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일본 여행

일본 여행 (2) 토요토미 가문과 도쿠가와 가문의 오사카성

by 모산재 2006. 1. 19.

 

일본 여행 (2) 토요토미 히데요시와 도쿠가와 이에야쓰의 오사카성(大阪城)

오사카 / 2006. 01. 14

 

 

 

일본 여행의 마지막날. 자고 일어난 아침 바람이 많이 불고 비가 내린다.

 

신사이바시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오사카 역사박물관으로 간다. 

 

애초에 박물관 관람은 예정하지 않았지만 역에서 나오자 바람과 비가 심해 가까이 있는 역사박물관으로 향했다. 10층 건물 맨 위층에서부터 내려오면서 차례대로 고대(10층), 중세와 근세(9층), 고고학 특별전시(8층), 근현대(8층) 순으로 살펴보았고, 지하층에는 실물의 고대 유적이 있다고 하는데 관람은 생략하였다.(관람료 540엔)

 

관심이 별로 가지 않던 터에 막상 보고 나니 실망스럽다. 전시물에 비해 건물만 쓸데없이 크다는 인상만 간직한 채 오사카성으로 향했다. 오사카성은 역사박물관에서도 내려다보이는 곳에 있다.

 

 

오사카역사박물관의 대형 유리창문을 통해 내려다 본 비에 젖은 오사카성

 

 

 

 

오사카성은 토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세워진 성이다.

 

1583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천하 쟁탈을 위한 성을 쌓기 시작하여 1585년 3년 공사 끝에 5층 8단에 금박 기와의 호화로운 망루형 천수각을 완성했다.

 

그러나 1615년 도쿠가와의 에도막부가 도요토미 가문을 쓰러뜨리기 위해 벌인 '오사카 여름 전투'에서 도요토미의 오사카성은 천수각과 함께 불타버린다. 그 후 1626년 도쿠가와 히데타다는 도요토미씨의 오사카 성의 흔적을 지우고 석벽을 다시 쌓아올려 (1959년의 발굴 조사에서 현존 오사카성의 지하 10m 정도 밑에 도요토미 히데요시 당시의 석축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더 큰 규모로 도쿠가와의 오사카성 천수각을 완성하였다. 그러나 이 천수각은 1665년에 벼락으로 소실되었다. 

 

당시의 혼마루(本丸)와 니노마루(二の丸) 성역이 남아 있으며, 현재의 천수각은 1931년에 도요토미가 축성한 오사카성의 천수각을 본떠 도쿠가와의 오사카성 천수대 위에 세워졌다. 1997년에 대대적인 개수작업을 하였다.

 

 

권력자의 안위를 위해 세워진 이 엄청난 규모의 성은 지금은 산책 나온 오사카 시민들과 유람온 관광객들로 붐비는 공원일 뿐이다. 그럼에도 오사카인들은 농민 출신으로서 천하를 휘어잡은 토요토미 히데요시에 친밀감을 많이 느낀다고 한다.

 

 

※ 오사카성 안내도

 

 

 

 

성으로 들어가는 길은 공사중이다. 입장료는 천수각에서만 받는다고 하여, 출입이 자유롭다. 아래 사진에 보이는 지점이 바로 성의 바깥 해자를 건너는 곳이다.

 

 

 

 

성을 들어서자마자 오른쪽으로 보이는 초대형 석벽. 높이가 사람 키의 3배는 되어 보인다.

 

 

 

일본나한송

 

 

 

 

다시 안으로 돌아드니 해자를 건너 또 하나의 성인 내성이 나타난다. 석축에 사용된 바위의 크기가 입을 벌어지게 한다. 특히 모퉁이의 돌들….

 

 

내성(혼마루)으로 들어서는 사람들 행렬

 

 

 

 

혼마루로 들어가는 길 양 옆 해자는 물이 빠지고 없다.

 

 

 

 

이 성에서 두번째로 큰 바위 앞에 이를 설명하는 안내판을 세웠다. 오른쪽 바위(아래 사진)가 무게 130톤, 저 멀리 정면에 낙엽 떨군 나무 뒤에 있는 바위가 120톤으로 세번째 큰 바위라 한다.

 

 

 

 

● 천수각(덴슈가쿠, 天守閣)

 

1931년 오사카 시민들의 열의로 철근 콘크리트로 높이 55m 5층 8단의 건물로 재건되었다. 높이 약 13m의 덴슈다이(天守臺) 위에 39.8m의 덴수가쿠가 세워졌다. 그런데 2차세계대전 당시 선 안과 주변에 군사시설이 많아 극심한 폭격을 당해 대부분의 건물이 파괴되었는데, 이 천수각만은 건재하였다고 한다.

