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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여행

일본 여행 (1) 오사카, 백제인이 세운 일본 최초의 절 시텐노지(사천왕사)

by 모산재 2006. 1. 19.

 

일본 여행 (1) 백제인이 세운 일본 최초의 절, 시텐노지(사천왕사)

 

오사카 / 2006. 01. 11

 

 

 

해가 기울 무렵 무덤이 있는 곳을 지나 석무대(石舞台)를 둘러본 다음 시텐노지(四天王寺) 경내로 들어서려니까 문 닫을 시간이 다 됐다고 들여 보내 주지를 않는다. 어쩔 수 없이 아직 닫히지 않은 입구 처마 밑에 쪼그리고 앉아 들여다 보며 셔터를 누르는 데 만족해야 했다.

 

 

시텐노지는 우리 고대문화의 일본 전파를 증언해 주는 의미 있는 절이다. 한반도와의 문화 교류를 기념하는 '사천왕사 왓소이'라는 행사가 해마다 벌어지는 것도 그런 문맥이다.

 

시텐노지는 6세기 말 중국과 한반도의 문물을 받아들여 아스카(飛鳥) 문화를 주도하던 쇼토쿠(聖德) 태자의 발원에 의해 일본 최초로 지어진 절이다. 당시 일본 조정은 한반도에서 건너간 선진 종교인 불교를 받아들이려는 소가(蘇我) 씨족과 이를 반대하는 모노나베 씨족 사이에 치열한 세력다툼으로 내분이 있었다. 이때 쇼토쿠 태자는 소가 씨족을 지원하고 그 싸움에서 이기면 그 은덕을 기리기 위해 절을 짓겠다고 사천왕에게 기원했다고 하며, 싸움이 승리로 끝나자 약속대로 시텐노지를 지었다 한다.(서기 593년)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관사(官寺)인 이 절은 남대문, 중문, 오중탑, 금당, 강당이 남북으로 일직선으로 늘어서 있는 가람 배치를 보이는데 이를 '시덴노지 양식'이라고 말한다. 이 가람 배치는 1탑 1금당의 백제 양식과 비슷하여 백제 불교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평가된다.

 

 

 

 

 

 

서기 593년 일본의 쇼토쿠태자는 백제의 기술자 금강중광(金剛重光, 한국 이름 유중광) 등을 초빙하여 이 절을 지었는데, 놀랍게도 사천왕사를 지은 후 그 집안에 절의 유지 보수를 맡겨 지금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1400여 년을 이어 내려온 그 후손이 '공구고미(금강조)'란 건설회사이고 사장은 70대의 '금강리융'이란 분이라고 한다. 공구고미는 사천왕사에서 200m 거리에 있는데 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고건축 회사로 알려져 있다. 1932년 회사가 망했는데, 그 아버지는 하얀 소복으로 갈아입고 어머니와 아들을 데리고 사천왕사 경내의 집안의 선산으로 가서 일본도로 배를 갈라 자살하여 조상에 대한 죄를 빌었고, 그 후 어머니가 절의 주지에게 사정사정하여 회사를 다시 일으켜 오늘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아직 닫히지 않은 문 입구에서 빼꼼히 들여다보며 사진을 담아 본다.

 

 

 

 

 

● 금당(金堂)

 

시텐노지는 창건 이래 1801년까지 5회 이상 재건되었다. 금당은 수차 재건·수리를 거쳐서 2차대전 때 소실되었으나, 그 후에도 가설(假設)건물이 2차 재건되었었다. 지금의 건물은 1963년에 완공된 것이다.

 

 

 

 

● 5층탑(五重塔)

 

20세기 초 태풍으로 대파된 것을 1959년에 철근 콘크리트로 복원하였다고 한다. 높이 39미터. 불도의 다섯 세계인 하늘, 바람, 물, 불, 땅을 상징한다고 한다.

 

 

 

경내의 녹나무. 이 지역의 키 큰 조경수는 모두 상록활엽수인 녹나무가 전부라 할 정도로 아름드리 나무들이 많이 자리잡고 있다. 까만 열매를 달았다.

