 흥얼거리다보면 어느새 일주문에 가까워진다. 주차장에서 선운사 천왕문 앞에까지 이르는 개울과 함께 걷는 길을 나는 '시와 노래의 길'이라 부르고 싶어진다.

 

 

 

 

■ 육자배기 가락이 들리는 선운사, 미당 서정주 시비

 

친일 시비로, 또 독재 권력에 협력하거나 찬양한 사실로 구설수에 오른 미당 서정주, 그럼에도 그의 시적 언어에 대해서는 평가하지 않을 수가 없을 만큼 시세계는 독특한 아름다움을 느끼게 한다.

 

선운사 입구에서 만나는 그의 시비는 엄정한 도량 선운사를 한결 인간적이고 세속적인 정취와 결합시키며 편안한 공간으로 만드는 힘이 있다. 선운사를 찾을 때마다 그의 시비를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이유가 그것이다.

 

 

 

 

선운사 골째기로
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왔더니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안 했고
막걸릿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
작년 것만 상기도 남었습니다.
그것도 목이 쉬여 남었습니다.

       단군 기원 사천삼백칠 년
       선운사 동구에서
       미당 서정주 지어 씀

 

 

 

 

■ 백제의 노래를 담은 '선운사가'비

 

미당 서정주 시비 바로 옆에 또 하나의 비가 서 있는데 그것이 '선운사가비'이다. 고창문화원이 1981년에 세운 노래비인데, 비에는 "주봉관의 뜨거운 애향심으로 천오백 년간의 한을 풀게 되"었다고 쓰고 있다.

 

정역에 나가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애절하게 기다리는 내용의 백제 노래인 '선운사가', <고려사악지>에는 이름만 전해져 올 뿐 가사는 전하지 않는다. 또 다른 백제의 노래인 '정읍사'가 바로 '선운사가'가 아닐까라는 학설이 있기도 하다.

 

 

 

 

정작 노래는 서정주 시인이 지은 것으로 노래비 옆면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고 있다.

 

나라 위한 싸움에 나간 지아비
돌아올 때 지나도 돌아오지 않으매
그 님 그린 지어미 이 산에 올라
그 가슴에 서린 시름 동백꽃 같이 피어
노래하여 구름에 맞닿고 있었나니
그대 누구신지 너무나 은근하여
성도 이름도 알려지지 안했지만
넋이여 먼 백제 그 때 그리시던 그대로
영원히 여기 숨어 그 노래 불러
이 겨레의 맑은 사랑에 늘 보태옵소서.

 

 

'겨레의 맑은 사랑'을 희구했던 시인 미당이 어찌하여 독재정권 미화에 앞장섰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광주 시민을 살륙한 '신군부'를 그는 '나라 위한 싸움에 나간 지아비'로 생각했을까...

 

 

 

 

■ 일주문

 

'도솔산 선운사'라는 일주문 편액은 김충현이 쓴 것이다.

 

 

 

 

 

 

■ 백파율사비가 사라진 부도밭

 

일주문을 들어서자마자 오른쪽 숲속에 아늑하게 자리잡은 부도밭이 나타난다.

 

 

 

 

 

이곳에 청담 스님의 부도가 있어 눈길을 끈다. 청담스님의 본 부도는 도선사에 있는데, 스님이 열반에 들며 사리 8과를 남기어 도선사 외에도 이곳 선운사와 옥천사, 문수암 등에도 사리탑(부도)을 조성하여 봉안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청담스님 부도 옆에 있던 벽파율사비가 흔적만 남기고 감쪽 같이 사라졌다. 어찌된 일인가 경내의 다실에 있는 스님께 물었더니 공사를 위해 잠시 옮겨 놓았단다.

 

 

 

 

백파율사비는 조선 철종 9년(1858)에 건립한 것으로 비명(碑銘)은 조선시대 대명필가인 추사 김정희의 필적이다. 조선조의 억불정책에도 불구하고 오랜 침체기를 헤치며 조선후기 불교의 참신한 종풍을 일으킨 화엄종주 백파율사의 업적이 적혀 있는 이 비석은, 율사의 업적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비석은 네모난 받침 위에 몸통을 세우고 지붕돌을 씌운 모습으로 되어 있다.

 

 

 

선운사 들어가는 길은 왠지 설렘이 있다. 나무 숲 아래로 잔잔하게 흐르는 개울물, 부도밭 숲, 선운사의 아담한 담장과 함께 걷는 길은 정감을 불러 일으킨다.

 

 

 

 

주차장에서 일주문까지 걷는 찬바람 휑한 길을 걸으면 서정주의 시를 생각하며 전라도 육자배기 가락에 젖은 막걸릿집 여자의 팍팍한 삶을 떠올리게 되고, 일주문에서부터 천왕문에 이르기까지 개울물과 부도 숲과 선운사 담장과 함께 걷는 길에서는 김용택 시인의 시가 절로 떠오르며 아렸던 청춘 시절에 대한 상념에 빠져 보기도 한다.