 

옛 그림을 토대로 복원된 천수각은 1층부터 4층까지 도쿠가와 풍으로 백색인 회벽으로 하는 한편, 5층에서는 도요토미 풍으로 흑색에 금박으로 호랑이와 두루미의 그림을 그려 넣었다. 

 

 

 

천수각의 안은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고, 입장료를 받는다(600엔, 중학생 이하는 무료).

 

덴수가쿠는 엘리베이터로 4층까지 올라가서 6층까지는 좁은 계단을 걸어서 올라가게 되어 있다. 내부에는 층별(8층에서부터 차례대로)로 전망대, 토요토미의 생애, 오사카 여름 전투, 토요토미의 시대, 성에 대한 정보 등의 기능과 전시물을 갖추고 있다. 

 

 

오사카 여름 전투도 한 장면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누각 위를 까마귀 여러 마리가 맴돌다가 처마에 않기를 되풀이하고 있다.

 

 

 

 

살아 생전, 그는 이 높다란 누대에 올라 서북 하늘을 쳐다보며 조선을 침략할 구상을 했을 것이다. 성이 완성된 1583년으로부터 꼭 10년째 되는 1592년, 조선은 토요토미가 보낸 왜적에 의해 7년간에 걸쳐 무자비한 학살과 유린을 당한다.

 

 

 

 

이 천수각 서편 뒤 공터엔, 1598년 토요토미가 죽은 후 그의 여섯 살짜리 어린 아들 히데요리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쫒기다 어머니와 함께 자결한 장소가 있다. 그 자리에 이 사실을 기록으로 새겨 놓은 작은 비석이 서 있다. 민중의 피와 땀으로 쌓아 올린 이 거대한 성이 자신의 한 몸은 지켜냈지만 처자식까지는 지켜내지 못했던 것...

 

 

↓ 왼쪽 성벽 위에 살짝 보이는 건물이 시립박물관이고, 오른쪽 해자는 '내호'라 부른다. 

 

 

 

 

임진왜란의 끝을 알리는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죽음... 1598년 8월,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죽기 전 원로 고다이로(五大老)에게 6살짜리 자신의 아들 히데요리를 부탁하는 유언을 남기지만, 다섯 원로 중에 세력이 가장 컸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자기 스스로 최고 권력자가 되고자 했다.

결국 토요토미 세력은 이에야스를 지지하는 동군(東軍)과 히데요리의 계승을 지지하는 서군(西軍)으로 분열되어 전투가 일어난다. 조선 침략의 선봉장 가토 기요마사(가등청정)는 히데요시의 혈족이면서도 동군에 가담했고, 호남지역 침공의 주역인 고니시 유키나가(소서행장)는 서군에 서서 대립했다. 순천 왜교성 전투에서 고니시와 함께 농성전을 벌였던 마쓰우라 시게노부, 아리마 하리노부 등 4명의 다이묘는 전우의 회유를 물리치고 동군 편에 섰다. 고니시는 참수되고 서군은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1600년 동군 승리로 끝난 이 전투를 '세키가하라 전투'라 부른다.

이로부터 1603년 새로운 권력인 에도(江戶) 정권이 출발하게 된다. 고니시 유키나가의 가문이 완전히 멸문된 뒤 그의 영토는 가토 기요마사의 소유가 되었지만 가토 가문도 이에야스의 눈 밖에 나 몰락의 길을 걸었다. 1615년 '오사카 여름 전투'에서 쫓기던 히데요리 모자도 결국 자결한다.

 

 

 

● 제1망루와 남외호

 

니노마루의 남동쪽 성벽 위에 있다. 앞에 보이는 해자가 호수처럼 넓은 '남외호'(남쪽의 바깥 해자라는 뜻)이다. 청둥오리들이 한가롭게 헤엄치고 있다. 무엇을 지키기 위해 이 넓은 호수를 파야 했을까…. 토요토미의 야망이야 알 바 없이 넓은 물이 있어 청둥오리는 유유히 헤엄치며 놀 뿐이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오사카성을 크게 고쳐 지었으나 오사카를 떠나 에도(도쿄)를 거점으로 삼았다. 그 바람에 오사카는 정치 경제적 지위를 도쿄에 빼앗기게 되었다. 그래서 오사카의 사람들은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무척 싫어한다고 한다.

 

 

 

※ 오사카성 위치 안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