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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산하와 문화재

청년 김대건 길 (1) 김대건 신부의 사목지, 은이성지

by 모산재 2024. 12. 25.

 

10월 세째 주말 트레킹 코스는 용인의 '청년 김대건 길', 용인 은이성지에서 안성 미리내성지로 이어지는 10.3km, 순례길이다. 은이성지에 도착한 시각은 9시 45분. 길 걷기는 4시간이면 되지만 주요 여정인 은이성지, 와우정사, 미리내성지를 돌아보고 점심식사도 해야 하기 때문에 실제로는 5시간 30분쯤 필요하다.

 

출발 지점에서 잠시 돌아본 은이성지는 우리나라 최초 신부인 김대건 신부(1821-1846)가 사목 활동을 하였던 곳이고, 미리내성지는 그가 묻힌 무덤이 있는 곳이며, 이 두 곳을 잇는 길은 김대건 신부가 용산 새남터에서 처형을 당한 후 5일 밤 걸려서 몰래 시신이 옮겨진 길이기도 하다. 

 

 

 

 

2023. 11. 18.  용인 양지

 

 

산으로 둘러싸여 조용하고 한적한 성지 가운데 작은 마당에는 김대건 신부의 조각상이 서 있고, 안쪽으로 한옥 형식의 김대건 신부 기념관과 1845년 8월에 사제 서품을 받은 중국 상하이의 성당을 재현한 김가항성당이 자리하고 있다.

 

'은이'는 '숨은 마을'이라는 뜻을 가진 '은리(隱里)의 와전된 이름으로, 천주교 박해 시기에 숨어 살던 신자들의 교우촌이었다. 소년 김대건은 이곳에서 가까운 골배마실에 살았다. 15세에 이곳에서 모방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은 김대건은 최양업, 최방제와 함께 신학생으로 선택되어 마카오로 파견되었고, 10년만인 1845년 사제 서품을 받고 귀국하여 이곳 은이공소에서 첫 사목 활동을 한다. 1839년 기해박해 때 새남터에서 순교한 모방 신부의 사목 활동의 중심지 또한 은이 공소였다.

 

 

 

용인 양지면의 은이성지, 야산을 배경으로 왼쪽에 하얀 천주당 건물인 김가항성당, 오른쪽 뒤편에 김대건 기념관이 자리잡고 있다.

 

 

 

김가항성당(金家巷天主堂) : 김대건 신부가 조선 천주교회 역사상 조선인 사제로 최초로 사목한 은이공소 자리에 세워진 성당으로 김대건이 중국 상하이에서 사제로 서품 받았던 김가항천주당을 재현한 것이다. 중국 상하이 김가항천주당은 명나라 말년에 김씨 성을 가진 교우들에 의해 황포강 건너에 세워졌는데, '김가항'은 '김씨 사람들의 골목'이란 뜻이다. 상하이 본당 철거 뒤 반입한 기둥과 대들보 등 일부 자재를 활용하여 2016년 복원하였다.

 

 

 

김대건 기념각과 김대건 입상

 

 

 

김대건 기념관과 내부의 전시물들

 

 

 

 

 

 

 

* 기해일기 : 현석문 등이 1839년의 기해박해를 전후하여 순교한 천주교인들에 관해 기록한 천주교서, 자료집. 순교자들과 같은 시대에 살았던 목격자들의 증언에 기초하여 쓰여졌으며, 1925년에 시복(諡福)된 79위 복자(福者)의 시복 조사 작업에 가장 중요한 사료로 이용되었다.

 

* 천주성교공과(天主聖敎功課) : 1862년부터 1864년 사이에 4권으로 목판 인쇄된 한국 천주교회의 공식 기도서

 

 

 

 

* 주년첨례광익(周年瞻禮廣益) : 천주교 제4대 조선대목구장 베르뇌가 한국 천주교 신자들의 신심수양(信心修養)을 위하여 1865년에 간행한 심신수양서.

