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산하와 문화재

양동 민속마을, 조선 중기 양반 가옥의 멋과 기품

모산재 2005. 12. 27. 23:30

 

조선 중기 양반 가옥의 멋과 기품, 양동 민속마을

2005. 01. 05

 

 

 

전탑과 모전탑 여행을 마치고 해가 기울어가는 시간, 가와집과 초가가 그림처럼 어울린 경주 양동 민속마을을 찾는다. 낮은 흙돌담길 사이를 걸으며 낯선 여행자는 조선시대 양반 가옥의 멋과 기품에 흠뻑 젖어든다.

 

양동 민속마을은 하회마을이나 낙안읍성 등 전국 6개소의 전통 민속마을 중 가장 큰 규모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양반촌이다. 경주손씨와 여강이씨 두 가문이 서로 협조하며 500여 년의 역사를 이어온 특이한 마을이기도 하다. 

 

▶ 안동 하회마을 → http://blog.daum.net/kheenn/15852531

▶ 벌교 낙안읍성 → http://blog.daum.net/kheenn/13542569

 

 

마을은 500년이 넘는 고색창연한 54호의 기와집과 110여 호의 초가로 이루어져 있다. 양반가옥은 높은 지대에 위치하고 낮은 지대에는 하인들의 주택이 자리잡고 양반가옥을 둘러싸고 있는 형국이다.

 

 

마을은 경주시에서 동북방으로 20km쯤 떨어져 있으며, 마을의 뒷배경이자 주산인 설창산의 문장봉에서 산등성이가 뻗어내려 네줄기로 갈라진 등선과 골짜기가 물(勿)자형의 지세를 이루고 있다. 내곡, 물봉골, 거림 하촌의 4골짜기와 물봉 동산과 수졸당 뒷동산의 두 산등성이, 그리고 물봉골을 넘어 갈구덕으로 마을이 구성되어 있다.

 

'勿'자형을 지형과 관련하여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勿'자의 아랫부분에 획 하나를 더하면 피혈'血'자가 된다 하여 일제가 계획한 마을 안으로의 철도 통과를 우회시켰고, 남향의 양동초등학교 건물을 동향으로 돌려 앉혔다고 한다.

 

아름다운 자연 환경 속에 수백 년 된 기와집과 나지막한 토담으로 이어지며, 통감속편(국보 283), 무첨당(보물 411), 향단(보물, 412), 관가정(보물 442), 손소영정(보물 1216)을 비롯하여 서백당(중요민속자료 23) 등 중요민속자료 12점과, 손소선생 분재기(경북유형문화재 14) 등 도지정문화재 7점이 있다.

 

 

 

 

 

■ 관가정(觀稼亭), 곡식이 자라는 모습을 보듯 자손들이 커가는 모습을 보는 정자 (보물 제442호)

 

조선 성종 때의 건물인데, 마을 입구 좌측의 언덕에 동남향으로 자리잡고 마을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위치에 지어졌다. 여기서 향단이 내려다 보인다. 행랑채가 아닌 사랑채가 대문과 바로 연결되어 있는 이색적인 공간구성으로 눈길을 끈다.

 

조선 성종과 중종 때의 청백리 우재(愚齎) 손중돈(1463-1529)이 손소 공으로부터 분가하여 살던 집으로, 현재는 사람이 살지 않고 비어 있다. 관가정(觀稼亭)이란 곡식이 자라는 모습을 보듯이 자손들이 커가는 모습을 본다는 뜻이다. 특히 아래쪽에 배치된 하인들의 거처인 가립집(초가) 4~5채가 잘 보존되고 있는 모습을 볼수 있는데, 지금은 손씨 후손들이 살고 있다.

 

 

 

 

중앙에 중문을 두고 왼쪽에 사랑채, 오른쪽에 안채를 ㅁ자형으로 배치하였는데 사랑채가 좌우로 더 길게 튀어나온 형태이다. 사랑채는 방 2칸에 대청 2칸으로 누마루 형식으로 되어있다. 건물의 다른 부분에는 각진 기둥을 썼으나 누마루 부분에만 둥근 두리기둥을 사용하여 차이를 두었고 마루 아랫부분의 기단을 낮추어 기둥을 세움으로써 정자의 효과를 거둔 점을 눈여겨 볼 만하다. 

  

원래의 관가정은 양쪽 측면과 뒷면만을 담장으로 둘러막아 주택의 앞쪽을 탁트이게 함으로써 낮은 지대의 경관을 바라보게 하였으나 1981년의 보수로 전면에도 담장을 쌓고 일각대문을 내어 본래의 조망이 감소되었다.

 

 

 

 

  

■ 향단(香壇), 흥(興)자형의 화려하고 과시적인 양반 가옥 (보물 제412호)

    

 

이언적이 경상감사로 있을 때 어머니 병 간호를 할 수 있도록 중종 임금이 지어준 집이다. 원래 99칸이었다고 하나 일부가 불타 없어지고 현재는 50여 칸만 남아 있다.