 

 

여자에게 버림받고
살얼음 낀 선운사 도랑물을
맨발로 건너며
발이 아리는 시린 물에
이 악물고
그까짓 사랑 때문에
그까짓 여자 때문에
다시는 울지 말자
다시는 울지 말자
눈물을 감추다가
동백꽃 붉게 터지는
선운사 뒤안에 가서
엉엉 울었다.

- 김용택, '선운사 동백꽃' 전문

 

 

여기 어디쯤에서 김용택은 살얼음 언 개울물을 건너며 사랑의 아픔을 달래보려 했을까?

 

 

 

 

 

■ 불법을 수호하는 천왕문과 사천왕상

 

천왕문으로서는 특이한 형태인 2층으로 되어 있다. 2층에는 범종과 법고를, 아래층에는 사천왕을 모셨다.

 

 

 

 

제석천의 명을 받고 인간의 선악을 관찰하며 불법을 지키는 지국천왕(동), 증장천왕(남), 광목천왕(서), 다문천왕(북) 등 네 신들이 사천왕이다.

 

매월 8일에는 천왕의 사자들이, 14일에는 천왕의 태자들이, 그리고 15일에는 천왕 자신이 도리천에 있는 제석천에게 보고하여 상벌을 내린다고 한다.

 

 

 

 

 

 

■ 편안한 절집 분위기로 이끄는 단층 만세루

 

 

천왕문에서 바라본 모습이다. 대웅보전 앞에 있는 만세루는 정면 9칸, 측면 2칸의 맞배 지붕 건물이다. 절의 창건 당시부터 있었던 건물로 지금까지 여러 차례의 중수가 있었으나 아직도 700년이나 된 기둥이 남아 있어 옛 자취를 느낄 수 있다.

 

 

 

 

 

정면 9칸이나 되는 길다란 건물이 퍽이나 안정감을 준다. 대부분의 절의 루가 2층 구조로 되어 있어 위압감을 주는 점을 생각해 본다면, 단층으로 된 만세루는 선운사의 분위기를 더욱 편안하고 아늑하게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 조선 중기의 장식적 양식을 보이는 보물 290호 대웅전과 6층석탑

 

만세루를 돌아가면 바로 뒤에 대웅전이 나온다. 왼쪽, 오른쪽 어디를 돌아도 좋다. 만세루를 마당 가운데에 두고 외통수 길이 아닌 트인 공간에 가람 배치가 되어 있다는 점이 또 하나 선운사가 편안하게 느껴지는 이유가 아닌가 한다.

 

 

 

 

 

대웅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다포 형식인데도 맞배 지붕을 얹은 조선 중기의 건물이다. 퇴색한 단청과 구부정한 기둥들이 예스런 정취를 자아낸다. 측면에는 공포가 없는 대신 기둥 두 개를 높이 세워 대들보를 받치도록 하였으며, 기둥과 기둥 사이의 간격이 넓고 건물의 앞 뒤 폭은 좁아 옆으로 길면서도 안정된 모습을 지니고 있다. 조선 중기의 건축물답게 섬세하고 다포의 짜임새가 장식적이다.

 

대웅전 앞에 있는 석탑은 5층이나 9층이 아니라 6층으로 되어 있어 고개를 갸웃하게 하는데 원래 9층탑이었던 것이 망실된 것이라 한다. 고려 시대에 지어졌는데, 조선 성종 때 행호선사가 우뚝 솟은 이 탑을 보고 절을 중창하게 되었다고 한다.

 

 

 

 

 

 

 

 

■ 대웅전 삼존불과 후불벽화

 

내부는 통칸으로서 불벽(佛壁)을 한 줄로 세워 그 앞에 불단을 만들었으며, 불단 위에는 흙으로 빚은 소조(塑造) 삼세불을 봉안하고 삼존 사이에는 근래에 조성된 보살 입상을 협시로 세웠다. 삼존은 중앙의 비로자나불을 주존으로 하여, 왼쪽에 아미타불과 오른쪽에 약사불을 모셨다.

 

 

 

 

삼존불상 뒤의 후불벽화는 1688년(숙종 14)에 조성한 것으로, 중앙의 비로자나불회도를 중심으로 좌우에 아미타회상도·약사회상도가 각각 자리 잡고 있다.

 

 

 

 

 

 

 

■ 영험한 지장보살을 주불로 모신 특이한 관음전

 

관음전은 대웅보전의 동쪽에 위치하는 정면, 측면 각 3칸의 맞배 지붕 건물이다. 명부전과는 별도로 관음전 내에도 지장보살을 모셨다.