 

 

 

 

● 이시부타이(石舞台)=무대강(舞臺講)

 

사천왕사 뒤쪽에 있는 돌무대, 이시부타이(石舞台)이다. 그 옛날 백제의 예술가인 미마지(味摩之)가 고구려에 가서 사자춤을 배운뒤 왜나라로 건너와 고구려의 사자춤과 가면극을 제자들에게 가르친 곳이라고 한다. 또한 미마지의 음악은 뒷날 일본 왕실 아악(雅樂)의 기본이 되었다. 그래서 그는 일본 '아악의 아버지'로 불리고 있다 한다.

 

 

 

 

● 공동묘지

 

 

 

전몰영령공양비. 태평양 전쟁에서 죽은 사람들의 유해를 안치하고 있는 모양이다. 혹시 조선인은 없는지... 어떻게 봐야 할지 맘이 혼란스럽다.

 

 

 

 

※참고 1 : 일본에서 기악무를 가르친 백제의 음악가, 미마지((味摩之)

미마지는 일본의 가장 오래된 역사책인 일본서기에 나오는 인물이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그는 백제의 음악가로 중국 오나라에서 기악무(伎樂舞)를 배우고 돌아 온 뒤 612년(무왕13년) 일본의 사쿠라이(櫻井)에 가서 일본 상류층의 어린 소년들에게 기악무를 가르쳤다. 사쿠라이는 지금 아즈까(飛鳥)의 광암사(廣巖寺)부근이다. 이곳에서 미마지는 성덕태자(聖德太子)의 비호를 받아 사찰에서 공연을 하였다.

이에 관한 기록은 그로부터 약 600여 년이 지난 1233년에 일본의 음악가 박근진(近眞)이 저술한 교훈초(敎訓抄)에도 소개되어 실제로 기악이 어떠한 공연이었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이는 우리나라의 산대극과 유사한 것이라 한다. 오늘날 일본의 가면극 즉 가부끼(歌舞伎), 노오(能), 교겡(狂言), 분라꾸(文樂) 등 가면극의 초기 형태인 것이다.

미마지의 제자로 신한과 제문이라는 두 사람이 있었는데, 이들이 그 때 사용하였던 기악(伎樂)의 가면(假面) 200여 면(面)이 현재 일본 국보로서 국립 박물관과 도오다이지(東大寺)를 비롯한 많은 사찰에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참고 2 : 시텐노지(四天王寺) 왓소(ワッソ) 마쯔리

 

시텐노지 왓소마쯔리는 고대 동아시아 나라들의 국제교류를 영웅 위인들의 모습을 통해 우아하게 재현한 것이다. '왓소(ワッソ)'라는 말은 한국어의 '왔다'라는 의미로, 일본에서 마쯔리를 할 때 가마를 메고 '왓쇼이(ワッショ イ)'라고 힘찬 구령소리를 내는데, 한국어 '왔소'가 어원이라고 한다. 행사는 11월 3일 문화의 날(文化の日)에 오후 1시부터 4시까지 수천 명의 행렬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마쯔리는 신라 백제 고구려부터 조선시대까지의 각 시대의 인물로 분장한 수천 명의 다니마치 거리에서부터 시텐노지까지 행진하는 것이다. 행진은 쇼토쿠태자에게 불교를 전해 준 고구려의 고승 혜자를 선두로, 가야의 우륵, 일본에 문자를 전해 준 백제의 왕인박사, 삼국을 통일한 김춘추 등 각 시대의 위인들과 영웅들을 비롯하여 발해, 중국의 남북조를 통일한 수나라의 배세청, 조선시대의 세종대왕, 그리고 조선통신사의 인물들이 행진한다. 장대한 행렬은 쇼토쿠태자를 비롯한 일본을 대표하는 문부대신, 만요시인 카기노모토히토마로 등의 영접을 받으며 시텐노지에 도착하면 끝난다.

