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산하와 문화재

안성 여행 (2) 남사당 여성 꼭두쇠 바우덕이의 묘

모산재 2006. 2. 8. 23:50

 

 

2006. 02. 02

 

 

 

 

 

청룡사를 돌아보고 나오는 길, 남사당 여성 꼭두쇠 바우덕이의 묘소를 찾는다. 안성시 서운면 청룡리 산 1번지.

 

 

청룡호수 댐 아래로 내려와 작은 고개를 넘으면 오른쪽 개울 쪽으로 바우덕이 묘를 안내하는 표지판이 서 있다. 묘지 앞까지 승용차가 들어갈 수 있다.

 

 

계곡을 따라 부는 겨울 산바람이 살을 에는 듯 차갑다. 묘지 앞에는 이렇게 맑은 개울이 흐른다.

 

 

 

 

 

묘지는 가파른 산 비탈 위에 자리잡고 있었다. 영혼이 쉬는 곳조차도 줄타기의 줄 위에 선 듯 아슬아슬하기만 하다. 한 시대를 풍미했지만 23살의 아리따운 나이에 폐병으로 요절한 미천한 광대에게 편히 잠들 자리를 마련하기는 쉽지 않았던 것인지... 저리 높은 석축을 쌓아서 그나마 죽은자가 편히 쉴 수 있는 공간이 생긴 셈이다.

 

 

묘지가 좁아 비석을 세울 만한 공간이 없는 탓인지 비석은 묘지 석축 아래에 세워 놓았다. 120년이나 버려져 왔던 묘지를 1990년에야 찾아내어 비석을 세웠다 하니 기나긴 세월의 무정함에 탄식이 나오는데 한편으로는 다행스럽기도 하다.

 

 

 

 

 

바우덕이 묘 안내문

 

 

 

 

 

봉분은 작지만 고운 잔디를 입혀 놓았다. 좁은 터이지만 남향의 포근한 잔디밭에는 따스한 햇살이 들고, 바로 앞 개울을 흐르는 맑은 물소리도 들리니, 바우덕이의 영혼도 편히 쉴 수 있으리라.

 

 

 

 

 

 

 

남사당패는 풍물놀음만이 아니라 꼭두각시놀음, 덧배기놀음, 비나 등 갖가지 기예가 뛰어났다. 바우덕이의 개다리패가 유명해지자 안성에는 복만이패, 원윤덕패, 이원보패 등 여러 남사당패가 생기면서 안성은 풍물의 고장으로 유명해지게 되었다.

 

 

1982년 안성 남사당 보존회가 만들어지고, 1989년 전국 민속예술 경연대회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하면서 안성 남사당 풍물은 중요무형문화재 21호로 지정되기에 이른다. 이에 안성 유지들이 나서서 이런 영광의 바탕이 된 바우덕이의 묘소를 찾아내고 복원하데 되었다고 한다.

 

 

 

↓ 비석 뒷면에 새겨진 바우덕이 묘비명

 

 

 

 

↓ 비석 옆면에 새겨진 '민요 바우덕이

 

 

 

 

 

 

 

※ 바우덕이(1848∼1870 )

 

바우덕이는 조선시대 유일의 남사당패 여성 꼭두쇠로 본명은 김암덕(金岩德)이다. 조선시대 안성에서 가난한 소작농의 딸로 출생했으며, 5세때 안성 청룡사 안성남사당에 입단했다. 15세때 안성남사당 꼭두쇠로 추대되어 조선시대 유일의 남사당패 여성 꼭두쇠가 되었다. 남사당이란 조선 후기 장터와 마을을 다니며 춤과 노래, 곡예를 공연했던 단체로서 전문 공연예술가들로 결성된 우리 나라 최초의 대중연예집단이라 할 수 있다. 남사당은 어린아이부터 노인까지 40∼50여명으로 조직되었고 이 단체를 이끌어 나간 대표를 '꼭두쇠'라고 불렀다. 그 밑에는 곰뱅이쇠, 뜬쇠, 가열, 삐리, 저승패, 등짐꾼 등으로 직책을 나누었다.