 

관수정 바로 아래에 자리잡고 있으며, 아우 이언괄을 추모해 지은 '심수정'과 들판을 사이에 두고 건너다 보고 있다.  

 

 

 

이 집은 흥(興)자형으로 지은 건물로 무척이나 화려하고 과시적이다면서도 다소 답답한 공간구성을 보이고 있다. 특히 마당을 앞에 둔 사랑채는 두 개의 나란한 지붕을 연결하여 풍판을 정면으로 향하도록 한 독특한 구조를 하고 있다.

 

일자형 평면구조로 몸채를 사이에 두고 좌측에 안채, 우측에 사랑채를 두고 행랑채도 일자형 몸채와 거의 연접해 있어 거의 한 건물처럼 보이는 집약된 평면을 이루고 있다.

 

 

 

안마당도 극히 폐쇄적으로 이루어져 있다. 안채 부엌의 아래층은 헛간모양으로 흙바닥이고 위층은 마루를 놓았으며 벽체 대신 가는 살대들을 수직으로 촘촘히 세워 일반주택들과 다른 특징을 보이고 있다.

 

향단이 이처럼 상류주택의 일반적 격식에서 과감히 탈피한 점이 특징적인 데 사실 이러한 점은 풍수사상에 의거한 것이라고 전한다.

 

 

 

 

대부분의 자재는 70년대 한 번의 보수공사로 대부분 새 부재로 갈아 끼운 것이다. 

 

 

 

 

 

향단 마당 앞쪽에 세워진 향나무, 줄기 윗부분이 구부러져 가지를 땅으로 늘어뜨리고 있어 가옥의 오랜 역사를 증언하는 듯하다. 

 

 

   

 

 

양동 민속마을 풍경

 

민속마을 가운데 홀로 서 있는 양옥 교회.

 

전통가옥과 어울리지 않는 풍경이라는 지적도 있고 근대의 모습을 보여주는 듯해 의미 있는 풍경이라는 의견도 있다. 어쨌든 다소 생뚱스럽고 튀어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마을 곳곳에 보이는 초가집 풍경들이 정겹다. 양동마을엔 기와집(50여 채)보다는 초가집(100여 채)이 더 많다. 양반들이 거처하는 기와집이 대개 높은 지대에 있다면 상민들이 거처하는 초가집은 대개 낮은 지대에 있다. 서민들이 사는 달동네가 높은 곳에 있는 오늘날과는 대조적인 풍경이다.  

 

 

 

 

 

관가정과 향단을 바쁘게 돌아본 뒤에 들 건너편에 있는 심수정으로 향한다. 심수정은 향단의 주인공인 이언적 선생의 아우 이언괄을 추모하여 세운 정자이다.

 

 

 

■ 심수정(心水亭), 북촌을 바라보는 양동마을에서 가장 큰 정자 (중요민속자료 81호)

   

 

아랫마을(하촌)로 들어서면 아름드리 고목들이 건물을 감싸 안고 있다. 심수정(心水亭)맞은편 북촌에 자리잡은 향단에 딸린 정자로 북촌을 조망하기 좋게 이어졌다. 

 

심수정은 형을 위해 벼슬을 마다하고 노모 봉양에 정성을 다한 이언적 선생의 아우 농재 이언괄(李彦适)을 추모하여 명종 때(1560년경)에 건립한 정자이다. 현재의 건물은 철종 때 불차 사라진 것을 1917년경에 지은 것이다.

 

↓ 심수정 들어서는 길

 

 

 

정자는 ㄱ자형 평면을 이루었으며 ㄱ자로 겪인 모서리가 북촌을 향하고 있어 대각남향(對角南向) 집이 되는 셈이다. 좌측에 담장을 따로 쌓고 건축하였는데 ㄱ자형 평면 양측으로 대청을 놓고 그 옆에 방을 두었다. 좌측으로 대청에 붙은 방 앞에는 후마루를 두어 양동마을 전체를 내다 볼 수 있게 하였다. 방 앞에는 툇마루를 두었고 우측 대청 옆에는 2칸의 온돌방을 두고 있다.

 

정자와 함께 이 정자를 지키는 관리사로서 행랑채는 엣 품격이 있는 작은집으로서 굵은 각기둥과 마루귀틀, 청판 등 건실하게 구성된 집이다. 이러한 방, 마루 부엌으로 연속되는 일자형 구성은 남부지방 민가의 한 기본형으로 가장 흔한 유형이지만 이 집은 부엌을 전면으로 연장하였기 때문에 ㄱ자형이 된 것이다.

 

 

 

 

 

 

'심수정' 외에도 '함허루' 등 여러 명칭의 현판이 걸려 있다. 보길도 세연정처럼...

 

 

 

 

 

 

심수정에서 만난 '별'이란 이름의 개. 뒤에 적혀 있는 글이 익살스러우면서도 의미심장하여 눈길을 끈다. '남북 통일', '윤리 도덕', '우주 진리', 아마도 자신이 추구하는 삶의 가치로 보이는 세 가지 덕목을 개에게 이입한 주인장이 누군지 은근히 궁금해진다.

