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산하와 문화재

안성 여행 (1) 남사당의 혼이 깃든 서운산 청룡사

모산재 2006. 2. 5. 22:59

 

 

2006.02. 02

 

 

 

 

 

새해들어 따스하던 날씨가 이날 따라 시린 바람이 귓불을 아리게 한다. 경기도 안성의 서운산 골짜기에 아늑하게 자리잡은 청룡사.

 

안성 시내에서 안성천을 건너 남으로 달리다 보면 유명한 안성 거봉 포도밭들이 이어지고, 어느새 서운산이 이마에 닿는다 싶은 곳에서 좌회전하여 조금 달리다 보면 푸르른 청룡 호수가 시원스레 나타난다.

 

 

물론 조금 주의 깊은 사람이면 고개를 넘기 전에 바우덕이 묘소 안내 표지판도 보게 될 것이지만, 청룡사를 돌아본 후에 들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청룡호수를 오른쪽으로 끼고 들어가면 금방 마을과 함께 사적비가 나타나고, 오른쪽 개울 건너 양지바른 언덕에 부도밭이 눈에 띈다.

 

 

석종형 9기에 8각원당형 1기 등 모두 10기로 조선 후기의 전형적인 모습의 부도들이다.

 

 

 

 

 

절 앞을 흐르는 개울이 정겹다. 개울 왼쪽으로 서운산 등산로가 있어 산을 찾는 사람들이 많다.

 

 

 

 

 

 

청룡사는 지금부터 750년 전인 1265년(고려 원종6년)에 명본대사에 의해 세워졌다. 그로부터 100년째 되는 1364년 나옹선사에 의해 새롭게 지어졌는데, 절 입구에 세워져 있는 사적비에 따르면 절을 중창할 때 하늘에서 꽃비가 내리고 나옹선사가 서기 어린 구름을 타고 내려오는 청룡을 보았다고 해서 본래 대장암이었던 절 이름을 청룡사, 산 이름을 서운산이라 고쳐 부르게 되었다 한다.

 

 

고려 공양왕의 진영이 모셔져 있었으나 세종 때 다른 곳으로 옮겼고, 인조의 셋째 아들 인평대군이 원찰로 삼아 사세가 확장되었다고 한다.

 

 

 

천왕문일 것 같은데, 들어서며 보니 사천왕은 없고 벽이다. 들어가서 보니 방문이 있고, 열어보니 정갈한 방이다. 상식을 깨뜨리는 모습에 잠시 당황...

 

 

 

혹시 이 문간방을 남사당패들이 숙소로 썼을지도 모르겠다는 상상을 해보며...

 

 

 

 

 

 

천왕문을 들어서면 바로 법당인 대웅전이다. 보물824호. 지은 시기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1601년(선조34년)에 중수하였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17세기 이전에 지었음을 알 수 있다.

 

 

정면 3칸 측면 4칸의 다포계 팔작집인데, 오르는 계단이 정면 가운데엔 없고 양쪽 끝으로 나 있는 점이 이채롭다. 계단의 선과 지붕 기와의 선과 처마의 포들의 선과 조화를 이루며 안정감도 주는 구도를 이루고 있다.

 

 

배경을 이룬 야트막한 산과 나무 숲과의 조화는 더욱 아름다움을 느끼게 만든다.

 

 

 

 

 

 

 

이건물의 특징적인 점은 앞쪽의 기둥들은 대체로 곧고 굵기가 고른 목재를 쓴 데 비하여 옆쪽의 기둥들은 구불구불하고 굵기가 고르지 않은 울퉁불퉁한 목재를 사용한 것이다. 절을 지을 당시의 목재난을 엿볼 수도 있지만, 자연의 재료를 적절히 조화시켜 활용한 예술적인 감각에 오히려 찬탄이 절로 나온다.

 

 

 

 

 

 

 

 

 

대웅전 안에는 불상이 있는데 가운데가 석가모니불이지만 좌우 협시보살은 여느 절처럼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아니다. 특이하게도 제화갈라보살과 미륵보살을 모셨다.

