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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산하와 문화재

영서 내륙 최고 고찰, 홍천 공작산 수타사(壽陀寺)

by 모산재 2024. 11. 25.

 

원대리 자작나무숲 트레킹을 마치고 홍천 공작산 수타사로 향한다. 공작산(887m)은 산세가 공작이 날개를 펼친 듯한 데서 유래한 이름으로 봄 철쭉, 가을 단풍이 매우 아름답고 너럭바위와 커다란 소(沼), 기암절벽들이 비경을 이루고 있는 12km 길이의 수타사 계곡으로 유명하다.

 

남은 시간이 많지 않아 수타사 경내를 돌아본 다음 산소길과 수타사 계곡 일부만 걸어보기로 한다.

 

 

 

 

2024. 11. 16.  홍천

 

 

 

수타사 입구 상가

 

 

 

 일제 말기 줄기마다 송진 채취의 커다란 상처가 그대로 남아 있는 아름드리 솔숲

 

 

 

오른쪽으로 수타산 계곡, 잘 여문 늦가을 냇물이 서늘하게 흐르고 있다. 

 

 

 

 입구에는 홍천 출신 세조비, 정희왕후에 대한 만화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다. 

 

 

 

○ 정희왕후 윤씨(貞熹王后 尹氏, 1418~1483)

조선 7대 임금 세조의 왕비이다. 1469년부터 1476년까지 13세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손자 성종 대신 섭정을 하였다. 조선 최초로 대왕대비의 칭호를 받았고, 조선 최초로 수렴청정을 한 왕후로 강한 정치력을 보였다.

1453년 계유정난 때 기밀 누설로 거사를 망설이는 수양에게 손수 갑옷을 입혀 용병을 결행하게 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할 정도로 여장부 기질을 가졌다. 1457년 맏아들 의경세자는 20살 되던 해 병사하였고, 1468년 세조가 승하하며 둘째 아들 예종이 즉위하였지만 14개월만에 20살의 나이로 병사하고 만다.(어린 조카 단종을 몰아내고 교살한 것에 대한 천벌을 받은 것일까...?) 그런데 예종이 죽은 당일 바로 한명회와 결탁하여 의경세자의 둘째 아들 13살의 잘산군(성종) 즉위식을 올린다. 예종의 아들 원자(제안대군)가 있었지만 5살로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의경세자 큰아들 월산대군은 병약하다는 이유로 잘산군을 즉위시킨 것이다. 섭정에 있어서 과단성이 있는 정치적 감각 덕분에 조정은 비교적 안정기를 구가하였다.

남편 세조와 동원이강(同原異岡)의 형태를 이룬 광릉(光陵)에 잠들어 있다.

 

 

 

 수타사 앞을 흐르는 계곡 풍경 

 

 

 

계곡 건너편으로 보이는 수타사 전경

 

 

 

수타사계곡 

 

 

 

국화

 

 

 

앞에서 보는 수타사 전경

 

 

 

'봉황문'이라는 이름의 천왕문, 4천왕상

 

 

 

 

1957년 문화재 해체 수리 과정에서 지국천왕의 배 안에서 월인석보(月印釋譜) 17-18권 2권이 발견되어, 보장각(성보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세조가 편찬한 월인석보는 보물 제745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곳 홍천 출신인 세조비 정희왕후와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 월인석보(月印釋譜)

석가 일대기를 담은 책이다. 초간본 1권 맨 앞에 훈민정음어제서문(御製序文)과 예의(例義) 부분이 한글로 번역된 '훈민정음 언해'가 실려 있는데, '훈민정음 언해'가 실려있는 최초의 문헌이다.

1447년(세종 29년)에 어머니 소헌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수양대군이 석보상절을 편찬했고, 세종이 이를 읽고 훈민정음으로 지은 찬불가인 월인천강지곡을 편찬했다. 세조 5년에 이 두 책을 합한 월인석보를 간행했다. 20살로 요절한 아들 의경세자와 부왕 세종대왕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간행했다고 하는데, 계유정난으로 어린 조카 단종과 사육신 등 수많은 신하를 죽인 자신의 정신적인 고통과 회한을 덜기 위한 과정으로 이해된다.

 

 

 

흥회루(興懷樓)

 

1658년(효종 9)에 건축된 정면 5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집이다. 강원도에서 가장 오래된 누강당 형식의 건물. 강원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대적광전(大寂光殿)

 

임진왜란 때 전소한 것을 1636년에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다포양식으로 중건하였다. 용마루 한가운데 청기와 2개를 올려 놓은 것이 눈에 띈다. 강원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올해(2024년) 보물로 승격되었다.