 

이들은 꼭두쇠를 중심으로 공연계획을 수립하여 기량을 연마하였고 전국 장터를 다니면서 풍물놀이는 물론이고 줄타기, 탈놀이, 창(노래), 인형극, 곡예(서커스)를 공연하였다. 바우덕이는 1865년 고종 2년 경복궁 중건 현장에 안성 남사당패를 이끌고 출연하여 뛰어난 기예(技藝)를 선보였으며, 이에 대원군으로부터 당상관 정삼품의 벼슬과 옥관자를 하사받은 것으로 유명하다. 이 때부터 바우덕이가 이끌던 안성남사당패는 "바우덕이'라는 인물 명칭으로 불리게 되었으며, 전국을 다니며 공연활동을 펼쳤다. 바우덕이는 1870년 폐병에 걸려 2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두산백과사전>

 

사당에도 여자가 가세하게 되었는데, 안성 바우덕이는 전국에 유명했다. 경복궁 중건 때 노역자들을 위로하고자 안성 사당패를 불러 걸판지게 놀이판을 벌였는데 특히 바우덕이의 노래와 춤, 줄타기는 일품이어서 일꾼들이 넋을 잃고 빈 지게만 지고 다녔다 한다. 이에 대신들은 요망한 바우덕이를 처형해야 된다고 상소를 올렸으나 대원군은 오히려 바우덕이의 가무를 칭찬하고 후하게 상을 내렸다고 한다. <답사 여행의 길잡이 7 / 경기 남부와 남한강>

 

☞ <답사 여행의 길잡이 7 / 경기 남부와 남한강>에는 " 1920년경 안성남사당패는 꼭두쇠 자리에 여자인 바우덕이를 앉히는 '변혁'을 가져왔다. 그후 13년간 안성 바우덕이는 안성 사당패를 이끌며 악전고투를 하다가 거리에서 병을 얻어 죽었다고  한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사실에 중대한 착오를 보이고 있다. 1870년에 죽은 바우덕이가 40년 뒤인 1910년에 꼭두쇠가 되었다는 것이 맞지 않고, 22살로 죽은 바우덕이가 꼭두쇠가 된 뒤에 13년간 활동했다면 9살에 꼭두쇠가 되 것으로 역산되는데 현실성이 없다. <답사....>의 착오로 보인다.

 

 

 

 

 

※ 바우덕이 관련 연표

 

 

1848 안성에서 가난한 소작농의 딸로 출생
1853 안성 서운면 청룡사 안성남사당 입단 (당시 5세)
-선소리, 줄타기, 풍물, 무동, 새미의 모든 남사당 공연예술 학습
1863 안성남사당 꼭두쇠 추대 (당시 15세)
남사당에서 최초이자 최후의 여성 꼭두쇠로 활동 시작
(당시 꼭두쇠 였던 윤치덕의 사망 후 바우덕이가 꼭두쇠로 추대됨)
1865 고종 2년 경복궁 중건에 안성남사당패를 이끌고 출연
최고의 영예인 정3품 당상관 벼슬 상당의 옥관자 수상
남사당을 전국 예술집단의 최고봉으로 끌어 올림
1865∼1870 안성남사당패가 '바우덕이'로 통칭됨
전국을 다니며 공연활동을 펼침
→ 대한민국 연예문화 탄생 → 최초의 연예인 : 남사당 바우덕이
1870 폐병으로 사망 (남사당 단원의 간호를 받다가 사망함)
남사당 단원들이 바우덕이를 청룡리 골짜기에 안치하고 장례를 지냄
1982 안성남사당 보존회 결성
1989 전국 민속예술 경연대회 대통령상 수상
1990 청룡리 바우덕이묘를 찾아내어 복원함
바우덕이묘에 바우덕이를 위한 비문을 지어 비석을 세움
1997 무형문화재 지정 (기능보유자 김기복)
2000 안성남사당 전수관 건립
2001 안성남사당 바우덕이 축제 및 바우덕이 전국 풍물 경연대회 개최 (1회)
2002 안성시립 남사당 바우덕이 풍물단 창단
2002 안성남사당 바우덕이 축제 및 바우덕이 전국 풍물 경연대회 개최 (2회)
2003 4월∼10월 총 28회의 토요 상설 공연 완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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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 나라 대중문화의 효시는 누구일까?