 

 

  

※ 기타, 양동마을의 주요 가옥들

 

 

● 무첨당(無忝堂) 보물 411호

 

1460년경에 지은 여강 이씨(驪江 李氏)의 종가 별당으로 간결하고 세련된 솜씨의 주택이다. 무첨당(無忝堂)은 이언적 선생의 다섯 손자 중 맏손자인 이의윤(李宜潤)의 호이며 조상에게 욕됨이 없게 한다는 뜻이다. 별당건물이기는 하지만 살림채 입구에 있고 규모도 커서 큰 사랑채 격이다. 다시 말해서 대개의 별당이 외부인의 눈에 잘띄지 않는 안쪽에 자리잡고 있는데 반해 무첨당은 대문 옆에 자리잡고 있어 큰 사랑채와 같은 느낌을 준다.

 

오른쪽 벽에는 대원군이 집권 전에 이곳을 방문해 썼다는 죽필(竹筆)인 좌해금서(左海琴書)라는 편액이 걸려 있는데 ‘영남(左海)의 풍류(琴)와 학문(書)’이라는 뜻이다.

 

 

▲ 사진 출처 : http://yangdong.invil.org/

 

 

서백당(書百堂) 중요민속자료 23호

 

안골 중심의 산중턱에 자리잡은 규모와 격식을 갖춘 대가옥으로 양민공(襄敏公) 손소(孫昭, 1433~1484)공이 성종 15년(1454년)에 지은 월성 손씨의 종가이다. 서백당(書百堂) 또는 송첨(松詹)이라 부르며, 서백당(書百堂)은 하루에 참을 인(認)자를 백번 쓴다는 뜻이며 근래에 와서 굳어진 당호(堂號)이다. 

 

 

 ▲ 사진 출처 : http://yangdong.invil.org/

 

 

<통감속편> 국보 제 283 호 

 

24권 6책의 경자자본(서-목록-서례는 계미자)으로 양동민속마을 서백당 내에 보존되고 있다. 중국 고대의 역사를 기록한 책으로, 단종이 왕세자 시절 공부하던 자선당(資善堂) 전적에만 찍던 집희경지(緝熙敬止)'라는 도장이 권수(卷首)와 서문 등 5개처에 찍혀 있어 궁중에서 사용했던 책임을 알 수 있다. 특이할 만한 점은, 닥종이가 아닌 왜면지(倭綿紙)를 사용한 점, 권말의 변계량(卞季良)의 발문으로 이 책이 1420년 세종의 명을 받은 이천이 주조한 경자자로 1422년(세종 4)에 찍은 책임을 알 수 있고, 태조의 시호가 명나라가 내려준 공정대왕(恭定大王)이 아닌 광효대왕(光孝大王)으로 기재된 점 등이다.

 

 

※ 양동마을 국가 지정 문화재

종류

지정번호

문화재명

비고

중요민속자료

189호

양동민속마을

 

국보

283호

통감속편(通鑑續編)

월성손씨

보물

411호

무첨당(無忝堂)

여강이씨종택

보물

412호

향단(香壇)

여강이씨

보물

442호

관가정(觀嫁亭)

월성손씨

보물

1216호

손소영정(孫昭影幀)

월성손씨

중요민속자료

23호

서백당(書百堂)

월성손씨종택

중요민속자료

73호

낙선당(樂善堂)

월성손씨

중요민속자료

74호

사호당(沙湖堂)

여강이씨

중요민속자료

75호

상춘헌(賞春軒)

여강이씨

중요민속자료

76호

근암고택(謹庵古宅)

여강이씨

중요민속자료

77호

두곡고택(杜谷古宅)

여강이씨

중요민속자료

78호

수졸당(守拙堂)

여강이씨

중요민속자료

79호

이향정(二香亭)

여강이씨

중요민속자료

80호

수운정(水雲亭)

월성손씨

중요민속자료

81호

심수정(心水亭)

여강이씨

중요민속자료

82호

안락정(安樂亭)

월성손씨

중요민속자료

83호

강학당(講學堂)

여강이씨

 

 

※ 양동마을 안내도

 

 ▲ 출처 : 양동마을 홈페이지( http://yangdong.invil.org/)

 

  1코스(하촌) : 안락정→이향정→강학당→심수정(20분 소요)

  2코스(물봉골) : 무첨당→대성헌→물봉고개→물봉동산→영귀정→설천정사(1시간 소요)

  3코스(수졸당) : 경산서당→육위정→내곡동산→수졸당→양졸정(30분 소요)

  4코스(내곡) : 근암고택→상춘헌→사호당→서백당→낙선당→창은정사→내곡정(1시간 소요)

  5코스(두곡) : 두곡고택→영당→동호정(30분 소요) 

  6코스(향단) : 정충비각→향단→관가정→수운정(1시간 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