 

 

 

○ 대적광(大寂光), 대적광전(大寂光殿)

대적광(大寂光)은 '고요함(寂)'과 '빛(光)'이니, 어지러움을 고요함으로 바로 잡는 선정(禪定), 어리석음을 빛으로 이끄는 지혜(智慧)를 나타내는 말이다.

대적광전은 진리(빛)의 부처, 곧 법신불인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한 삼신불(三身佛)을 봉안하여 연화장세계를 상징하게 된다. 원래 법신(法身) · 보신(報身) · 화신(化身)의 삼신불로 비로자나불 · 아미타불 · 석가모니불을 봉안하는 것이 상례이나 우리나라 선종 사찰에서 아미타불 대신 노사나불(盧舍那佛)을 봉안하는 경우가 많다. 경우에 따라 삼신불 좌우에 아미타불과 약사여래를 함께 오불(五佛)을 봉안하기도 하는데, 약사전(藥師殿)과 극락전(極樂殿)을 대적광전에서 함께 수용한 형태가 된다. 본전이 아닐 경우 '화엄전(華嚴殿)', '비로전(毘盧殿)'이라는 이름을 쓴다.

 

 

 

특이하게도, 법당 내에는 협시불 없이 지권인(智拳印)의 수인(手印)을 한 비로자나불만 모시고 있다. (지권인은 곧게 세운 왼손 검지 끝에 오른손 엄지 끝을 맞대고 감싸는 수인이다. 오른손은 불계, 왼손은 중생계를 가리키며 중생과 부처가 하나임을 표현한다.)

 

 

 

일반적인 화사석(火舍石)과는 다른, 법당 앞 불을 밝혔던 석물일까?

 

 

 

 

대적광전의 동쪽에는 정면 5칸 측변 3칸의 팔작지붕집, 커다란 원통보전이 자리잡고 있다. 내부에는 영조 때 조성한 높이 46cm의 작은 목조관음보살좌상이 모셔져 있다. 그러나 압도하는 커다란 전각, 드넓은 법당 공간과의 부조화가 너무 커 보인다.

 

 

 

일반적으로 관음보살을 모신 전각을 관음전이라 하는데 원통보전은 본당일 때 쓰는 명칭이다. 사찰 내에서 가장 큰 당우가 되어야 할 대적광전은 3칸인데 부속 당우로 관음전이 되어야 할 건물이 원통보전으로서 사찰 내에서 가장 큰 5칸 당우가 되어 있는 점 또한 그리 편안한 모습이 아닌 듯하다. 오늘날 사찰이 대형화하는 흐름을 타고 원통보전을 지나치게 크게 지은 듯... 

 

○ 관음전(觀音殿), 원통보전(圓通寶殿)

관세음보살을 모신 전각을 보통 관음전이라 하는데, 주된 전각일 때 '원통전' 또는 '원통보전'이라 한다. 관세음보살이 주원융통(周圓融通)하게 중생의 고뇌를 씻어주는 분이라는 뜻에서 붙은 이름이다. 이외에도 관세음보살이 거한다는 보타락가산에서 따온 '보타전(菩陀殿)', '대비전(大悲殿)'이라는 이름을 쓴다.

관세음보살은 다른 부처나 보살과 달리 중생들에게 현세적인 이익을 주는 보살로, 모습이 다양하고 중생이 원하면 어느 곳에나 나타난다. 왼손에 연꽃이나 감로병을 들고 연화좌 위에 앉은 관음상을 안치하는 것이 일반적이나, 버들가지를 들고 있는 양류관음(楊柳觀音), 보관 위에 11개의 얼굴을 가진 십일면관음, 관세음보살이 인도 남동 해안 포탈라카산의 굴속에 살고 있다는 믿음에서 유래한 해수관음(海水觀音), 그 외에 백의관음(白衣觀音)·용두관음(龍頭觀音)·천수관음(千手觀音) 등을 모시기도 한다.  

 

 

 

 

 

 

 

● 영서내륙 최고 고찰, 수타사(壽陀寺)    


조계종 제4교구 본사인 월정사의 말사이다. 708년(신라 33대 성덕왕 7년)에 원효가 우적산에 창건한 '일월사'가 효시이며, 1457년(세조 3)에 지금의 위치로 옮긴 뒤 수타사로 절 이름을 바꾸었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36년(인조 14)에 공잠이 재건했다.

현존 당우로는 대적광전·흥회루·봉황문·심우산방·요사채 등이 있고, 이밖에 월인석보(강원특별자치도 유형문화재 제18호), 3층석탑, 4기의 부도, 사리탑, 1364년 만든 동종 등이 있다.