 

예전에는 많은 이들이 서구문화로부터 우리 대중문화예술의 원류를 찾고자 했다. 그러나 현재의 대중문화 예술은 서구에서 파생된 것이 아니라 우리의 민중 예술을 통해서 발전해온 결과라고 생각하는것이다. 이러한 우리 대중문화의 원류를 찾는 중심점에서는 항상 사당패가 자리잡는다. 그리고 바우덕이라는 유일무이한 여자 꼭두쇠가 사당패를 대표한다. 즉 바우덕이는 우리나라의 대중문화를 개척한 인물로서 연예의 효시가 되는 것이다.

 

조선 후기 신재효에 의하여 재정립된 판소리는 우리 음악의 중요한 부분이였으나 민중을 하나로 묶어주는 역할을 담당하지 못하였다. 연예로 발전시킬 수 있는 개성 있는 인물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판소리 연희 자체의 형식과 참여에 있어 제한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외에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전승된 궁중음악인 아악이 있지만 종묘제례에 쓰이는 것일 뿐 대중문화와 연관을 지을 수 없었다.

 

그러나 사당패 중에서도 안성남사당 패에는 바우덕이라는 특별한 영혼과 능력을 갖춘 개성있는 여인이 있었다. 그녀는 탁월한 능력으로 경복궁 중건에 동원되어 사기가 떨어진 많은 공역자들과 백성들에게 신명의 힘을 불어 넣어 주었다. 이렇게 하여 엄청난 규모의 경복궁 중건사업은 잘 마무리 될 수 있었다.

 

아마 바우덕이가 없었다면 흥선대원군은 경복궁을 중도에 포기해야 했을지도 모른다. 바우덕이가 공연을 할 때는 얼마나 신명이 났던지 공역자들은 등짐에 짐도 지지 않고 분주히 뛰어다니며 '얼수 얼쑤' 흥을 어우르기만 했다는 일화로 미루어 볼 때 당시의 감흥과 신명이 어떠했는지 짐작이 간다.

 

당시 이 사건은 매우 큰 충격이였다. 민중이라는 개념도 없었고 대중이라는 개념도 없었던 시기에, 대중문화 특히 연예의 힘인 스타가 탄생한 것이다. 이러한 공로에 보답하기 위해 흥선대원군은 바우덕이가 이끈 천민 잡단인 안성 남사당 패에 당상관 정삼품의 벼슬을 내려주었는데, 이것이 바로 안성 남사당패 영기에 걸어준 옥관자였다.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유랑 천민집단이 당상관의 고관벼슬을 받은 것도 그러려니와 일개 놀이패에 벼슬을 내린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정삼품을 받은 사당패 깃발을 앞세우고 가면 전국의 모든 사당패가 절을 드렸다.(만장기를 숙여서 예의를 표시함) 고 하는데 당상관에 대한 예우의 사정을 미루어 볼 때 이 또한 사실이라 하겠다. 그러므로 전국 공연단체 중에서 대장 역할을 담당한 바우덕이가 이끄는 안성 남사당 패는 전국 어디에서건 공연이 가능한 최초의 전국구 공연단체가 되었다고 하겠다. 그리고 이 때부터 바우덕이가 이끌던 안성 남사당패는 "바우덕이" 라는 인물 명칭으로 불리게 되었다.

 

"바우덕이가 왔다" "바우덕이다" 로 불렸다고 하는데 이러한 이름의 대중화는 우리나라 문화에는 없었던 현상이었다. 바우덕이의 천부적인 예술적 능력과 스타기질이 이러한 유행어를 파생시킨것이다. 대중예술의 특징, 특히 연예의 특징은 스타가 있다는 것이다. 스타는 이름으로 불린다. 스타는 관중을 몰고 다닌다.

 

스타는 관중과 대중을 실망시키는 일이 없다. 바우덕이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스타로서 인정을 받는다. "남사당패"가 왔다가 아니라 바우덕이" 가 왔다는 그 시점이 바로 우리나라 연예가 시작된 것이며 민중에게 사랑과 동경의 대상이 형성된 일대 사건이라 할 것이다.

 

- http://www.baudeogi.com/에서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