 

* 신명초행(神命初行) : 1864년 프랑스 주교 다블뤼가 저술한 천주교 신앙생활의 입문을 위한 천주교서 

 

 

 

주차장 옆 은이성지 사제관. 앞쪽은 은이성지 쉼터

 

 

 

 

1996년 김대건 순교 150주년을 맞아 그동안 방치되었던 은이공소터 일부를 매입하고 야외 제대와 김대건 신부상을 세우면서 김대건 신부 기념관 건립 추진 운동에 나선다. 2002년과 2003년에 주변 땅을 추가 매입하고 사제관과 성당, 숙소 건물 등을 마련하였다. 2013년 김대건 신부가 세례 받은 곳으로 추정되는 은이 공소터의 부지를 매입하고, 2016년 김가항 성당을 복원하고 김대건 신부 기념관을 신축하였다.

 

 

 

 

 

※ 이 글을 마무리하는 중 김대건 신부의 후손이라는 대전교구 김용태 신부의 시국기도회 뉴스가 있어 기록해 둔다. 

 

○ 2024. 12. 09. 천주교대전교구 정의평화위원회가 주교좌 대흥동 성당에서 열린 시국기도회 시국 강론에서 김용태(마태오) 신부(천주교대전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는 요한묵시록 12장 3절 이야기를 인용한다.

  머리 7개에 뿔 달린 용은 사악한 마음을 가진 괴물들을 이끌며 신앙심이 깊은 인간들을 괴롭히거나 타락시켜 사람들을 하느님에게서 떨어트려 놓으려 해 ‘악마’, ‘사탄’으로 표현하고 있다. 용은 하늘에서 내쫓기지만 군대를 모아 전쟁을 일으킨다. 하지만 하느님이 내린 불에 삼켜져 순식간에 전멸하고, 용 역시 불과 유황의 바다로 떨어져 고통받는다.

  김 신부가 하느님과 용이 싸우는 대목을 설명한 후 “묵시록의 이 사악한 용이 자리잡은 곳, 그곳을 우리는 용산이라 부릅니다.”라고 설명하자 참석한 1000여 신자들은 크게 웃으며 박수 치며 공감을 표했다. 김 신부는 “그런데 이 용이란 표현도 가당치 않은 용산의 이무기, 그 옛날의 뱀, 악마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는 온 세계를 속이던 그 자가 지난 12월 3일 밤에...”라며 다음 단어를 어떻게 표현할지 사전까지 찾으며 고민을 했다면서 “지X발광을 하였습니다”고 설교를 이어갔다. 김 신부는 “2024년 대명천지에 비상계엄이라니, 그것은 비상 계엄을 가장한 친위쿠데타요, 나라의 주인인 국민을 향한 반란이었다.”라며 “용산 이무기의 지X발광은 열 일 제치고 달려와 국회를 둘러 시민들의 용기와 계엄군 병사의 양심과 뜬눈으로 밤 지새우며 두 손 모아 기도했던 온 국민의 염원이 만나서 몇 시간 만에 끝났다.”라고 설명했다.

  아울러 "내란수괴 윤석열을 처벌한다고 해서 끝이 아니다."라며 "반란수괴 편에서 공범을 자처하는 국민의힘을 해산시켜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지금 윤석열을 탄핵해도 제2의 윤석열, 제3의 윤석열이 등장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한편 김용태 신부는 한국인 최초의 신부이자 성인인 김대건 안드레아 비직계 후손으로, 가족 중에 순교자만 14명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 김대건(金大建, 1821-1846)   


김대건은 한국 최초의 가톨릭 신부이자 마찬가지로 한국 그리스도교 최초의 성직자로, 세례명은 안드레아다. 피에르 모방 신부의 천거로 마카오에서 유학하며 신학을 공부해 사제로 서품되고 귀국하였으나, 단 1년 밖에 사목 생활을 하지 못하고 붙잡혀 군난을 받고 1846년, 병오박해로 25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1925년 동료 순교자 78명과 함께 시복되었고, 1984년 한국의 동료 순교자 102명과 함께 시성됐다.