시텐노지 왓소마쯔리의 심볼은 길이가 12미터에 이르는 일본 최대의 배수레이 다. 이 배수레는 고대 동아시아를 향해하는데 사용된 것을 재현한 것이다. 또한 사물놀이패가 등장하여 행렬의 화려함을 더해 주는 것은 물론, 우주 만물의 리듬을 자유롭게 조절하여 듣는 사람들의 육체와 영혼을 고대의 세계로 인도한다.

조선통신사와 관련된 마쯔리로는 쓰시마섬의 아리랑 마쯔리가 있다. 8월 중순경에 열리는 이 마쯔리는 조선통신사가 쓰시마섬을 경유하여 일본 본토에 상륙하였던 것을 기념하여 당시 통신사의 행렬을 재현한 것이다.

 

※참고 3 : 문 닫는 금강조(곤고구미) 

백제인이 일본에서 세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기업 '금강조(金剛組·곤고구미)'가 창업 1428년 만에 내년 1월 청산된다.

건축회사인 곤고구미는 쇼토쿠(聖德) 태자가 백제에서 초빙한 장인 유중광(柳重光)이 시텐노지(四天王寺)를 건설한 578년을 창업연도로 잡고 있다. 이후 유중광의 자손들인 금강(金剛·곤고) 집안에서 곤고구미의 ‘당주(堂主)’ 자리를 지금까지 이어왔으며, 작년 영국의 이코노미스트지(誌)는 곤고구미를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기업’으로 선정했다. 곤고구미는 오사카(大阪)의 시텐노지를 비롯, 나라(奈良)의 호류지(法隆寺) 등 일본 고대 건축을 대표하는 2대 사찰을 건립했으며, 건축 외길로 가업을 이어온 일본 ‘시니세(老鋪)문화’의 대표 기업으로 꼽혀왔다. 하지만 1980년대 매입한 토지가 거품경제 붕괴로 폭락하면서 누적된 차입금을 감당하지 못해 청산을 선택한 것으로 알려졌다. 올해 4월 현재 매출은 75억엔, 종업원은 약 100명이다.

청산 후 곤고구미의 영업은 중견 건설회사인 다카마쓰(高松)건설이 지난 11월 설립한 같은 이름의 자회사 ‘곤고구미’에 양도되지만, 금강가의 자손 곤고 마사카즈(金剛正和) 사장(40대 당주)은 곤고구미 청산과 함께 퇴임할 것으로 알려져 곤고구미의 1400년 가업사(家業史)는 사실상 끝을 맺는다. 백제혼(魂)이 담긴 곤고구미의 영업 양도액이 얼마인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이 회사는 ‘곤고구미가 흔들리면 일본 열도가 흔들린다’는 말을 남길 정도로 고대 백제의 건축 기술을 유지·발전시킨 기업으로 꼽힌다. 시텐노지는 현재 매년 11월 신(新)문물을 가지고 한반도에서 온 사절들을 기념하는 ‘사천왕사(시텐노지) 왔소’ 행사가 열릴 정도로 일본의 한국문화 전승을 상징하는 ‘메카’ 역할을 하고 있다.

곤고구미는 1955년 가족 회사에서 주식회사로 탈바꿈했으나, 최고경영자(CEO)에 해당하는 ‘당주’는 계속 곤고가가 맡았다. 청산과 함께 퇴임하는 40대 당주 마사카즈(正和)는 1400년 동안 조상이 살았던 집터에 그대로 살고 있을 정도로 역사에 대한 애착이 강한 기업이다.

현대에 들어서도 곤고구미는 ‘백제 기술’을 바탕으로 사찰 전문 건축회사로 명성을 이어갔다. 1995년 한신(阪神) 대지진 때 고가도로가 넘어지고 땅이 갈라지는 와중에도 곤고구미가 지은 절은 무너지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거품시대 단 몇 년 동안 쌓은 ‘부(負)의 유산’이 1400년 가업사를 한순간에 날려버린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