 

 

 

 

내부에 보물 제279호로 지정된 금동지장보살좌상이 있는데, 선운사 도솔암에 있는 선운사 지장보살좌상(보물 제280호)과 같은 형태의 불상이다. 지장 보살이 주존불이므로 전각의 이름이 지장전, 또는 명부전이 되어야 하지만 특이하게 이 곳 관음전에 지장 보살을 봉안하고 있다.

 

두건을 쓴 모습, 네모지고 살찐 얼굴, 형식적이고 수평적인 옷주름 처리 등으로 보아 조선 초기에 만들어진 보살상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 지장 신앙의 양상을 보여주는 귀중한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 지장보살상은 일제강점기에 도난을 당한 적이 있는데, 이때 영험함을 보인 사실로 인해 더욱 널리 추앙받고 있다 한다.

 

 

1936년 어느 여름에 일본인 2명과 우리나라 사람 1명이 공모하여 보살상을 훔쳐간 뒤, 거금을 받고 매매하여 일본으로 건너가게 되었다.

그런데 이때부터 지장보살상이 영이(靈異)를 나타내기 시작하여, 소장자의 꿈에 수시로 나타나서 "나는 본래 전라도 고창 도솔산에 있었다. 어서 그곳으로 돌려 보내달라."고 하였다. 소장자는 다소 이상한 꿈으로만 생각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으나, 이후로 병이 들고 가세가 점점 기울게 되자 꺼림칙한 마음에 보살상을 다른 이에게 넘겨 버렸다. 그러나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지장보살이 소장자의 꿈에 나타났으나 그 역시 이를 무시하였고, 집안에 우환이 끊이지 않게 되자 다시 다른 이에게 넘기게 되었다.

그후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치면서 이 보살상을 소장한 사람들이 겪은 일들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으며, 마지막으로 소장하게 된 사람이 이러한 사실을 고창경찰서에 신고하여 모셔갈 것을 부탁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당시 선운사 스님들과 경찰들이 일본 히로시마로 가서 모셔오게 되었는데, 이때가 도난 당한 지 2년여 만인 1938년 11월이었다. 당시 잃어버린 보살상을 다시 모시고 온 사실을 기념하기 위해 찍은 사진에도 사건에 대한 개요가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 영산전과 목조삼존불상

 

영산전(靈山殿)은 대웅보전의 서쪽에 자리잡고 있는데 정면 5칸, 측면 3칸의 맞배 지붕 건물이다.

 

 

 

 

2단으로 된 높은 축대 위에 조성된 영산전의 원래 이름은 장육전(丈六殿)이었다. 장육전이라 이름은 내부에 봉안된 불상이 1장 6척이나 되는 큰 불상이었기 때문이며, 거대한 불상을 봉안하기 위해서 2층의 누각 건물로 조성했던 것이다. 1471년 처음 조성될 때는 2층 전각 형태로 조성되었으나 1614년에 중건하면서 단층으로 바뀌었고 1821년과 1839년에 다시 중수하였다.

 

영산전의 목조삼존불은 석가모니불 좌상을 주존으로 제화갈라보살과 미륵보살 입상이 양쪽에서 협시하고 있다.

 

 

 

 

 

석가모니불의 높이는 3m, 협시보살의 높이는 2.4m에 이르는 거대한 규모이며, 주존은 16각의 난간을 두른 목각연화대좌에 모셔져 있다. 양 협시보살은 화려하게 장식된 보관을 쓰고 손에는 연꽃을 들고 있다.

 

이 삼존상은 목조불로서는 희귀한 우수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 근엄한 명부전의 파격, 파안대소하는 시왕들

 

영산전의 서쪽 계단 아래에 직각 방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원래는 지장보살을 봉안한 지장전과 시왕(十王)을 봉안한 시왕전이 별도로 있었던 것을 17세기 이후에 두 전각을 결합하여 명부전을 세웠다고 한다.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의 맞배지붕 건물로 공포는 조선 후기의 장식적 경향이 잘 나타난다.

 

 

 

 

내가 선운사를 찾으면 가장 찾아 보고 싶은 곳은 바로 이 명부전이다.

 

금동으로 된 지장보살 왼쪽으로 두번째의 시왕, 고개를 오른쪽으로 기울이고 기분 좋은 웃음을 터뜨리고 있는 저 시왕의 모습은 명부전이 갖고 있는 어두운 이미지를 단숨에 지워버린다. 사자를 심판하는 근엄한 시왕들의 이 대단한 파격, 인간적인 매력에 명부전을 자꾸만 들여다 보며 나는 한없이 즐거워진다.