충남 당진 우강면 솔뫼마을에서 태어났으나 출생 몇 년 만에 가족이 천주교 박해를 피해 경기도 안성시의 미리내 성지 인근 은이공소으로 이주하여 그 곳에서 성장하였다. 1836년 프랑스 파리외방전교회에서 온 선교사인 피에르 모방 신부가 은이공소에 왔을 때에 세례성사를 받았다. 모방 신부는 선교지의 주민들을 신학생으로 선발하여 교육하고 성직서품을 주는 파리외방전교회의 전통에 따라 최양업, 김대건, 최방제 3명을 신학생으로 선발하였는데, 모방 신부가 숙식하던 정하상(정약종의 아들) 댁에서 김대건은 두 신학생보다 6개월 늦게 한문과 라틴어를 배웠다.

1834년에 입국하여 활동한 중국인 유방제 파치피코 신부와 함께 1837년 6월 마카오에 도착하여 비밀리에 사제 수업을 받았다. 마카오에서 아편 문제로 인해 정세가 혼란해지자 필리핀으로 피신해 사제 수업을 이어나가기도 했다.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은 프랑스어, 라틴어, 신학, 서양 철학 등을 가르쳤으며 낮에는 공부하고 저녁에는 산책하면서 견문을 넓혔다. 그러나 최방제는 위열병으로 죽고 말았다. 그 사이 1839년 기해박해로 부친 김제준, 은사 피에르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 제2대 조선대목구장 앵베르 주교, 조선 최초의 신부로 기대되었던 정하상, 김대건에 이어 2번째 조선인 사제가 되는 최양업의 부모 최경환, 이성례 등이 이 때 순교하였다. 그럼에도 신학 공부에 매진하여 1845년 중국 상하이 김가항 성당에서 페레올 신부로부터 최초의 조선인 사제로 서품되었다.

김대건은 순교한 앵베르 주교의 후임으로 제3대 조선대목구장에 임명된 페레올 주교와 함께 상하이에서 라파엘호를 타고 충청남도 강경을 거쳐 입국했으며 입국 후에는 은이공소를 중심으로 미사와 고해성사 집전 등을 수행하였다. 페레올 주교는 김대건 신부에게 선교사들이 입국할 수 있는 길을 개척할 것을 지시했다. 김대건 신부는 중국 어선들이 조기잡이를 위해 조선 해안에 온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1846년 6월 5일 선교사 입국로 개척을 위한 조선 지도와 편지들을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에게 보내려 하다 발각되어 해주목에 위치한 황해감영의 조사로 천주교 신부라는 사실이 밝혀져 순위도에서 체포된다. 체포된 죄목은 '혹세무민'과 '청나라 밀입국'이었고 최종적으로는 '천주교를 믿는다'는 죄명으로 사형을 선고받는다. 

1846년 9월 16일, 김대건 신부는 용산 이촌동의 새남터 형장에서 참수 당하며 순교하였는데, 편안한 자세로 형을 받아들였다. 최초의 조선인 천주교 사제로서 그가 소명을 수행할 수 있었던 시간은 불과 13개월이었다. 시신은 통상 4일 뒤 연고자가 찾아 가는 것이 관례였으나 김대건 신부는 참수된 자리에 시신을 파묻고 경비를 두어 지키게 했다. 17세 소년 이민식 빈첸시오는 파수 군졸의 눈을 피해 순교 40일이 지난 후에 시신을 거두었고 산길로 밤에만 걸어서 닷새 만에 자신의 고향 선산이 있는 안성시 양성면에 이르러 안장시켰는데 바로 오늘날 미리내 성지이다.

1857년 교황 비오 9세가 가경자로 선포한 것을 시작으로 1925년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시복,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김대건 신부의 아래 턱뼈는 미리내 성지 내의 조그만 성당인 성 요셉 성당 제단 아래에 모셔져 있으며 치아는 절두산 성지 순교기념관에 분리안치, 기타 여러 뼛조각들도 성유물로 전 세계에 산재되어 있는데, 가톨릭대 성신교정 대성당 및 이천시 어농성지 성당에도 김대건 신부의 유해 일부가 모셔져 있다. 2021년에는 탄생 200주년을 맞아 일부 유해를 부르키나파소에 안치한다. <나무위키를 위주로 보완 정리>

 

 

 

☞ 청년 김대건 길 (2) 열반종 총본산, 와우정사 => https://kheenn.tistory.com/15864320 

☞ 청년 김대건 길 (3) 김대건 신부 묘소가 있는 미리내성지 => https://kheenn.tistory.com/158643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