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산하와 문화재

대왕암(문무대왕릉)

모산재 2005. 12. 28. 00:22

 

대왕암(문무대왕릉)

2005. 01. 06

 

 

양동 민속마을 보느라고 캄캄한 밤에 도착하여 대왕암 콘도식 민박에서 숙소를 정하고 들른 바닷가에는 무속인들이 촛불을 밝히고 진을 치고 있다. 이들 외에는 인적이 끊긴 바다는 쓸쓸했다. 

 

아침, 날씨가 몹시 흐리다. 잔뜩 찌푸린 하늘, 바닷빛도 하늘을 닮았다. 

 

대왕암이 바라보이는 바닷가, 갈매기들만 제 세상인 듯... 대왕암을 한없이 바라보다 횟집에 들러 매운탕에 소주 한 잔하며 아직도 남은 객기에 젖어든다.

 

 

 

 

 

 

 

 

 

 

 

 

 

매운탕이 맛있었던 갯가의 횟

 

 

 

 

● 대왕암

 

사적 제158호. 경주시 양북면 봉길리에 있다.

삼국통일을 완수한 문무왕이 유언으로, 자신의 시신(屍身)을 불식(佛式)에 따라 고문(庫門) 밖에서 화장하여 유골을 동해에 묻으면, 용이 되어 동해로 침입하는 왜구를 막겠다고 하였다. 이에 따라 유해를 동해의 대석(大石)에 장사지낸 뒤, 사람들은 왕의 유언을 믿어 그 대석을 대왕암이라고 불렀다.

이 바위에는 사방으로 수로(水路)를 냈는데, 특히 바다 쪽인 동쪽 수로에서 파도를 따라 항상 맑은 물이 흘러들어와 서쪽의 수로를 통해 빠지게 되어 있다. 인공을 가한 것이 분명하며, 그 안에는 넓은 공간이 있고 그 한가운데에 대석을 놓았는데, 바다의 수면은 그 돌을 약간 덮을 정도이다. 유골은 이 돌 밑에 안치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신문왕(神文王)은 부왕의 뜻을 이어 동해변에 감은사(感恩寺)를 창건하여 불력(佛力)으로 동해의 왜구를 막으려 하였고, 감은사 금당(金堂) 밑에서 동해를 향해 구멍을 뚫어 조수가 금당 밑까지 들어오게 하여, 용이 된 문무왕이 조수를 따라 금당까지 드나들 수 있으리라 생각하였다.

또 대왕암이 바라다보이는 북쪽 언덕 위에는 이견대지(利見臺址)가 있는데, 신문왕은 이곳에서 대왕암을 망배(望拜)하였다. 대석 밑에 어떤 시설이 있는지 알 수 없으나, 중앙의 장골처(藏骨處)를 중심으로 하여 사방으로 수로를 설치한 것은 석가의 사리(舍利)를 안치한 탑의 형식을 적용하였다고 볼 수 있다. (네이버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