 

 

 

 

 

 

■ 애절한 그리움을 놓지 못해 찾는 선운사 뒤안 동백나무 숲

 

천년 고찰 선운사, 퇴락한 단청과 구부정한 기둥의 대웅전 뒤안에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동백나무 숲이 울을 이루고 있다. 겨울 한파에 시달려 동상을 입었는지 잎들은 붉은 빛이 감돈다.

 

여자에게 버림받고 맨발로 살얼음 낀 도랑을 건너며 아린 사랑을 참아내던 김용택 시인이 저 동백 꽃 터지는 저 숲에서 그만 엉엉 울고 말았던가? 그래서 마음이 후련해질 수 있었으면 좋으련만...

 

 

 

 

 

 

실연의 아픔을 겪는 사람들은 선운사를 찾는지, 최영미 시인도 이 동백 숲 앞에서 아래와 같이 아픈 심경을 풀어 놓았더랬지.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더군.
골고루 쳐다볼 틈 없이
아주 잠깐이더군.
그대가 처음 내 속에 피어날 때처럼
잊는 것 또한 그렇게 순간이면 좋겠네.
멀리서 웃는 그대여,
산 넘어가는 그대여,
꽃이 지는 건 쉬워도
잊는 건 한참이더군
영영 한참이더군.
선운사에서' 전문

 

 

유감스럽게도 동백꽃은 한송이도 피지 않았다. 지나가던 분들이 동백꽃들을 찾느라고 두리번거리지만 선운사 동백은 4월말이 되어야 제대로 피기 시작한다.

 

이 동백나무숲은 선운사가 세워진 후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동백나무는 차나무과에 속하는데, 꽃이 피는 시기에 따라 춘백(春栢)ㆍ추백(秋栢)ㆍ동백(冬栢)으로 부른다. 선운사 동백은 '춘백' 중에도 아주 늦둥이 '춘백'이다.

 

 

 

 

■ 담장에 안긴 그림 같은 요사채를 돌아나오며

 

 

 

 

 

 

되돌아 나오는 길, 도솔암과 마애불, 그리고 또 하나의 천연기념물 장사송을 돌아보지 못하고 나오는 마음이 퍽이나 아쉽다. 봄에 피는 동백꽃과 수선화, 가을에 숲속을 붉은 융단으로 물들이는 꽃무릇도 이 겨울엔 볼 수 없으니, 언제 제 철에 맞춰 찾아와 볼 수나 있을는지...

 

아무렴 다시 찾을 때는 이 모두를 다 돌아봐야지 하는 마음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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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미있고 다양한 선운사 창건 설화

 

선운사의 창건에 대해서는 신라 진흥왕이 창건했다는 설과 백제 위덕왕 24년(577)에 고승 검단(檢旦, 黔丹)선사가 창건했다는 두 가지 설이 전하고 있다.

첫 번째 설은 신라의 진흥왕(540∼576)이 만년에 왕위를 내주고 도솔산의 어느 굴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는데, 이때 미륵 삼존불이 바위를 가르고 나오는 꿈을 꾸고 크게 감응하여 중애사(重愛寺)를 창건함으로써 이 절의 시초를 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 이곳은 신라와 세력다툼이 치열했던 백제의 영토였기 때문에 신라의 왕이 이곳에 사찰을 창건하였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따라서 시대적ㆍ지리적 상황으로 볼 때 검단선사의 창건설이 정설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검단스님의 창건과 관련해서도 여러 가지 설화가 전해오고 있다. 본래 선운사의 자리는 용이 살던 큰 못이었는데 검단스님이 이 용을 몰아내고 돌을 던져 연못을 메워나가던 무렵, 마을에 눈병이 심하게 돌았다. 그런데 못에 숯을 한 가마씩 갖다 부으면 눈병이 씻은 듯이 낫곤 하여, 이를 신이하게 여긴 마을사람들이 너도나도 숯과 돌을 가져옴으로써 큰 못은 금방 메워지게 되었다. 이 자리에 절을 세우니 바로 선운사의 창건이다. 검단스님은 "오묘한 지혜의 경계인 구름[雲]에 머무르면서 갈고 닦아 선정[禪定]의 경지를 얻는다" 하여 절 이름을 '선운사로 지었다고 전한다.

또한 이 지역에는 도적이 많았는데, 검단스님이 불법으로 이들을 선량하게 교화시켜 소금을 구워서 살아갈 수 있는 방도를 가르쳐주었다. 마을사람들은 스님의 은덕에 보답하기 위해 해마다 봄과 가을이면 절에 소금을 갖다 바치면서 이를 '보은염'이라 불렀으며, 자신들이 사는 마을 이름도 '검단리'라 하였다. 선운사가 위치한 곳이 해안과 그리 멀지 않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곳에서 염전을 일구었던 사실 등으로 미루어보아, 염전을 일구어 재력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검단스님이 사찰을 창건한 것임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