 

 

제화갈라보살은 석가모니의 전생 몸이라고 한다. 흔히는 선혜보살이라고 하는데, 후에 연등불이 되리라는 수기를 받는다. 그리고 미륵보살을 모셨다는 것은 이 절이 후천개벽 사상과 관련되어 있음을 짐작케 한다.

 

 

 

 

 

여러 층으로 된 닫집이 특이하여 눈길을 끈다. 다른 절에서 잘 보이지 않는 양식이다.

 

 

 

 

 

 

 

양쪽 벽면의 괘불탱화

 

 

 

 

 

 

대웅전 앞에는 아담한 3층석탑이 있다. 높이 2.38m. 경기도 문화재 자료. 그러나 상륜부가 사라지고 지붕돌(옥개석)이 깨지는 등 훼손이 심하다. 또 1층의 몸돌에 비해 2, 3층의 몸들이 지나치게 짧아 비례가 흐트러져 예술적으로 평가를 받지 못한 듯하다.

 

 

 

 

 

당간지주

 

 

 

 

 

 

삼신각 삼신도

 

 

 

 

범종각과 범종

 

 

 

 

 

 

 

 

 

대웅전 앞 마당 양쪽에 요사채는 얼마 전에 새로 지은 모양이다.

 

 

 

 

 

 

남사당은 농사철이 시작되는 봄부터 가을걷이가 끝나는 가을까지 방방곡곡 떠돌다 겨울이 되면 이곳 청룡사로 찾아들었던 모양이다.청룡사는 사람들에게 천대받고 어렵사리 생존을 영위하는 남사당들에게 불목하니 등의 일거리를 주고 절의 식솔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영산대제, 수륙제 등 절의 각종 의식에 이들의 춤과 음악이 공양되었을 것이다.

 

 

 

청룡사에서 500m쯤 올라가면 불당골이 나오는데, 그곳이 여장부 꼭두쇠 바우덕이가 살았던 곳이라 한다. 지금도 남사당 후손들이 7~8가구 살고 있다고 한다.

 

 

 

 

일반 공개되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청룡사가 자랑하는 또 하나의 보물로 영산회괘불탱(보물1257호)이 있다.

 

 

 

 

 

괘불탱은 야외에서 불교의식을 거행할 때 멀리서도 볼 수있도록 걸어놓는 불화를 말하고, 영산회란 부처가 영취산에서 법화경을 설법했을 때의 모임을 가리킨다. 이 영산회상도는 석가불을 중심으로 6대 보살, 10대 제자 등이 에워싼 모습인데, 중앙의 석가불은 머리에서 빛이 나고 특이하게도 오른손은 어깨 위로 들고 왼손은 무릎에 올린 시무외인의 손모양을 하고 있으며, 다리는 결가부좌한 모습이다. 관을 쓴 제석천, 면류관에 홀을 든 범천상, 책과 연꽃·정병 등을 들고 있는 6명의 보살 등이 석가 주변을 에워싸고 있다.

 

결가부좌한 석가모니 옆에 수제자 아난과 가섭이, 앞쪽 양옆으로는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협시하고 있다. 그 뒤에 각각 자비의 관음보살과 지혜와 광명의 대세지보살이, 그 좌우에는 사천왕이 호위하고 있다. 제석천과 법천은 양쪽 끝에 자리잡고 있다. 석가 위로는 여러 제자들과 부처의 수호신인 4명의 금강역사상이 있고, 그림의 맨 윗부분에는 여러 불상들이 작게 그려져 있다.

 

 

주로 진한 붉은색과 청색이 많이 사용되었고 복잡한 구도로 인해 무거운 느낌이 들지만 윗부분에서 보여주는 화려함과 아랫부분의 무늬로 인해 여유있어 보인다.

 

 

 

이 그림은 효종 9년(1658)에 승려화가인 명옥 등이 그린 것으로 본존의 크기가 매우 컸던 고려말∼조선초의 그림과는 달리 본존인 석가불이 작아져 상대적으로 주변 인물의 크기와 비슷해진 그림으로, 17세기 중엽 영산회상도를 대표할 만한 작품으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