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산하와 문화재

안성 여행 (3) 호젓하고 아담한 산사, 석남사

모산재 2006. 2. 11. 20:58

 

안성 여행 (3) 호젓하고 아담한 산사, 석남사

2006. 02. 02

 

 

 

 

 

서운산 남쪽에 청룡사가 있다면, 그 너머 동북쪽 깊숙한 골짜기에는 석남사가 자리잡고 있다.

 

 

안성에서 진천으로 가는 313번 국도를 타고 베티고개를 넘는다. 오른쪽 서운산 골짜기를 들어서는 계곡길이 호젓하고 아늑하다. 절의 규모는 작고 아담하다

 

 

석남사는 통일신라 문무왕 20년(680년) 고승 석선이 창건하고, 고려 광종의 아들 혜거국사가 크게 중창하여 수백 명의 승려들이 머물렀다. 이름 높은 고승들이 많이 거쳐 갔는데, 이들의 수행 지도를 받는 수백의 참선승들이 머물렀던 수행 도량이었다고 한다.

 

 

 

금광루(金光樓)

 

 

 

 

 

금광루를 지나면 돌계단 위에 대웅전이 올려다 보인다.

 

 

그런데 보물 823호인 영산전이 보수공사 하는지 헐린 모양이다. 오른쪽 푸른 천막지붕이 영산전이 있던 자리이다.

 

 

 

 

 

안쪽에서 본 금광루

 

 

 

 

 

금광루 지나서 올려다 본 가람

 

 

 

 

 

대웅전(경기도 유형문화재 108호)

 

 

원래 위치는 영산전 아래에 있었다는데, 현재는 가장 높은 위치로 옮겨 놓았다. 영조 1년(1725년)에 중건된 건물이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겹처마 다포 맞배지붕으로 단촐하면서고 당당한 모습이다. 고려 말기의 성격이 강하다. 바로 아래에 있는 나를 듯한 팔작지붕의 영산전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삼존불

 

 

목조불상에 금분을 입혔다.고려시대 불상으로 추정되고 있다. 삼존상 위의 닫집은 중층의 보궁형으로 매우 드문 꾸밈새라고 한다.

 

 

 

 

 

 

 

 

헐려져 있는 영산전(靈山殿)(보물 823호)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계 공포를 가진 팔작지붕집인데, 수리 복원할 모양인지 모두 해체되어 있다. 공포의 짜임새가 조선 초기와 중기 사이의 특징을 가지고 있어 건축사적으로 중요한 사료라고 한다는데, 볼 수 없어 아쉬웠다. 처마도리를 받치기 위해 수평으로 뻗은 첨차의 바깥끝(쇠서) 모습이 짧고 다소 처진 곡선을 이룬 점에 주목할 양식이다.

 

 

 

 

 

 

영산전은 석가모니를 중심으로 좌우에 갈라보살과 미륵보살을 협시로 봉안한다. 후불탱화로는 영산회상도(靈山會上圖)를 봉안하여 석가모니가 영축산에서의 묘법연화경을 설법하는 모습을 묘사하고 그 주위에는 팔상도(八相圖)를 봉안한다.

 

 

새로 단장한 영산전

 

 

 

위 두 사진 출처 : 문화재청

 

 

 

5층석탑(향토 유적 11호)

 

 

영산전 앞 계단 양쪽에 자리잡고 있다. 탑돌이 대체로 길어서 안정감이 없어 보이는데, 고려 때의 탑으로 추정된다.

 

 

 

 

 

 

영산전 아래 수조 주변 풍경

 

 

 

 

 

 

 

석남사 마애여래입상(경기도 유형문화재 109호)

 

 

절 앞 계곡 등산로를 따라 500여m 쯤 올라가면 암벽에 양각한 마애불상이 나타난다. 불상의 높이는 5.3m. 통일신라 마애불의 양식을 계승한 고려 전기의 작품으로 보인다.

 

 

 

 

 

 

 

 

넓적한 얼굴에 눈, 코, 잎이 두텁게 표현되었고, 귀는 어깨에 닿을 듯이 늘어졌다. 머리에는 3겹의 원형 두광이, 목에는 번뇌, 업, 고통을 상징하는 삼도가 뚜렷이 표현되었다. 옷은 양쪽 어깨를 다 가린 통견으로 배 부분까지 U자로 내려 오며 가슴에는 내의인 군의의 매듭이 보인다. 신체 주변에도 3겹의 신광이 새겨져 있고, 연꽃무늬의 대좌 위에 발가락의 표현도 뚜렷하다. 전체적으로 머리와 몸이 큰 데 비하여 하체가 짧게 표현되었다.

 

두 손은 가슴 앞에 들어 오른손은 검지만을 펴고 왼손은 엄지와 중지를 중지를 맞대고 있어 설법인을 표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